'유전무죄 무전유죄' 지강헌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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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0월 8일 영등포 교소도에서 대전과 공주 교도소, 공주치료감호소로 이송되던 25명 중 12명이 교도관을 흉기로 찌르고 탈주하여 서울시내로 잠입했다. 이때, 권총 한자루와 총알 5발을 탈취하였다.
이 사건은 지강헌 사건으로도 알려져있는데, 지강헌의 경우 흉악범이 아니라 잡범이었다. 이 당시 사회보호법에 의한 보호감호제도 때문에 징역형을 마치고도 보호감호처분을 받아야해 17년간 구속이 되어야했다. 보호감호제도는 이중처벌적이라는 이유로 2005년 8월 4일에 폐지
하지만 당시 70여억 원을 횡령한 전경환(전두환 동생)은 겨우 7년의 징역(실제로는 3년 3개월 만에 ㅌㅌ함)에 불만을 가지고 탈출을 하게 되었다.
탈출한 인원 12명중 7명은 경찰에 잡히게 되고 4명은 가정집을 은신처 삼아 돌아다니다 마지막 서대문구 북가좌동 고모씨의 집에 잠입해서 고 씨의 가족을 인질로 삼고, 이 인질극은 TV로 생중계가 되었다. 1명은 1년 9개월만에 체포
•지강헌 (당시 34세, 1954년생) : 사살
•안광술 (당시 22세, 1966년생) : 자살
•강영일 (당시 21세, 1967년생) : 생존
•한의철 (당시 20세, 1968년생) : 자살
인질극은 새벽 4시부터 경찰과 대치하였고, 인질범들은 밖에서 들여온 소주 5병과 양주 1병을 마시는 등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를 보였다. 지강헌은 인질로 삼은 선숙씨 옆에서 권총을 들고 말을했는데
"난 대한민국 최후의 시인이다. 행복한 거지가 되고 싶었던 낭만적인 염세주의자다." "대한민국 비리에 대해 모두 파헤치고 죽겠다" 실제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돈 없고 권력 없이는 못사게는 이 사회다. 전경환의 형량이 나보다 적은 것은 말도 안된다" "더 살기에 지쳤다" "대한민국의 비리를 밝히겠다. 돈이 있으면 판검사도 살 수 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우리 법이 이렇다"는 등의 말을하였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이때 나온 말이다.
인질범들은 부인과 아들을 풀어주며 봉고차를 요청했다. 약속한 시간이 되자 강영일이 협상을 위해 밖으로 나갔고, 차량이 준비되지 않았다는것을 알자 강영일은 다시 집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당시 지강헌은
영일아, 내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내 마음을 갖고 가라' 라며 들어오려는 강영일 앞(바닥)에 총을쏘며 자수를 권하였고, 강영일은 결국 자수하게 되었다.
그 후 남은 인질범 중 안광술과 한의철은 지강헌의 총을 뺏어 자살하였고, 마지막 지강헌은 비 지스의 홀리데이를 요청했다. 지강헌은 노래를 들으며 깨진 창문 유리조각으로 자살을 시도하였지만 이를 저지하려는 경찰 특공대원의 사격(다리와 옆구리)에 죽게되었다.
탈주범들은 4명은 마지막 고씨 집에 잠입 하기전에도 여러집에 잠입하여 묶었었고, 폭력, 욕설, 협박 등 위해가 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4번째 집에서는 집주인이 신발을 벗으라는 말에 순수히 신발도 벗고 바닥을 닦기도 하였다. 안정을 찾은 여대생 인질범에게는 "어떻게 죽는 게 제일 멋있어 보이냐. 옥상에 떨어지는 게 멋있냐. 총에 맞아 죽는 게 멋있냐"라고 했고 여대생은 "멋있어 보이는 죽음이 어디 있느냐"고 답했다.
여대생은 탈주범들이 순수히 나가게 할 방법을 생각하다 성경책을 읽어주기로 했고, 이때 지강헌이 "나를 위해 기도해줄 수 있겠냐"고 물었으며, "내가 마지막 순간 예수님 마음이 되게 해달라"고 말했다. 여대생의 기도에 지강헌은 펑펑 울었었다고 회상했다.
집 밖으로 나간 덕분에 홀로 살아남은 강영일은 징역 14년을 구형받았지만 7년으로 감형되었다. 그 이유는 인질들이 그를 위해 써준 탄원서 때문이었다. 인질들의 탄원서에는
"평범하고 단란한 우리 가정에 그날은 잊을 수 없다. 처음에는 모두 겁을 먹었지만 이들의 행동은 시간이 흐를수록 부드러워졌다. 이들에게서 나쁜 냄새가 아닌 인간다운 눈빛을 읽었고 후회의 마음도 읽을 수 있었다." 라는 내용에 이어
"아침밥을 먹은 이들은 '잘 먹었습니다 아주머니. 신세 많이 졌다'라는 말도 남겼다. 그리고 자기들이 떠나면 곧 신고를 하라며 고맙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이들이 가고 난 후 우리 네 식구 모두 울었다. 무엇때문에 울었는지 모르겠따. 정말 죄는 미웠지만 사람은 미워할 수 없었다. 부디 이 탄원서를 읽으시고 다시 한번의 기회를 주셔서 희망의 빛을 벗 삼아 세상의 좋은 등대지기가 되길 간절히 기원한다"는 염원이 담겼다.
5개의 집중 3개의 집에서 강영일의 감형을 탄원하였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이 사건 이후로 고유명사처럼 사용되고있다.
이 사건은 지강헌 사건으로도 알려져있는데, 지강헌의 경우 흉악범이 아니라 잡범이었다. 이 당시 사회보호법에 의한 보호감호제도 때문에 징역형을 마치고도 보호감호처분을 받아야해 17년간 구속이 되어야했다. 보호감호제도는 이중처벌적이라는 이유로 2005년 8월 4일에 폐지
하지만 당시 70여억 원을 횡령한 전경환(전두환 동생)은 겨우 7년의 징역(실제로는 3년 3개월 만에 ㅌㅌ함)에 불만을 가지고 탈출을 하게 되었다.
탈출한 인원 12명중 7명은 경찰에 잡히게 되고 4명은 가정집을 은신처 삼아 돌아다니다 마지막 서대문구 북가좌동 고모씨의 집에 잠입해서 고 씨의 가족을 인질로 삼고, 이 인질극은 TV로 생중계가 되었다. 1명은 1년 9개월만에 체포
•지강헌 (당시 34세, 1954년생) : 사살
•안광술 (당시 22세, 1966년생) : 자살
•강영일 (당시 21세, 1967년생) : 생존
•한의철 (당시 20세, 1968년생) : 자살
인질극은 새벽 4시부터 경찰과 대치하였고, 인질범들은 밖에서 들여온 소주 5병과 양주 1병을 마시는 등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를 보였다. 지강헌은 인질로 삼은 선숙씨 옆에서 권총을 들고 말을했는데
"난 대한민국 최후의 시인이다. 행복한 거지가 되고 싶었던 낭만적인 염세주의자다." "대한민국 비리에 대해 모두 파헤치고 죽겠다" 실제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돈 없고 권력 없이는 못사게는 이 사회다. 전경환의 형량이 나보다 적은 것은 말도 안된다" "더 살기에 지쳤다" "대한민국의 비리를 밝히겠다. 돈이 있으면 판검사도 살 수 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우리 법이 이렇다"는 등의 말을하였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이때 나온 말이다.
인질범들은 부인과 아들을 풀어주며 봉고차를 요청했다. 약속한 시간이 되자 강영일이 협상을 위해 밖으로 나갔고, 차량이 준비되지 않았다는것을 알자 강영일은 다시 집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당시 지강헌은
영일아, 내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내 마음을 갖고 가라' 라며 들어오려는 강영일 앞(바닥)에 총을쏘며 자수를 권하였고, 강영일은 결국 자수하게 되었다.
그 후 남은 인질범 중 안광술과 한의철은 지강헌의 총을 뺏어 자살하였고, 마지막 지강헌은 비 지스의 홀리데이를 요청했다. 지강헌은 노래를 들으며 깨진 창문 유리조각으로 자살을 시도하였지만 이를 저지하려는 경찰 특공대원의 사격(다리와 옆구리)에 죽게되었다.
탈주범들은 4명은 마지막 고씨 집에 잠입 하기전에도 여러집에 잠입하여 묶었었고, 폭력, 욕설, 협박 등 위해가 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4번째 집에서는 집주인이 신발을 벗으라는 말에 순수히 신발도 벗고 바닥을 닦기도 하였다. 안정을 찾은 여대생 인질범에게는 "어떻게 죽는 게 제일 멋있어 보이냐. 옥상에 떨어지는 게 멋있냐. 총에 맞아 죽는 게 멋있냐"라고 했고 여대생은 "멋있어 보이는 죽음이 어디 있느냐"고 답했다.
여대생은 탈주범들이 순수히 나가게 할 방법을 생각하다 성경책을 읽어주기로 했고, 이때 지강헌이 "나를 위해 기도해줄 수 있겠냐"고 물었으며, "내가 마지막 순간 예수님 마음이 되게 해달라"고 말했다. 여대생의 기도에 지강헌은 펑펑 울었었다고 회상했다.
집 밖으로 나간 덕분에 홀로 살아남은 강영일은 징역 14년을 구형받았지만 7년으로 감형되었다. 그 이유는 인질들이 그를 위해 써준 탄원서 때문이었다. 인질들의 탄원서에는
"평범하고 단란한 우리 가정에 그날은 잊을 수 없다. 처음에는 모두 겁을 먹었지만 이들의 행동은 시간이 흐를수록 부드러워졌다. 이들에게서 나쁜 냄새가 아닌 인간다운 눈빛을 읽었고 후회의 마음도 읽을 수 있었다." 라는 내용에 이어
"아침밥을 먹은 이들은 '잘 먹었습니다 아주머니. 신세 많이 졌다'라는 말도 남겼다. 그리고 자기들이 떠나면 곧 신고를 하라며 고맙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이들이 가고 난 후 우리 네 식구 모두 울었다. 무엇때문에 울었는지 모르겠따. 정말 죄는 미웠지만 사람은 미워할 수 없었다. 부디 이 탄원서를 읽으시고 다시 한번의 기회를 주셔서 희망의 빛을 벗 삼아 세상의 좋은 등대지기가 되길 간절히 기원한다"는 염원이 담겼다.
5개의 집중 3개의 집에서 강영일의 감형을 탄원하였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이 사건 이후로 고유명사처럼 사용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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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1-14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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