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많이 늙으셨네” 자살의 징후들… “실감이 안 나요.” 짧은 이 한 마디가 가족의 현재 심경을 모두 말해주는 듯했다. 1월 6일 새벽, 스스로 삶의 끈을 놓아버린 조성민. 10여 일이 흐른 뒤 조성민의 아버지가 입원 중인 고려대의료원 안암병원에서 만난 누나와 어머니는 충격과 슬픔에서 벗어나려 노력 중이었다. 하지만 조성민에 대한 안타까움만은 지울 수 없는 듯했다. 누나 조성미씨도, 인터뷰 중 뒤늦게 합류한 어머니도 다소 예민한 질문에도 비교적 담담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비록 늦었지만 조성민에 대한 세상의 편견과 오해를 조금이라도 풀어주고 싶은 가족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읽혔다.
충격이 컸을 텐데 마음은 좀 추슬렀나요 저희 부모님이 의외로 강하세요. 어떻게든 이 상황을 이겨내려고 하셔서 다행이에요. 사실 아버지 몸이 많이 아프세요. 3개월 간 누워 계셨어요. 장례 치를 때도 건강이 좋지 못했지만 성민이 저렇게 됐는데 가봐야 한다며 휠체어를 타고 나왔죠. 그날 거의 마약 같은 진통제를 계속 드시면서 버티셨어요.
유서가 발견됐는데 어떤 내용이었나요 유품을 정리하다 배낭에서 유서를 발견하곤 너무 놀랐어요. “더는 살아갈 자신도 용기도 없어 이만 삶을 놓으려고 한다”며 가족에게 마지막 안부 인사를 건넸고, 환희와 준희에게는 아빠마저 상처를 주고 떠나 미안하다는 메시지였죠. 유서를 보니 ‘아, 성민이가 이렇게 해서 갔구나’ 하는 생각만 계속 들어요. 그제야 동생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진짜 우리 곁에 없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더군요. 처음에는 성민이가 충동적으로 그런 선택을 한 것으로 여겼는데 그 유서를 보니까 이미 한참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했었나봐요.
유산 상속자로 누나를 지정했던데 동생은 제 사는 모습을 답답해했어요. 제가 경제적으로 좀 많이 힘들었거든요. 그런 모습을 옆에서 보며 안타까워했죠. 성민이가 하루는 어머니에게 지나가는 말로 ‘내가 남겨 줄 게 얼마 되지 않으니까 환희, 준희는 이거 필요 없겠지, 없어도 살진 않을까?’ 하더래요. 성민이 재산이라야 지금 부모님 사시는 집과 땅이 전부예요. 저에게 그걸 남긴 건 아버지 어머니 잘 부탁한다는 의미인 것 같아요.
평소에 가족들한테 어려움을 호소한 적은 없나요 살면서 굴곡이 많았지만 천성이 밝고 명랑했어요. 자존심이 세고 강한 녀석이었죠. 힘들다는 내색을 전혀 안 했어요. 지난 연말 2박3일 동안 집에서 함께 지내면서 술도 한 잔 했죠. 평소와 다름이 없었어요. 죽기 이틀 전에는 성민이가 굴을 갖고 아버지를 찾아왔대요. 아버지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입맛이 없어서 거의 드시지 못하셨거든요. 성민이는 아버지 드시게 하려고 뭐가 맛있다 뭐가 맛있다 하면서 음식을 사다드리곤 했는데 그날은 굴을 사온 거죠. 아버지가 그날 굴을 맛있게 드셨다고 저에게 전화까지 했어요. 그런데 가버린 겁니다. 이 상황이 믿어지겠어요. 친구들조차도 성민이가 그렇게까지 힘들었는지 몰랐더라고요. 유서 보니까 그간 혼자서만 삭혔던 거죠.
자살 징후는 없었나요 부모님은 성민이 그렇게 떠나고 나서야 근래 성민이가 했던 말들이 예사롭지 않았다며 생각해내세요. 하루는 병원에 와서 아버지를 한참이나 쳐다보더래요. ‘너 왜 그렇게 보느냐’고 물으니 ‘그냥 아버지 보고 싶어서요. 아버지 많이 늙었네’ 하더래요. 아버지는 ‘저놈 왜 저래’ 하고 말았대요. 지금 돌이켜보니 ‘그때 이미 마음을 먹고 있었구나’ 싶더라는 겁니다.
“아버지, 어머니 죄송합니다. 못난 자식이 그동안 가슴에 못을 박아드렸는데 이렇게 또다시 지워질 수 없는 상처를 드리고 떠나가게 된 불효자를 용서하세요. 이젠 정말 사람답게 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아쉬움도 가져갑니다. 이 못난 아들 세상을 더는 살아갈 자신도 용기도 없어 이만 삶을 놓으려고 합니다. 행복한 날들 가슴 뿌듯했던 날들도 많았지만 더 이상은 버티기가 힘이 드네요. 제가 이렇게 가게 된 것에 대한 상처는 지우시고…”
너 좋은 데 가라고 나 이렇게 많이 빌고 있는데… 조성민의 어머니는 새해 첫날 아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샤브샤브집에서 저녁을 먹는데 아들이 고기를 계속 건져 어머니 그릇에 놓는 등 평소 안 하던 짓을 하더란 것. “잘 연락 안 하던 친구들에게도 연말, 신년 메시지를 다 보냈다는 겁니다. 정말 가려고 그랬나 봐요. 마지막 가는 날도 밤늦게 문자메시지를 하다 도중에 연락이 없어 불안했어요. 가보고 싶었지만 아버지 혼자 병실에 두고 갈 수가 없었어요. 그때 갔더라면 이런 일 없었을 텐데…. 제 가슴을 쳐요.” 가족들은 그런 상황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을 가슴 아파했다.
마지막 장소가 여자친구 박씨의 집이었는데 두 사람이 교제하는 걸 알고 있었나요 알고 있었어요. 언론에선 동거녀라는 말도 나왔는데 그건 아니고 그냥 여자친구예요. 사귄 지 몇 달 안 됐고요. 야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 성민이는 그 친구가 편했나 봐요.
박씨도 지금 힘들 것 같은데 빈소에는 안 왔지만 그 친구도 자기 집에서 성민이가 죽어 자책감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고 있어요. 저한테 연락이 왔기에 ‘네 잘못이 아니다, 절대 자책하지 마라’며 위로하고 ‘성민이가 좋은 데 가게 기도 많이 해줘’ 하고 진정시켰죠. 그 친구도 얼마나 놀랐겠어요. 외출했다가 집에 들어와보니 사람이 그 지경이 되어 있었으니.
사업이 잘 안 돼 고민이 많았다던데 일본에서 온 이후 잘 안 풀렸죠. 사업도 계속 실패했고, 선수생활도 쉽지 않았고 두산 구단 코치로 있다가 그 일도 그만뒀으니까요. 성민이가 야구만 했지, 다른 경험이 없잖아요. 그러다보니 사람들에게 이용도 많이 당하고 욕은 욕대로 먹고 다니고…. 최근엔 기대를 걸고 진행했던 야구장 관련 사업이 될 듯 될 듯하면서 잘 안 풀려 고민이 많았나봐요. 많이 초조해하더라고요.
재혼했다가 이혼한 분과도 아직 호적정리가 안 됐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뇨. (호적 정리)다 됐어요. 며칠 전에 휴대폰으로 카카오톡 메시지를 하나 받았는데 도대체 뭔가 싶어 인터넷 검색을 했어요. 그랬더니 별거 상태, 호적 정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정리 다 됐고 성민이가 집에 들어와서 산 지 3년이 넘었어요.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성민이는 좋은 기사든, 나쁜 기사든 자기가 가십거리가 되면 상대에게도 자칫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늘 조심스러워 했어요. 그분도 알게 모르게 피해를 봤을 테니까요.
그분과 가족들은 교류가 있었나요 혼인 신고했다는 것도 가족들은 나중에 알았어요. 아버지가 노발대발하셨죠.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았던 데는 뭔가 사정이 있었겠죠. 성민이가 그 부분에 대해선 말을 안 해 잘 몰라요. 둘은 좋아했겠지만 가족 간의 결합은 아니었죠. 저도 얼굴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고인에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역시 최진실씨의 죽음일까요 그 죽음에 대한 모든 화살을 성민이가 다 맞았잖아요. 그땐 정말…. 심지어 아이들 문제를 넘어 얼토당토않은 재산 이야기까지 나오면서 완전히 나쁜 놈으로 낙인찍혔죠. 동생은 재산이 얼마 있는지도 모르고 돈 욕심도 없는데 자꾸 그쪽으로 몰아버렸죠.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니까요. 자기 마음은 정말 그게 아닌데, 가슴을 열어 속마음을 보여주고 싶었을거예요. 가족들도 대인기피증이 생겼는데 세상 사람들의 온갖 손가락질을 다 받은 본인은 오죽했겠어요.
당시 가족들은 왜 반박할 생각은 안 했나요 최근 우연히 인터넷 댓글을 보게 됐는데 큰 충격을 받았어요. 동생이 비록 좋지 않은 이미지였다고 해도 망자한테 대놓고 잘 죽었다고 하는 댓글을 보며 가슴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어요. ‘성민이는 죽어도 욕을 먹는구나’ 싶어 너무 속상했어요. 예전에도 동생이 비난을 받을 때마다 진실은 그게 아니라고 기자회견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우리가 바보라서 참는 게 아니다. 하늘은 안다. 언젠가 진실은 밝혀진다. 성민이가 받는 오해는 다 벗겨질 거야.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돼’ 하고요. 아버지도 답답하셨겠지만 당신이 나선다고 해서 일이 풀리는 게 아니라 역효과를 낼까봐 굉장히 조심하셨어요.
좋든 싫든 최진실, 조성민, 두 사람은 참으로 질긴 인연입니다 안 좋게 헤어졌지만 두 사람은 정말 좋아했어요. 어쩌면 너무 좋아해서 더 싸웠던 것 같아요. 성민이는 중고등학교 때 자기 방 바닥만 빼고는 온 벽을 최진실 사진으로 도배했을 정도로 좋아했어요. 진실이 장례식장에는 저와 둘이 갔어요. 동생이 서럽게 우는 모습을 보면서 ‘이 녀석이 쉽게 못 잊겠구나’ 싶었죠. 어쩌면 모진 비난에도 묵묵히 견뎌냈던 건 그게 자기가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성민이가 저에게 종종 ‘(최진실이) 좋은데 가야하는데, 좋은 데 가라고 내가 이렇게 많이 빌고 있는데…’ 했어요. 진실이도 띄엄띄엄 쓴 일기를 보니까 성민이에 대한 미련이 많았던 것 같더라고요. 서로 좋아했던 마음은 쉽게 저버리지 못했던 모양이에요.
아빠! 엄마 만나 함께 좋은 곳에 가서 살아요 누나 조씨는 최진실의 죽음 이후 조성민은 두 자녀의 아버지로서 자리를 찾기 위해 무척 노력했다고 말했다. “‘나는 니들이 아는 그런 놈이 아니다’, 난 그런 파렴치한이 아니다. 그렇게 결심하며 열심히 살았죠. 그렇게 살면 사람들의 편견이 바뀔 줄 알았어요. 그런데 한 번 찍힌 낙인은 아무리 노력해도 쉽게 지워지지 않더라고요.” 어머니도 “성민이가 잘돼서 아이들과 얼마나 같이 살고 싶어 했는데…”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들은 조성민이 환희, 준희와 제대로 한번 살아보지도 못한 채 떠난 것을 무엇보다 가슴 아파했다.
1. 엄마, 삼촌에 이어 아버지까지 잃은 환희와 준희. 아이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힘든 일을 거듭 겪어서였을까, 남매는 장례식 내내 의연했다. 그러나 환희는 집에 돌아가 “아버지에게 미안했다”며 엉엉 울었다고 한다. 2,3. 조성민의 유골함 곁에 있는 그의 추억 사진이다. 조성민의 아버지는 사진을 보며 “성민이가 가장 행복했을 때”라고 말했다. 결혼 초 최진실과 단란했던 모습, 갓 태어난 아들 환희를 안고 있는 조성민의 모습이 행복해 보인다. 4. 요미우리 자이언츠 투수 조성민은 1998년 올스타전에서 팔꿈치 부상을 당하기 전까지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일본 야구계의 스타로 발돋움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 시절 아들의 모습은 정말 멋있었다고 회상했다.
두 아이들도 충격이 컸을 텐데요 걱정을 많이 했죠. 그런데 환희 보고 놀랐어요. 굉장히 의젓하더라고요. 엄마와 삼촌 일을 겪어서 그런지 의연하게 받아들여요. 마음이 굉장히 아프면서도 한편으로는 ‘아 고맙게도 저 녀석이 잘 자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지막에 유골함 안장하는데 환희가 그래요. ‘아빠! 좋은 곳에 가서 살아요. 엄마 만나서 함께 좋은 데 가서 살아요’.
아이들이 받았을 상처에 대해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의 죽음은 지우기 힘든 트라우마가 될 텐데 그 점이 저희도 걱정이 돼요. 엄마 잃은 상처가 치유될 만하니까 삼촌이 떠났지, 또 치유될 만하니까 아빠가 떠났으니, 아이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 같아요. 그래도 함께 사는 할머니가 계시니 아이들이 할머니 의지하며 슬픔을 이겨내더라고요. 할머니가 당신 자식들 키울 때보다 더 열성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신다고 해요. 아이들이 구김살 없이 이만큼 큰 것도 할머니가 그렇게 애쓰셨기 때문이라 생각해요. 저희도 아이들에게 필요한 일이 있음 적극 도울 겁니다.
평소 성민씨와 아이들 관계는 어땠나요 성민이가 아빠 자리를 채워줬어야 했는데 아이들에게 모든 걸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죠. 서로 좋아하면서도 약간의 어색함도 있었어요. 같이 보낸 시간이 많지 않았잖아요. 그래서인지 아이들과 놀 때면 늘 저희 집 아이들과 함께 놀았죠. 아무래도 또래 애들이 함께 있으면 더 잘 어울리잖아요.
아버지로서 직접 키우고 싶다는 바람도 있었을 듯한데 아이들과 함께 살고 싶어 했죠. 다만 자기가 잘돼서 아이들을 제대로 양육하고 싶었던 겁니다. 성민이가 어머니에게 ‘아빠로서 당당하게 서고 싶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대요. 성민이는 아이들이 운동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어요. 환희에게는 야구를 시키고 싶어 했죠. 그런데 환희는 야구보다 축구를 더 좋아하더라고요. 할머니 뜻이 운동보다는 공부를 바라셔서 성민이도 그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 같아요. 준희는 신체조건이 좋아서 골프를 가르쳐 봤고요. 그렇지만 둘 다 연예인이 되고 싶어 해요. 엄마를 닮아서인지 끼가 많아요.
“사랑하는 우리 아들, 딸 환희, 준희야 너희에게 더할 나위 없는 상처를 아빠마저 주고 가는 구나. 불쌍한 우리 애기들… 이 모자란 부모를 용서하지 말아라. 법적 분쟁을 (막기)위해 저의 재산은 누나 조성미에게 전부 남깁니다”
삼우제 때 아버지께서 아들에 관한 책을 내겠다고 하셨는데 아들의 명예회복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에 그러셨지만 이내 그냥 가슴속에 담아두고 가시겠다고 마음을 바꾸셨어요.
추모 사업 계획은 있나요 거창하게 추모사업 같은 걸 할 여력은 안 되고요. 아버지께서 성민이와 야구했던 친구들과 함께 작게나마 구상 중인 게 있어요.
어머니 기억에 가장 남는 아들의 모습은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활약 할 때 도쿄돔에서 성민이가 던지는 모습이죠. 지금도 생생해요. 8연속 완투승 기록도 세우며 정말 잘했거든요. 사람들이 조성민 이름을 연호하는 가운데 마운드에서 땀 흘리며 서 있는 모습이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멋진 아들을 이제는 볼 수가 없으니. 기도 많이 하고 더 열심히 살아야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이 말만 하고 싶어요.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고 자기가 알고 있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요.
인터뷰를 마치며 조성민의 어머니는 기자에게 당부했다. “우리 성민이 잘 좀… 그렇게 못된 애 아닌데. 너무 가슴이 아파…
ㅡㅡㅡㅡㅡ 누나에게 상속한다고 한 재산이 어쩌다가 친가로 갔나 싶네요... 전재산이 저 살고있는 집이라는데 조성민 부모는 어디가라고 그걸 저렇게 팔아야 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