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목사 가톨릭 개종 체험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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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지 몇 주가 지난 후 우리는 신학교로 떠났습니다. 그때는 얼마나 좋았던지, 함께 신학석사 과정을 공부했습니다. 저는 보스턴에 있는 고던 콘웰 신학교에서 3년과정의 석사과정을 공부했습니다. 아내도 2년 과정의 공부를 마치고 함께 석사학위를 받고 졸업했습니다. 그 때 저는 수석으로 졸업했는데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앙심을 품고 공부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신학교 때 저를 아는 사람들은 저를 늘 긴장하고 있는 사람으로 기억합니다. 제가 깨어있는 동안에는 모두 성경이나 그에 관련된 책을 읽고 연구와 자료를 찾기 위해 헌책방을 뒤졌습니다. 킴벌리와 저는 몇년 동안 참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때를 되돌아보면 그 때 제 삶에 큰 획을 긋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첫 번째로는 킴벌리가 첫 해에 들은 과목이 기독교 윤리라는 과목이었는데, 제가 일 년전에 이미 공부한 과목이었습니다. 데이비스 박사는 학생들이 소그룹으로 나뉘어 한 주제를 선택하여 토론하게 했는데 그중 한 그룹은 낙태를 주제로 택했고 다른 그룹들은 핵전쟁이나 사형제도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식사 때 킴벌리는 자기 그룹이 피임에 대해 연구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저는 “왜 피임이야?” 하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그 클래스를 들었던 일 년전에는 아무도 그 토론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그녀는 “ 다른 3명이 이미 신청을 했고 오늘 첫 모임을 가지고 대표를 뽑았는데 시작도 하기 전에 그가 우리 연구 결과부터 발표했어. 그가 말하기를, 우리 모두는 개신교도이며 성경적인 크리스챤으로 피 임이 괜찮다고 알고 있다. 아니 I.U.D.와 같은 낙태를 유발하는 피임법을 사용하지 않는 한 괜찮다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은 크리스챤이라고 주장하면서 “피임을 반대하는 유일한 사람들이 가톨릭교 신자들이다. 그들이 피임을 반대하는 이유는 물론 독신을 지키는 교황과 사제들이 이끌어가기 때문에 자신들은 아이를 키울 필요가 없으면서, 천주교 부모들이 아이를 많이 낳아서 키워야 사제와 수녀들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 논쟁은 킴벌리에게 큰 도움이 못되었습니다. “당신은 그게 최고의 논쟁이라고 생각해요?” 하고 물어보는 킴벌리에게 나는 “글쎄 , 당신이 혼자 해보고 싶어?“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킴벌리는 이 문제를 혼자 연구해보겠다고 했습니다. 일주일후, 복도에서 만난 테리가 나에게 “당신 아내가 피임에 대한 흥미 있는 것을 찾아냈어요.” 하고 말했습니다.” 내가 “피임에 대해 흥미 있는 게 뭐예요?” 하고 물어보자 그는 “당신 부인이 쟎아요. 직접 알아보세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날 밤 저녁 식사때 내가 그녀에게 물었죠. “테리가 말하는 게 뭐야?” 그녀는 “1930년 까지는 교파를 막론하고 개신교는 모두가 예외없이 피임을 반대했다는 것을 알아 냈어요.” 라고 했습니다. 내가 “뭐라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잔재들을 찾아내려면 몇 세기가 걸릴지도 몰라” 하고 말하자 “그런다 해도 난 그것에 대해 알아볼 거예요.” 하고 말했죠. 그리고 한 주일이 지났을 때 테리가 다시 나를 불렀습니다. “그녀의 논쟁이 일리가 있어요.” 제가 말했습니다. “성경에 피임을 반대 하는 게 나온다는 논쟁인가요?” 그는 “그녀에게 물어보세요.” 했고 저는 그때 그런 주제는 직접 물어보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서 “그래야겠어요. 직접 물어볼께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하자 아내는 책을 한권 건넸어요. 그것은 산아제한과 혼인계약에 관한 것으로 잔 키플리가 쓴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최근 들어 다시 나온 것으로 “성과 혼인계약”이라는 제목이었어요. 저는 성경을 수차례 읽었고 성경전체에 걸쳐 계약은 주가 되는 개념이기 때문에 하느님에 대해 알고 싶으면 계약의 개념에 대해 이해해야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어서 이 책을 큰 흥미를 갖고 열심히 읽었습니다. 저는 책 제목에 있는 “피임과 혼인 계약”이라는 것에 흥미 를 느꼈습니다. 책을 읽어가면서 “이봐 킴벌리, 저자가 가톨릭교회 신자잖아? 날보고 가톨릭교회 책을 읽으라는 거야?” 했지만 그 순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개념을 가톨릭교회 신자가 가로채서 무얼 하고 있는 걸까? 하는 호기심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책을 두 세장을 읽가면서 저는 저자의 말이 너무 설득력이 있어서 책을 던져 버렸습니다. 그 사람의 말이 이해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다시 책을 들고 더 읽기 시작했는데 그의 주장이 정말 맞는 것 같았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계약에 따라 혼인하는 것은 그냥 물리적인 행동이 아니라 하느님이 계획하신 것으로 혼인 계약을 갱신하는 영적인 행위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계약에는 그 계약을 갱신하는 때가 있는데 계약을 갱신하는 행위가 은총의 순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계약을 갱신할 때, 하느님께서는 은총을 내려 주시며 은총은 생명이며 힘이고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키플리는 하느님께서 결혼 행위를 생명을 주는 사랑의 힘으로 제정하셨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혼인 계약에서는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데, 하느님께서 두 사람이 하나가 되게 만드셨고 그래서 그들은 하나가 되어 9 개월 후에는 이름을 지어 주어 야 할 아기를 얻게 됩니다. 그 생명을 잉태했을 때 그것은 하느님께서 혼인계약을 통해 만든 하나가 되는 것이 실현된 것이며 이것이 하느님께서 만드신 혼인 계약 전부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하셨는데 세 분이 한분(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고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으며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워라” 하셨습니다. 둘은 하나가 되고 둘이 하나가 된 표징이 자녀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셋이 하나가 된 다는 겁니다.
저는 그것이 진심으로 이해가 되기 시작했고 그는 이 외에도 그 책에서 여러 가지 논쟁을 이끌어가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 책을 다 읽었을 때 저는 완전히 그의 말에 동의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1930 년대에 성공회가 이 전통을 어기고 피임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며, 그 뒤를 이어 모든 중요한 개신교회 교단들이 성의 혁명이라는 압력을 견디지 못해 같은 길을 걸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근거한 오래된 교회의 전통을 지키는 유일한 교단이 가톨릭교회라는 사실이 저를 몹시 힘들게 했습니다. 1960년과 70년대에는 제가 속한 미국 장로교회가 피임을 승인했을 뿐 아니라 늘어나는 낙태에 대한 연방지원을 승락했다는 것을 알고 실망했습니다. 그리고 개신교가 여기저기서 조금씩 타협한 내용들을 찾아내다가 나중에는 그 타협이 홍수가 되어 넘쳐난 것을 알게 됐습니다. 저는 “가톨릭교회는 2천년이 된 교회로서 무언가 옳은 것을 추구하고 것에 근본을 두고 있었어.” 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우리집에서는 눈먼 바보도 도토리 하나는 찾아낸다는 말을 해왔는데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대학원 2년째 해를 저는 그렇게 보냈습니다. 신학대 학원 3년째인 마지막 해에 저에게는 위기가 왔습니다.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계약에 대한 과목을 가르치는 신학자인 가르치는 쉐퍼드라는 교수가 있었습니다. 개신교단에서는 그의 과목이 이단이라고 하며 그 교수를 이단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가 쓴 논문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습니다. 교수님의 글을 읽으면서 저는 그분도 저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개신교에서는 계약을 서로 교환할 수 있는 법적 계약과 동의어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계약을 맺을 때도 인간과의 계약과 같은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느님께 우리의 죄를 드리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셨으며 구원을 위해서는 모든 것이 믿음에 의한 거래인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연구를 할수록 성경에서는 계약이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결혼과 창녀와의 차이만 큼이나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여러분이 부동산 계약을 할 때 처럼 서로의 것을 계약을 교환하는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이것은 너의 것이고 저것은 내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계약을 맺으실 때도 그 분은 “나는 너의 하느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히브리어를 공부한 후에 저는 “Am’이 히브리인에게는 사람을 뜻하는데 친척, 가족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너의 하느님이며 아버지가 되고, 너는 내 가족 내 아들 딸, 내 식구가 될 것이다.” 그래서 계약은 우리가 하느님과 가족이 되는 왕직으로 연결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쉐퍼드 교수의 논문을 읽고 저와 같이 하느님 과의 계약은 아들 신분의 계약이라고 말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그래, 맞아! 이게 맞아” 하고 생각했지만 그게 왜 이단인지는 의문이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쉐퍼드 교수는 ‘믿음만으로’ 라는 것에 의문을 제 기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말도 안돼, 그건 복음인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위해 돌 아 가셨고, 나는 그분이 나를 구하셨다는 것을 믿는 단순한 진리이고 이미 다 끝난 얘기인데 왜 그 교수가 믿음만으로라는데 질문을 던지는 것일까? 그럴 수는 없어!”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저는 계약에 대한 당신의 글을 읽었는데 여러가지로 이해가 됩니다. 저도 거의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으니까요. 그런데 어째서 교수님은 루터의 ‘믿음만으로’ 라는 교리에 의문을 제기하게 됐습니까?” 쉐퍼드 교수는 루터의 의롭게 된다는 교리는 신앙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고 제한시킨 것이라서 그 안에 진리가 담겨있긴 해도 여러 가지 다른 중요한 진리들을 놓쳤다고 말했습니다.
전화를 끊었을 때 저는 이 문제를 좀 더 집중적으로 파고 들었습니다. 마틴 루터와 모든 성경적 크리스챤과 개신교도들에게는 하느님이 판사이며 계약은 법정에서 범죄자를 심문하는 장면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처벌을 다 대신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의로움을 입었고 그분은 우리의 죄를 지고 가셔서 우리는 자유롭게 되어 의로워진 것입니다. 마틴 루터에게 구원은 법적인 교환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바오로는 분명히 구원은 그 이상의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구원은 로마 법정이 아닌 히브리인들의 가족 법정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단순히 심판하시는 판사가 아니라 아버지이시며 그분의 심판은 아버지로서 하시는 것이라는 것, 예수님은 우리의 처벌을 대신 받는 단순한 무죄한 희생물이 아니시라는 것, 우리의 수많은 형제 중에 맏이시며, 가족 중 가장 큰형이시고 우리를 도망간 탕자나 하느님의 가족에서 떨어져 나간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새 계약에서 법적인 교환뿐 아니라 하느님 외아들의 신분을 우리에게 주셔서 참으로 하느님의 가족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것을 친구들과 나누자 그들은 “그래, 맞아, 그게 바오로야!”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루터와 칼빈의 글을 읽었을 때, 저는 더 이상 그들의 글에서 이러한 신념을 찾아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들은 제가 성경을 공부하도록 훈련시켰지만 그들의 가르침에 중대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첫째, 성경에는 어디에도 오직 믿음만으로라는 구절이 없으며 두 번 째로, 마틴 루터가 독일어 성경번역판에 로마서 3장에 “만으로” 라는 것이 그리스어판에 없다는 것을 잘알면서도 삽입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믿음 만으로가잘못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스말로 된 거룩한 성경 어디에도 성령께서 성경저자들에게 믿음만으로 구원된다는 영감을 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바오로는 우리에게 믿음으로 구원된다고 가르쳤으나 갈라디아서에서 그는 우리가 사랑 안에서 일하는 믿음 안에서 구원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것이 바로 가족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아버지는 아이들한테 “ 얘들아 너희들은 내 가족이고 네 친구들은 다 내 가족이 아니다, 너희들은 일할 필요가 없다. 너희들은 복종할 필요도 없다, 너희들은 희생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너희들은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너희들이 어떻게 하던 간에 상속을 받을 것이다. “ 하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는 게 아닙니다.
저는 마음이 바뀌었고 걱정이 많이 됐습니다. 제가 아는 가장 탁월한 교수인 잔 거스트너 박사는 한때 “만약 우리가 믿음만으로라는 것이 잘못이라면 다음날 아침 나는 로마의 바티칸 밖에 무릎 꿇고 앉아서 속죄할 것이다.” 라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무슨 웃기는 논리냐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정확하게 짚었던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그 부분에서 모든 다른 교리가 나오는 중요한 것입니다. 때문에 만약 그 부분에서 잘못됐다면 어디서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확실하게 알아야 하는 큰 숙제를 해야 할 입장이 되었 습니다. 저는 걱정이 됐지만 크게 염려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당시 스코틀랜드는 계약신학이 탄생되고 발전시킨 곳이기 때문에 저는 애버딘 대학교에서 계약 교리를 공부할 계획이었습니다. 제 마음은 그곳에서 계약에 대한 공부를 하고 싶은 열정으로 가득했습니다. 결국 그것이 제 박사 논문 거리가 될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당장 이 문제 해결에 나설 마음은 없었 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킴벌리가 임신을 했습니다. 마가렛 대처영국 수상은 미국인이 그 나라에서 아기를 낳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스코틀랜드로 가서 공부할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일년을 쉬면서 졸업이 가까워지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로는 킴벌리가 첫 해에 들은 과목이 기독교 윤리라는 과목이었는데, 제가 일 년전에 이미 공부한 과목이었습니다. 데이비스 박사는 학생들이 소그룹으로 나뉘어 한 주제를 선택하여 토론하게 했는데 그중 한 그룹은 낙태를 주제로 택했고 다른 그룹들은 핵전쟁이나 사형제도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식사 때 킴벌리는 자기 그룹이 피임에 대해 연구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저는 “왜 피임이야?” 하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그 클래스를 들었던 일 년전에는 아무도 그 토론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그녀는 “ 다른 3명이 이미 신청을 했고 오늘 첫 모임을 가지고 대표를 뽑았는데 시작도 하기 전에 그가 우리 연구 결과부터 발표했어. 그가 말하기를, 우리 모두는 개신교도이며 성경적인 크리스챤으로 피 임이 괜찮다고 알고 있다. 아니 I.U.D.와 같은 낙태를 유발하는 피임법을 사용하지 않는 한 괜찮다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은 크리스챤이라고 주장하면서 “피임을 반대하는 유일한 사람들이 가톨릭교 신자들이다. 그들이 피임을 반대하는 이유는 물론 독신을 지키는 교황과 사제들이 이끌어가기 때문에 자신들은 아이를 키울 필요가 없으면서, 천주교 부모들이 아이를 많이 낳아서 키워야 사제와 수녀들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 논쟁은 킴벌리에게 큰 도움이 못되었습니다. “당신은 그게 최고의 논쟁이라고 생각해요?” 하고 물어보는 킴벌리에게 나는 “글쎄 , 당신이 혼자 해보고 싶어?“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킴벌리는 이 문제를 혼자 연구해보겠다고 했습니다. 일주일후, 복도에서 만난 테리가 나에게 “당신 아내가 피임에 대한 흥미 있는 것을 찾아냈어요.” 하고 말했습니다.” 내가 “피임에 대해 흥미 있는 게 뭐예요?” 하고 물어보자 그는 “당신 부인이 쟎아요. 직접 알아보세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날 밤 저녁 식사때 내가 그녀에게 물었죠. “테리가 말하는 게 뭐야?” 그녀는 “1930년 까지는 교파를 막론하고 개신교는 모두가 예외없이 피임을 반대했다는 것을 알아 냈어요.” 라고 했습니다. 내가 “뭐라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잔재들을 찾아내려면 몇 세기가 걸릴지도 몰라” 하고 말하자 “그런다 해도 난 그것에 대해 알아볼 거예요.” 하고 말했죠. 그리고 한 주일이 지났을 때 테리가 다시 나를 불렀습니다. “그녀의 논쟁이 일리가 있어요.” 제가 말했습니다. “성경에 피임을 반대 하는 게 나온다는 논쟁인가요?” 그는 “그녀에게 물어보세요.” 했고 저는 그때 그런 주제는 직접 물어보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서 “그래야겠어요. 직접 물어볼께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하자 아내는 책을 한권 건넸어요. 그것은 산아제한과 혼인계약에 관한 것으로 잔 키플리가 쓴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최근 들어 다시 나온 것으로 “성과 혼인계약”이라는 제목이었어요. 저는 성경을 수차례 읽었고 성경전체에 걸쳐 계약은 주가 되는 개념이기 때문에 하느님에 대해 알고 싶으면 계약의 개념에 대해 이해해야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어서 이 책을 큰 흥미를 갖고 열심히 읽었습니다. 저는 책 제목에 있는 “피임과 혼인 계약”이라는 것에 흥미 를 느꼈습니다. 책을 읽어가면서 “이봐 킴벌리, 저자가 가톨릭교회 신자잖아? 날보고 가톨릭교회 책을 읽으라는 거야?” 했지만 그 순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개념을 가톨릭교회 신자가 가로채서 무얼 하고 있는 걸까? 하는 호기심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책을 두 세장을 읽가면서 저는 저자의 말이 너무 설득력이 있어서 책을 던져 버렸습니다. 그 사람의 말이 이해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다시 책을 들고 더 읽기 시작했는데 그의 주장이 정말 맞는 것 같았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계약에 따라 혼인하는 것은 그냥 물리적인 행동이 아니라 하느님이 계획하신 것으로 혼인 계약을 갱신하는 영적인 행위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계약에는 그 계약을 갱신하는 때가 있는데 계약을 갱신하는 행위가 은총의 순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계약을 갱신할 때, 하느님께서는 은총을 내려 주시며 은총은 생명이며 힘이고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키플리는 하느님께서 결혼 행위를 생명을 주는 사랑의 힘으로 제정하셨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혼인 계약에서는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데, 하느님께서 두 사람이 하나가 되게 만드셨고 그래서 그들은 하나가 되어 9 개월 후에는 이름을 지어 주어 야 할 아기를 얻게 됩니다. 그 생명을 잉태했을 때 그것은 하느님께서 혼인계약을 통해 만든 하나가 되는 것이 실현된 것이며 이것이 하느님께서 만드신 혼인 계약 전부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하셨는데 세 분이 한분(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고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으며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워라” 하셨습니다. 둘은 하나가 되고 둘이 하나가 된 표징이 자녀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셋이 하나가 된 다는 겁니다.
저는 그것이 진심으로 이해가 되기 시작했고 그는 이 외에도 그 책에서 여러 가지 논쟁을 이끌어가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 책을 다 읽었을 때 저는 완전히 그의 말에 동의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1930 년대에 성공회가 이 전통을 어기고 피임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며, 그 뒤를 이어 모든 중요한 개신교회 교단들이 성의 혁명이라는 압력을 견디지 못해 같은 길을 걸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근거한 오래된 교회의 전통을 지키는 유일한 교단이 가톨릭교회라는 사실이 저를 몹시 힘들게 했습니다. 1960년과 70년대에는 제가 속한 미국 장로교회가 피임을 승인했을 뿐 아니라 늘어나는 낙태에 대한 연방지원을 승락했다는 것을 알고 실망했습니다. 그리고 개신교가 여기저기서 조금씩 타협한 내용들을 찾아내다가 나중에는 그 타협이 홍수가 되어 넘쳐난 것을 알게 됐습니다. 저는 “가톨릭교회는 2천년이 된 교회로서 무언가 옳은 것을 추구하고 것에 근본을 두고 있었어.” 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우리집에서는 눈먼 바보도 도토리 하나는 찾아낸다는 말을 해왔는데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대학원 2년째 해를 저는 그렇게 보냈습니다. 신학대 학원 3년째인 마지막 해에 저에게는 위기가 왔습니다.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계약에 대한 과목을 가르치는 신학자인 가르치는 쉐퍼드라는 교수가 있었습니다. 개신교단에서는 그의 과목이 이단이라고 하며 그 교수를 이단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가 쓴 논문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습니다. 교수님의 글을 읽으면서 저는 그분도 저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개신교에서는 계약을 서로 교환할 수 있는 법적 계약과 동의어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계약을 맺을 때도 인간과의 계약과 같은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느님께 우리의 죄를 드리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셨으며 구원을 위해서는 모든 것이 믿음에 의한 거래인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연구를 할수록 성경에서는 계약이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결혼과 창녀와의 차이만 큼이나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여러분이 부동산 계약을 할 때 처럼 서로의 것을 계약을 교환하는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이것은 너의 것이고 저것은 내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계약을 맺으실 때도 그 분은 “나는 너의 하느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히브리어를 공부한 후에 저는 “Am’이 히브리인에게는 사람을 뜻하는데 친척, 가족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너의 하느님이며 아버지가 되고, 너는 내 가족 내 아들 딸, 내 식구가 될 것이다.” 그래서 계약은 우리가 하느님과 가족이 되는 왕직으로 연결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쉐퍼드 교수의 논문을 읽고 저와 같이 하느님 과의 계약은 아들 신분의 계약이라고 말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그래, 맞아! 이게 맞아” 하고 생각했지만 그게 왜 이단인지는 의문이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쉐퍼드 교수는 ‘믿음만으로’ 라는 것에 의문을 제 기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말도 안돼, 그건 복음인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위해 돌 아 가셨고, 나는 그분이 나를 구하셨다는 것을 믿는 단순한 진리이고 이미 다 끝난 얘기인데 왜 그 교수가 믿음만으로라는데 질문을 던지는 것일까? 그럴 수는 없어!”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저는 계약에 대한 당신의 글을 읽었는데 여러가지로 이해가 됩니다. 저도 거의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으니까요. 그런데 어째서 교수님은 루터의 ‘믿음만으로’ 라는 교리에 의문을 제기하게 됐습니까?” 쉐퍼드 교수는 루터의 의롭게 된다는 교리는 신앙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고 제한시킨 것이라서 그 안에 진리가 담겨있긴 해도 여러 가지 다른 중요한 진리들을 놓쳤다고 말했습니다.
전화를 끊었을 때 저는 이 문제를 좀 더 집중적으로 파고 들었습니다. 마틴 루터와 모든 성경적 크리스챤과 개신교도들에게는 하느님이 판사이며 계약은 법정에서 범죄자를 심문하는 장면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처벌을 다 대신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의로움을 입었고 그분은 우리의 죄를 지고 가셔서 우리는 자유롭게 되어 의로워진 것입니다. 마틴 루터에게 구원은 법적인 교환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바오로는 분명히 구원은 그 이상의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구원은 로마 법정이 아닌 히브리인들의 가족 법정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단순히 심판하시는 판사가 아니라 아버지이시며 그분의 심판은 아버지로서 하시는 것이라는 것, 예수님은 우리의 처벌을 대신 받는 단순한 무죄한 희생물이 아니시라는 것, 우리의 수많은 형제 중에 맏이시며, 가족 중 가장 큰형이시고 우리를 도망간 탕자나 하느님의 가족에서 떨어져 나간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새 계약에서 법적인 교환뿐 아니라 하느님 외아들의 신분을 우리에게 주셔서 참으로 하느님의 가족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것을 친구들과 나누자 그들은 “그래, 맞아, 그게 바오로야!”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루터와 칼빈의 글을 읽었을 때, 저는 더 이상 그들의 글에서 이러한 신념을 찾아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들은 제가 성경을 공부하도록 훈련시켰지만 그들의 가르침에 중대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첫째, 성경에는 어디에도 오직 믿음만으로라는 구절이 없으며 두 번 째로, 마틴 루터가 독일어 성경번역판에 로마서 3장에 “만으로” 라는 것이 그리스어판에 없다는 것을 잘알면서도 삽입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믿음 만으로가잘못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스말로 된 거룩한 성경 어디에도 성령께서 성경저자들에게 믿음만으로 구원된다는 영감을 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바오로는 우리에게 믿음으로 구원된다고 가르쳤으나 갈라디아서에서 그는 우리가 사랑 안에서 일하는 믿음 안에서 구원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것이 바로 가족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아버지는 아이들한테 “ 얘들아 너희들은 내 가족이고 네 친구들은 다 내 가족이 아니다, 너희들은 일할 필요가 없다. 너희들은 복종할 필요도 없다, 너희들은 희생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너희들은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너희들이 어떻게 하던 간에 상속을 받을 것이다. “ 하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는 게 아닙니다.
저는 마음이 바뀌었고 걱정이 많이 됐습니다. 제가 아는 가장 탁월한 교수인 잔 거스트너 박사는 한때 “만약 우리가 믿음만으로라는 것이 잘못이라면 다음날 아침 나는 로마의 바티칸 밖에 무릎 꿇고 앉아서 속죄할 것이다.” 라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무슨 웃기는 논리냐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정확하게 짚었던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그 부분에서 모든 다른 교리가 나오는 중요한 것입니다. 때문에 만약 그 부분에서 잘못됐다면 어디서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확실하게 알아야 하는 큰 숙제를 해야 할 입장이 되었 습니다. 저는 걱정이 됐지만 크게 염려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당시 스코틀랜드는 계약신학이 탄생되고 발전시킨 곳이기 때문에 저는 애버딘 대학교에서 계약 교리를 공부할 계획이었습니다. 제 마음은 그곳에서 계약에 대한 공부를 하고 싶은 열정으로 가득했습니다. 결국 그것이 제 박사 논문 거리가 될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당장 이 문제 해결에 나설 마음은 없었 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킴벌리가 임신을 했습니다. 마가렛 대처영국 수상은 미국인이 그 나라에서 아기를 낳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스코틀랜드로 가서 공부할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일년을 쉬면서 졸업이 가까워지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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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3-03-09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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