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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7 행복을 추구할 권리
최진실씨 그리고 마이클 잭슨의 죽음 이후 수많은 사람들의 애도하는 모습을 보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사랑했는데 왜 그들의 죽음을 막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을 지울수 없었다. 사인은 틀리지만 그들 생전에 그들을 둘러싼 괴소문과 따가운 시선에 시달리고 결국은 자기 파괴적인 행위를 (한사람은 자살, 다른 사람은 처방약 중독) 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또 생전에 극도로 비판적이기도 했던 여론이 죽음과 함께 동정 또는 예찬 쪽으로 치우치고 있다는 것도 비슷하다. 고인들에게 특별히 관심을 갖지도 않았고, 소위 악플을 달지도 않았고, 가십거리로 그들 사생활을 입에 담지도 않았는데 왜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방관자로 별 관심 없이 지나치는 나에게도 그들이 굉장히 힘들어 보였던 것 같다. 과연 방관자에게는 아무 책임이 없는가? 여러해전 샌프란시스코 출신 한국계 미국 코미디언 마가렛 조 (Margaret Cho) 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았었다. 본인이 주연을 맡았던 싯콤이 실패했을때 굉장히 괴로왔다며 방황한 내용을 밝혔었다. 그당시 LA Times 에 한 한국 여학생이 같은 한국인으로서 마가렛 조가 부끄럽다는 기고를 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왠지 방관자로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집에 도착하자 그녀의 웹사잍에 있는 연락처에 같은 한국인으로서 그녀가 자랑스럽다는 이메일을 보냈었다. 십대때도 안 보내본 팬레터를 처음 보내게 된 격이었다. 마가렛 조가 읽은 것 같지 않지만 지금도 충동적으로 보낸 그 이메일을 보내어 왠지 마음이 가볍다. 좋아하는 영화중에 Groundhog Day 라는 코메디가 있다. 한국에서는 ‘사랑의 블랙홀’ 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는데, 이 영화는 계속 되풀이 되는 하루를 그린다. 아침에 일어나면 같은 날이 되풀이 되는데 이를 아는 것은 오로지 자기 중심적이고 성격도 삐딱한 주인공 한사람뿐이다. 되풀이 되는 하루를 끝내려고 절벽에서도 떨어져 보고 별 짓을 다하지만 아침이 되면 영락없이 같은 자명종 음악에 눈을 뜨고 똑같은 사람들을 보고 똑같은 사고들을 보게 된다. 결국 이 주인공은 되풀이 되는 하루를 바꾸는 것을 포기하고 피아노를 배우고 사고를 일으키는 곳에 나타나 피해자들을 도와 주고 죽어가는 걸인에게 온정을 베풀며 매일 되풀이 되는 하루 속에 할수 있는 일들을 늘려가다 보니 진정한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이 받아 들여지자 되풀이 되는 하루가 끝나고 내일이 찾아 온다는 내용이다. 무기력해질때 너무 늦은 것 같을때 이 영화를 떠올리며 오늘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을 한다. 요즘 시원한 뉴스가 그리울 때이다. 오늘 하루 내 전화가 필요한 친구는 없는지 생각해 보자. 다른 사람이 상처 받을 일을 하나 줄이자. 나혼자 너무 힘들고 도움이 필요하다면 팔을 뻗어 보자. 변화가 필요하다면 오늘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시작해 보자. 겸연쩍을 필요도 자존심 상해할 필요도 없다. 나 자신의 또 다른 이들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존중해 주자. Copyright© Judy J. Chang, Esq. All rights reserved. 기사에 대한 의견은 글쓴이에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쥬디 장 변호사, J Global Law Group. E-mail: Contact@JGlobalLaw.com; www.JGlobalLaw.com)
최진실씨 그리고 마이클 잭슨의 죽음 이후 수많은 사람들의 애도하는 모습을 보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사랑했는데 왜 그들의 죽음을 막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을 지울수 없었다. 사인은 틀리지만 그들 생전에 그들을 둘러싼 괴소문과 따가운 시선에 시달리고 결국은 자기 파괴적인 행위를 (한사람은 자살, 다른 사람은 처방약 중독) 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또 생전에 극도로 비판적이기도 했던 여론이 죽음과 함께 동정 또는 예찬 쪽으로 치우치고 있다는 것도 비슷하다. 고인들에게 특별히 관심을 갖지도 않았고, 소위 악플을 달지도 않았고, 가십거리로 그들 사생활을 입에 담지도 않았는데 왜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방관자로 별 관심 없이 지나치는 나에게도 그들이 굉장히 힘들어 보였던 것 같다. 과연 방관자에게는 아무 책임이 없는가? 여러해전 샌프란시스코 출신 한국계 미국 코미디언 마가렛 조 (Margaret Cho) 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았었다. 본인이 주연을 맡았던 싯콤이 실패했을때 굉장히 괴로왔다며 방황한 내용을 밝혔었다. 그당시 LA Times 에 한 한국 여학생이 같은 한국인으로서 마가렛 조가 부끄럽다는 기고를 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왠지 방관자로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집에 도착하자 그녀의 웹사잍에 있는 연락처에 같은 한국인으로서 그녀가 자랑스럽다는 이메일을 보냈었다. 십대때도 안 보내본 팬레터를 처음 보내게 된 격이었다. 마가렛 조가 읽은 것 같지 않지만 지금도 충동적으로 보낸 그 이메일을 보내어 왠지 마음이 가볍다. 좋아하는 영화중에 Groundhog Day 라는 코메디가 있다. 한국에서는 ‘사랑의 블랙홀’ 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는데, 이 영화는 계속 되풀이 되는 하루를 그린다. 아침에 일어나면 같은 날이 되풀이 되는데 이를 아는 것은 오로지 자기 중심적이고 성격도 삐딱한 주인공 한사람뿐이다. 되풀이 되는 하루를 끝내려고 절벽에서도 떨어져 보고 별 짓을 다하지만 아침이 되면 영락없이 같은 자명종 음악에 눈을 뜨고 똑같은 사람들을 보고 똑같은 사고들을 보게 된다. 결국 이 주인공은 되풀이 되는 하루를 바꾸는 것을 포기하고 피아노를 배우고 사고를 일으키는 곳에 나타나 피해자들을 도와 주고 죽어가는 걸인에게 온정을 베풀며 매일 되풀이 되는 하루 속에 할수 있는 일들을 늘려가다 보니 진정한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이 받아 들여지자 되풀이 되는 하루가 끝나고 내일이 찾아 온다는 내용이다. 무기력해질때 너무 늦은 것 같을때 이 영화를 떠올리며 오늘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을 한다. 요즘 시원한 뉴스가 그리울 때이다. 오늘 하루 내 전화가 필요한 친구는 없는지 생각해 보자. 다른 사람이 상처 받을 일을 하나 줄이자. 나혼자 너무 힘들고 도움이 필요하다면 팔을 뻗어 보자. 변화가 필요하다면 오늘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시작해 보자. 겸연쩍을 필요도 자존심 상해할 필요도 없다. 나 자신의 또 다른 이들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존중해 주자. Copyright© Judy J. Chang, Esq. All rights reserved. 기사에 대한 의견은 글쓴이에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쥬디 장 변호사, J Global Law Group. E-mail: Contact@JGlobalLaw.com; www.JGlobalLaw.com)
2009-07-15 국가브랜드
요즘 서울에서 한창 회자되고 있는 말 가운데 관심을 끄는 ‘국가브랜드’ 라는 단어다. 재외 동포에게는 더욱 생소한 단어이지만 그렇게 희소한 말은 아니다. 한국에서 시급히 나온 이 단어는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정부의 풀기 힘든 숙제였다. 한국의 경제 규모는 세계 13위지만 ‘Korea’ 라는 국가 브랜드는 지나치게 저 평가 되어 있다. 세계국가브랜드 조사위에 따르면 국가브랜드를 결정하는데 여러 요소가 작용한다. 크게 나누면 국가경제단위, 문화발전, 노사관계, 외국인 선호, 인종차별, 인권정책, 대외원조, 관광자원 등등으로 나누어 채점한다. 한국의 국가브랜드는 몇 위인가? 실제 들여다 보면 놀랠 만큼 중하위에 머물고 있다. 2008년에는 독일, 프랑스, 영국이 1~3등이고 일본이 5위, 미국이 7위, 인도가 27위, 중국이 28위 인데 비해 한국은 33위에 머물고 있다. 이집트가 31위이니 모슬린국가 수준에도 못 미쳤다. 경제대국 13위가 국가브랜드 33위라는 현실에 놀란 한국정부는 불야 불야 그 대비책 마련에 크게 고심하고 있다. 한국이 가장 적은 점수를 받은 부분이 인종차별과 외국인에 대한 우호관계에서 아주 바닥을 기고 있다. 경제 활동과 제품생산에서는 높은 점수를 받았어도 인종과 인권문제에서 떨어진 점수를 만회하기엔 역부족이다. 사실 경제활동이나 신상품 개발 등은 매우 어려운 과제이며 설비투자에 많은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좋은 점수를 받기가 어렵다. 반면 인종차별이나 인권문제는 국민들의 마음먹기에 따라 후한 점수를 받을 수 있는데 한국의 경우엔 쉬운 길은 놓아두고 어려운 길만 질주한 셈이다. 그러면 왜 국가브랜드가 중요한가? 국가브랜드가 높은 나라의 상품은 제 값을 받는 반면에 그 반대의 나라는 똑 같은 상품 또는 더 좋은 상품을 만들어도 제 값을 못 받고 있다. 한국 현대자동차가 아무리 우수해도 동급의 일본 차 값을 받기가 힘들다. 그 이유는 자동차 메이커의 실력 차이보다 국가브랜드의 차이에서 오는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다. 미국에 사는 동포들도 자동차를 살 경우 스스로 자문해 보면 어렵지 않게 답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미국이나 세계를 상대로 상품을 팔고 있는 대부분의 한국 회사들이 자사의 이름은 악착같이 선전하지만 ‘Made in Korea’라고 광고하지는 않는다. 미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삼성(Samsung) 휴대전화기의 경우 대부분 소비자는 일본제품으로 오인하고 있다. 세계 상품 조사위에 따르는 삼성이 한국회사로 알고 있는 구매자는 10%인데 비해 일본회사로 알고 구매하는 숫자가 55%를 넘는다고 한다. 이런 수치를 보면 왜 삼성이 한국제품이라고 열심히 선전하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결국 모른체하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굴러 가는데 굳이 ‘Korea’ 라는 이름을 알려서 손해 보는 정책을 펼칠 수 없는 것이다. 한국의 대부분 회사들은 추락한 국가브랜드 때문에 약 10% 이상의 손해를 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과 똑같은 상품을 만들어 일본이 139달러에 팔면 한국 상품은 100달러에 팔려 디스카운트 코리아(Discount Korea)를 당한 것이다. 국가브랜드를 올리려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Korea’라는 국가브랜드를 세계 15위 목표 수준으로 올릴 수 있겠는가? 그 해답은 여러 면에서 구해야 하겠지만 확실한 결론은 한국 내 활동만으로는 어렵다는 점이다. 국가브랜드 최전방에 있는 세계 재외동포들과 함께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다. 한국정부가 절실히 국가브랜드를 개선하려면 한국 내 탁상공론 대신 재외동포들과 함께 일을 하지 않으면 반쪽 브랜드 개선에 머물 것이라는 우려다. 한국정부는 동포들 앞에서 항상 해외 7백50만 동포를 큰 자랑스러운 국가자산이라는 말을 빠트리지 않고 한다. 코 앞에선 눈이 가려울 정도로 듣기 좋은 말을 하지만 정작 함께 일을 해야 할 경우에는 이런 저런 이유로 찬밥 먹이기 일 수다. 이번 국가브랜드 문제는 본국 국민과 재외동포가 함께 일할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한국정부가 앞으로 어떤 대책을 내놓을지 아직까지 들어나고 있지 않지만 동포활용 정책이 우선적으로 개발되기 바란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우리끼리’정책에서 과감히 튕겨나와 한민족이 하나되어 ‘Korea’라는 국가브랜드를 선진국 수준까지 올리는 새로운 역사를 써야 한다. 지난 7일 고려대학교 총장을 지낸 어윤대 대통령직속 국가브랜드 위원장이 재외동포 언론인 대회에서 재외동포들과 언론에 협력을 요청한 만큼 동포들이 협조 할 수 있는 새로운 정책을 내놓기 바란다. 정부는 먼 곳에서 해답을 찾지 말고 최전선에서 애국심 넘치는 재외 동포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한국정부가 진솔하게 재외동포들을 안고 간다면 동포들은 자기 주머니를 털어서라도 도우려고 할 것이다. 한국정부와 국민은 국가브랜드가 낮다고 불평하기 전에 보다 소중하게 인간의 가치를 존중하는 시민의식 정책과 세계 속의 한국이라는 글로벌 교육이 선행돼야 한다. (dyk47@yahoo.com)
요즘 서울에서 한창 회자되고 있는 말 가운데 관심을 끄는 ‘국가브랜드’ 라는 단어다. 재외 동포에게는 더욱 생소한 단어이지만 그렇게 희소한 말은 아니다. 한국에서 시급히 나온 이 단어는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정부의 풀기 힘든 숙제였다. 한국의 경제 규모는 세계 13위지만 ‘Korea’ 라는 국가 브랜드는 지나치게 저 평가 되어 있다. 세계국가브랜드 조사위에 따르면 국가브랜드를 결정하는데 여러 요소가 작용한다. 크게 나누면 국가경제단위, 문화발전, 노사관계, 외국인 선호, 인종차별, 인권정책, 대외원조, 관광자원 등등으로 나누어 채점한다. 한국의 국가브랜드는 몇 위인가? 실제 들여다 보면 놀랠 만큼 중하위에 머물고 있다. 2008년에는 독일, 프랑스, 영국이 1~3등이고 일본이 5위, 미국이 7위, 인도가 27위, 중국이 28위 인데 비해 한국은 33위에 머물고 있다. 이집트가 31위이니 모슬린국가 수준에도 못 미쳤다. 경제대국 13위가 국가브랜드 33위라는 현실에 놀란 한국정부는 불야 불야 그 대비책 마련에 크게 고심하고 있다. 한국이 가장 적은 점수를 받은 부분이 인종차별과 외국인에 대한 우호관계에서 아주 바닥을 기고 있다. 경제 활동과 제품생산에서는 높은 점수를 받았어도 인종과 인권문제에서 떨어진 점수를 만회하기엔 역부족이다. 사실 경제활동이나 신상품 개발 등은 매우 어려운 과제이며 설비투자에 많은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좋은 점수를 받기가 어렵다. 반면 인종차별이나 인권문제는 국민들의 마음먹기에 따라 후한 점수를 받을 수 있는데 한국의 경우엔 쉬운 길은 놓아두고 어려운 길만 질주한 셈이다. 그러면 왜 국가브랜드가 중요한가? 국가브랜드가 높은 나라의 상품은 제 값을 받는 반면에 그 반대의 나라는 똑 같은 상품 또는 더 좋은 상품을 만들어도 제 값을 못 받고 있다. 한국 현대자동차가 아무리 우수해도 동급의 일본 차 값을 받기가 힘들다. 그 이유는 자동차 메이커의 실력 차이보다 국가브랜드의 차이에서 오는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다. 미국에 사는 동포들도 자동차를 살 경우 스스로 자문해 보면 어렵지 않게 답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미국이나 세계를 상대로 상품을 팔고 있는 대부분의 한국 회사들이 자사의 이름은 악착같이 선전하지만 ‘Made in Korea’라고 광고하지는 않는다. 미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삼성(Samsung) 휴대전화기의 경우 대부분 소비자는 일본제품으로 오인하고 있다. 세계 상품 조사위에 따르는 삼성이 한국회사로 알고 있는 구매자는 10%인데 비해 일본회사로 알고 구매하는 숫자가 55%를 넘는다고 한다. 이런 수치를 보면 왜 삼성이 한국제품이라고 열심히 선전하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결국 모른체하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굴러 가는데 굳이 ‘Korea’ 라는 이름을 알려서 손해 보는 정책을 펼칠 수 없는 것이다. 한국의 대부분 회사들은 추락한 국가브랜드 때문에 약 10% 이상의 손해를 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과 똑같은 상품을 만들어 일본이 139달러에 팔면 한국 상품은 100달러에 팔려 디스카운트 코리아(Discount Korea)를 당한 것이다. 국가브랜드를 올리려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Korea’라는 국가브랜드를 세계 15위 목표 수준으로 올릴 수 있겠는가? 그 해답은 여러 면에서 구해야 하겠지만 확실한 결론은 한국 내 활동만으로는 어렵다는 점이다. 국가브랜드 최전방에 있는 세계 재외동포들과 함께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다. 한국정부가 절실히 국가브랜드를 개선하려면 한국 내 탁상공론 대신 재외동포들과 함께 일을 하지 않으면 반쪽 브랜드 개선에 머물 것이라는 우려다. 한국정부는 동포들 앞에서 항상 해외 7백50만 동포를 큰 자랑스러운 국가자산이라는 말을 빠트리지 않고 한다. 코 앞에선 눈이 가려울 정도로 듣기 좋은 말을 하지만 정작 함께 일을 해야 할 경우에는 이런 저런 이유로 찬밥 먹이기 일 수다. 이번 국가브랜드 문제는 본국 국민과 재외동포가 함께 일할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한국정부가 앞으로 어떤 대책을 내놓을지 아직까지 들어나고 있지 않지만 동포활용 정책이 우선적으로 개발되기 바란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우리끼리’정책에서 과감히 튕겨나와 한민족이 하나되어 ‘Korea’라는 국가브랜드를 선진국 수준까지 올리는 새로운 역사를 써야 한다. 지난 7일 고려대학교 총장을 지낸 어윤대 대통령직속 국가브랜드 위원장이 재외동포 언론인 대회에서 재외동포들과 언론에 협력을 요청한 만큼 동포들이 협조 할 수 있는 새로운 정책을 내놓기 바란다. 정부는 먼 곳에서 해답을 찾지 말고 최전선에서 애국심 넘치는 재외 동포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한국정부가 진솔하게 재외동포들을 안고 간다면 동포들은 자기 주머니를 털어서라도 도우려고 할 것이다. 한국정부와 국민은 국가브랜드가 낮다고 불평하기 전에 보다 소중하게 인간의 가치를 존중하는 시민의식 정책과 세계 속의 한국이라는 글로벌 교육이 선행돼야 한다. (dyk47@yahoo.com)
2009-06-04 한국 대통령은 `시한부 암환자’
국민의 슬픔과 애도 속에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줌의 흙이 되어 우리를 영원히 떠났다. 어느 누구도 노 전 대통령의 자살을 예상 못한 것처럼, 어느 누구도 그렇게 많은 국민이 분향소를 찾고, 서울광장에서 열린 노제에 참석할지 몰랐을 것이다. 결국 알 수 없는 것이 국민의 마음이고,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내일이다. 그럼 실제로 그렇게 많은 국민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가슴 아파하고, 위로하고 싶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국민도 많았지만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각박한 현실과 남의 탓을 좋아하는 국민의 의식도 크게 작용했다. 가장 쉽게 이해되는 대목이 있었다. 바로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나왔다. 그는 생존 시 국민들이 자기를 욕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회 있을 때마다 “국민이 욕할까 바 무섭다”,“이젠 욕 좀 안 먹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되풀이 했었다. 지난 대선을 앞두고 저녁 소주집에서 가장 잘 팔리는 메뉴가 ‘대통령에 대한 욕’이라는 조사가 나오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의 최고 기여자가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다. 그렇게 바닥 인기 속에 있던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그에 대한 평가는 기적처럼 완전히 180도 뒤집혀 성자(聖者)로 불려지고 있다. 한국 국민은 언제나 망자에 대한 인심이 후했다. 영원한 대통령인가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제 ‘영원한 대통령’ ‘처음이자 마지막 나의 대통령’으로 국민들의 마음속에 남게 되었다. TV에 비쳐진 노 전 대통령의 국민장은 바로 천심이었다. 분향소를 찾아 온 국민들은 진심으로 슬퍼했고, 마지막 그가 떠나는 길을 아쉬워했다. 북한의 김일성이 죽었을 때 북한 주민들이 그렇게 슬프게 통곡하며 우는 것을 보고 전률마저 느겼는데 노 전 대통령의 노제를 본 이북 주민들은 남쪽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TV에 비쳐진 서울광장 노제는 외국인도 깜짝 놀라게 했다. 얼마나 대통령을 존경했으면 저렇게 슬퍼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다. 그렇게 슬퍼했다면 대통령 재직 시 얼마나 열심히 도와 주고 밀어 주었냐는 질문도 나올 수 밖에 없다. 자신 있게 대답은 했지만 진짜 자신은 없었다. 적지 않은 국민들은 자신을 위해서 더 슬퍼했을 것이다. 한국에 사는 국민들 가운데 생활고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으며 자포자기 심정으로 하루 하루를 사는 사람들은 시한폭탄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누가 옆에서 조금만 건드리면 폭발한다. 결국 불경기에 따른 실업자 양산이 멈추고, 배고픔이 줄어지지 않는 한 이명박대통령을 떠난 민심을 되돌리기가 쉽지 않다. 이런 어려운 틈새를 파고 드는 세력이 이젠 상당히 조직화 되어 한국사회 전체를 대결의 장으로 몰아가고 있다. 본질을 외면한 한국사회 동포들의 눈에 비쳐진 한국사회는 미쳐가는 사회처럼 보인다. 노 전 대통령이 자살하게 된 발단은 대통령 가족이 부정부패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검찰의 수사과정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전직 대통령으로 참기 어려운 수모를 겪었을 수도 있고 억울함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검찰은 수사의 결과에 관계없이 불구속 기소 정도를 생각했다. 사건의 본질은 대통령 가족의 부정 부패였는데 한국국민은 본질을 외면한 체 감정에만 몰입하고 있다. 결국 적지 않은 기간 국력 소모와 여야는 책임소재에 온 정력을 낭비하게 될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지도력이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면 본질에 대한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감상적 여론의 향배에 따라 또 다른 혼란을 휩싸이게 될 수 있다. 노 전 대통령 장례식 다음날 한국에 있는 친지와 자연스럽게 노 전 대통령 관련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나 자신이 적지 않게 놀랐다. 데모로 어수선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젠 경찰이 전처럼 약하지 않고 독이 날 만큼 났으니 잘 수습되지 않겠냐”는 대답이다. 한 개인의 무책임한 말이었지만 한국에 있는 당사자들은 사소하게 생각하는데 괜히 동포들만 나라를 걱정하는 것 같은 노파심을 지울 수 없다. 이번 노 전 대통령의 서거와 그 후에 일어나는 과정을 지켜 보면서 한국 국민들이 제 정신인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나 혼자만일까? 미움 받는 대통령이 되었나 이번 장례식을 보면서 슬퍼하는 국민들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것은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미움이다. 최악의 경제 위기 속에 높은 기대를 받고 출발한 대통령은 시운도 없었지만 취임 초부터 국민으로 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정부 구성부터 무엇 하나 국민에게 감동을 준 일은 없고, 그저 비상식적인 결과만 남겼다. 특히 미국산 소고기 수입에 따른 국민의 저항은 촛불시위를 통해 무정부 상태로 정부 기능을 마비 시킬 정도로 최악상태에 빠트렸다. 결국 보수언론의 집요한 노력에 힘입어 겨우 위기탈출은 했지만 그 이후 대통령의 인기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나락으로 떨어졌다. 끊임없는 당내 계파 싸움에 대통령의 지도력은 심한 상처를 받았다. 오바마 대통령이 과거의 정적 힐러리를 국무장관에 임명한 것을 보면 이명박 대통령의 포용력이나 한국정치 풍토를 쉽게 알 수 있다. 대통령의 의식변화가 없는 한 그는 남은 임기 내내 고통 속에서 헤어날 수 없을 것이다. 국민들로 부터 절대적인 미움의 대상이 된 대통령을 보면서 김동길교수의 말처럼 ‘왜 대통령이 되어서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냐”는 불평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의 한 한인정치학자가 한국의 대통령을 비유해 ‘시한부 암환자’라는 표현이 가슴에 와 닿는다. dyk47@yahoo.com / 미주주간현대
국민의 슬픔과 애도 속에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줌의 흙이 되어 우리를 영원히 떠났다. 어느 누구도 노 전 대통령의 자살을 예상 못한 것처럼, 어느 누구도 그렇게 많은 국민이 분향소를 찾고, 서울광장에서 열린 노제에 참석할지 몰랐을 것이다. 결국 알 수 없는 것이 국민의 마음이고,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내일이다. 그럼 실제로 그렇게 많은 국민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가슴 아파하고, 위로하고 싶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국민도 많았지만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각박한 현실과 남의 탓을 좋아하는 국민의 의식도 크게 작용했다. 가장 쉽게 이해되는 대목이 있었다. 바로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나왔다. 그는 생존 시 국민들이 자기를 욕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회 있을 때마다 “국민이 욕할까 바 무섭다”,“이젠 욕 좀 안 먹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되풀이 했었다. 지난 대선을 앞두고 저녁 소주집에서 가장 잘 팔리는 메뉴가 ‘대통령에 대한 욕’이라는 조사가 나오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의 최고 기여자가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다. 그렇게 바닥 인기 속에 있던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그에 대한 평가는 기적처럼 완전히 180도 뒤집혀 성자(聖者)로 불려지고 있다. 한국 국민은 언제나 망자에 대한 인심이 후했다. 영원한 대통령인가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제 ‘영원한 대통령’ ‘처음이자 마지막 나의 대통령’으로 국민들의 마음속에 남게 되었다. TV에 비쳐진 노 전 대통령의 국민장은 바로 천심이었다. 분향소를 찾아 온 국민들은 진심으로 슬퍼했고, 마지막 그가 떠나는 길을 아쉬워했다. 북한의 김일성이 죽었을 때 북한 주민들이 그렇게 슬프게 통곡하며 우는 것을 보고 전률마저 느겼는데 노 전 대통령의 노제를 본 이북 주민들은 남쪽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TV에 비쳐진 서울광장 노제는 외국인도 깜짝 놀라게 했다. 얼마나 대통령을 존경했으면 저렇게 슬퍼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다. 그렇게 슬퍼했다면 대통령 재직 시 얼마나 열심히 도와 주고 밀어 주었냐는 질문도 나올 수 밖에 없다. 자신 있게 대답은 했지만 진짜 자신은 없었다. 적지 않은 국민들은 자신을 위해서 더 슬퍼했을 것이다. 한국에 사는 국민들 가운데 생활고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으며 자포자기 심정으로 하루 하루를 사는 사람들은 시한폭탄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누가 옆에서 조금만 건드리면 폭발한다. 결국 불경기에 따른 실업자 양산이 멈추고, 배고픔이 줄어지지 않는 한 이명박대통령을 떠난 민심을 되돌리기가 쉽지 않다. 이런 어려운 틈새를 파고 드는 세력이 이젠 상당히 조직화 되어 한국사회 전체를 대결의 장으로 몰아가고 있다. 본질을 외면한 한국사회 동포들의 눈에 비쳐진 한국사회는 미쳐가는 사회처럼 보인다. 노 전 대통령이 자살하게 된 발단은 대통령 가족이 부정부패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검찰의 수사과정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전직 대통령으로 참기 어려운 수모를 겪었을 수도 있고 억울함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검찰은 수사의 결과에 관계없이 불구속 기소 정도를 생각했다. 사건의 본질은 대통령 가족의 부정 부패였는데 한국국민은 본질을 외면한 체 감정에만 몰입하고 있다. 결국 적지 않은 기간 국력 소모와 여야는 책임소재에 온 정력을 낭비하게 될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지도력이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면 본질에 대한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감상적 여론의 향배에 따라 또 다른 혼란을 휩싸이게 될 수 있다. 노 전 대통령 장례식 다음날 한국에 있는 친지와 자연스럽게 노 전 대통령 관련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나 자신이 적지 않게 놀랐다. 데모로 어수선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젠 경찰이 전처럼 약하지 않고 독이 날 만큼 났으니 잘 수습되지 않겠냐”는 대답이다. 한 개인의 무책임한 말이었지만 한국에 있는 당사자들은 사소하게 생각하는데 괜히 동포들만 나라를 걱정하는 것 같은 노파심을 지울 수 없다. 이번 노 전 대통령의 서거와 그 후에 일어나는 과정을 지켜 보면서 한국 국민들이 제 정신인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나 혼자만일까? 미움 받는 대통령이 되었나 이번 장례식을 보면서 슬퍼하는 국민들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것은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미움이다. 최악의 경제 위기 속에 높은 기대를 받고 출발한 대통령은 시운도 없었지만 취임 초부터 국민으로 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정부 구성부터 무엇 하나 국민에게 감동을 준 일은 없고, 그저 비상식적인 결과만 남겼다. 특히 미국산 소고기 수입에 따른 국민의 저항은 촛불시위를 통해 무정부 상태로 정부 기능을 마비 시킬 정도로 최악상태에 빠트렸다. 결국 보수언론의 집요한 노력에 힘입어 겨우 위기탈출은 했지만 그 이후 대통령의 인기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나락으로 떨어졌다. 끊임없는 당내 계파 싸움에 대통령의 지도력은 심한 상처를 받았다. 오바마 대통령이 과거의 정적 힐러리를 국무장관에 임명한 것을 보면 이명박 대통령의 포용력이나 한국정치 풍토를 쉽게 알 수 있다. 대통령의 의식변화가 없는 한 그는 남은 임기 내내 고통 속에서 헤어날 수 없을 것이다. 국민들로 부터 절대적인 미움의 대상이 된 대통령을 보면서 김동길교수의 말처럼 ‘왜 대통령이 되어서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냐”는 불평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의 한 한인정치학자가 한국의 대통령을 비유해 ‘시한부 암환자’라는 표현이 가슴에 와 닿는다. dyk47@yahoo.com / 미주주간현대
2009-05-25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명복을 빕니다.
편안히 잠드소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은 한국은 물론 재외동포들에게도 너무 큰 충격을 던졌다. 그가 자살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여러가지 해석이 따르고 있지만 여전히 쉽게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게 될 것이다. 일부에선 정치보복적 검찰의 압박 수사와 언론의 편파 보도를 비난하고 있지만 적지 않은 국민들은 검찰의 탓만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법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원칙에 노 전 대통령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빈농의 가정에서 태어나 대통령에 오르기 까지 지난 63년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어떻게 보면 자수성가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그는 자신의 신분의 한계를 넘어 국가 최고 직에 오른 입지자적인 인물이다. 비록 그의 가족이 부정 부패에 연관돼 자신의 청렴성과 정직성에 치명적인 모욕을 안겨 주었다고 이유가 목숨을 버릴 만한 일이었는지는 오직 대통령 자신만이 알 것이다. 끊이지 않는 조문객 노 전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는 한국에 큰 충격을 주고 한편 극심한 불안을 남겼다. 그가 어떻게 지난 5년 대통령직을 수행했는지 후일 역사가 평가를 내리겠지만 권위주의를 타파하고 국민의 권력을 존중했던 대통령으로 국민들 가슴속에 오래 오래 남을 것이다. 대통령의 시신이 있는 봉하마을은 이어지는 조문객과 지지자들로 서서히 성역화 되어 가고 있으며, 서울과 각지방에 마련된 분향소에도 줄지은 조문객 방문으로 크게 붐비고 있다. 분향소를 방문한 조객들은 국화 한 송이를 영전에 바치기 위해 수 시간씩 기다리고 있으며, 그의 갑작스런 죽음에 눈물로 애도의 뜻을 표시하고 명복을 빌고 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서민들의 지지와 기대를 받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한 단면이기도 하다. 노 전 대통령의 당선은 혈연, 지연, 학연으로 꽁꽁 뭉쳐 있는 한국의 정치풍토에 신선한 충격이었으며, 도전이기도 했다. 지난 50여 년 동안 형성된 소위 한국의 기득권층에게 노 전 대통령의 등장은 자신들의 이익에 대한 침해자로 받아 들여졌고, 전통보수세력은 조중동 보수언론을 전면에 앞세워 지난 5년 동안 끊임없이 노 전 대통령과 대결을 벌렸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기득권 지지세력과의 대결로 전선이 확대되면서 그의 재임기간 탄핵까지 치르며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한국의 서민들은 그가 기득권층과의 싸움에서 이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가 아니 였다면 어느 누구도 그들의 이익을 또다시 대변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서민들이 오늘도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분향소로 향하는 것이다. 정치적 혼란은 피해야 이명박 대통령이 보내 조화가 봉화마을 입구에서 노사모와 마을 사람들에 의하여 찌어지고 불에 태워진 것으로 보도되고, 이회장 선진당 대표와 김형오 국회의장은 조문도 못하고 계란세례와 물벼락을 맞고 돌아간 것으로 보도 되면서 노 전 대통령 서거 후유증에 대한 불안이 커지고 있다. 일부 조문객들은 분향을 마친 후 추모대열을 형성해 정권퇴진, 독재타도를 외치며 거리데모를 벌이고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안개정국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시한폭탄 같은 정국의 파탄을 원치 않는 국민들은 일부 반 정부 주도자들이 시도하고 있는 정국혼란에 크게 우려하고 있으며, 경제계에서도 이제 겨우 불경기에서 벗어 나려는 순간 정국불안으로 경제가 그냥 주저 않을 것을 크게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장례절차가 가족장이 아닌 국민장으로 결정되고 고인의 유서에 나타난 것처럼 이번 기회가 대결이 아닌 화합과 화해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여론도 크게 늘고 있다. 뉴욕타임스도 버럭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에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장 절차가 정해지면 고위급 인사를 조문사절로 파견하는 방안도 고려 중이라고 보도하면서 노 전 대통령 서거가 한국사회에 미칠 파문에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신속하게 대응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성적이기 보다 감정적인 한국 국민의 국민성에 비추어 노 전 대통령의 서거는 이명박대통령에게 또 다른 정치적 시험대가 되고 있다. 이미 노 전 대통령의 노사모와 지지자들은 시신이 안치된 봉하마을을 반 정부 투쟁 진원지로 승화 시키려 하고 있으며 각 대도시에 마련된 분향소에선 조문객들이 거리데모를 시작해 사태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지난 미국산 수입 소고기 반대 촛불 시위 이후 노 전 대통령 서거가 가장 큰 데모 이슈로 등장하고 잇다. 이젠 편안히 잠드소서! 한국정부는 재외 공관에 분향소를 설치한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함에 따라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도 분향소를 설치하고 조문객을 맞이하게 된다. 지난 토요일 본지에 분향장소를 묻는 독자의 전화도 있었다. 보수적인 재외동포들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적지 않았지만 급작스런 죽음에 도 이상 나쁜 감정보다 큰 충격과 함께 애통하게 생각하고 있다. 정치적 갈등과 무조건 북한 퍼주기 등에 식상한 재미동포들에게 반미적 대통령의 언행에 크게 반발했지만 이젠 모든 것을 화해하고 애도하는 모습이다. 노 전 대통령이 정권을 놓은지 1년여 만에 부정부패와 연관해 비극적인 자살로 생을 마감해 “국가에 무책임 했다”고 말하는 동포들도 있지만 “국가적으로 불행한 일”이라는 측면에 대부분 동감하고 고인의 명복을 빌고 있다. 생전에 아웅다옹하지만 인생도 결국은 공수래공수거라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케 했다. 대통령이여! 이젠 모든 것을 잊으시고 편안히 잠드소서!
편안히 잠드소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은 한국은 물론 재외동포들에게도 너무 큰 충격을 던졌다. 그가 자살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여러가지 해석이 따르고 있지만 여전히 쉽게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게 될 것이다. 일부에선 정치보복적 검찰의 압박 수사와 언론의 편파 보도를 비난하고 있지만 적지 않은 국민들은 검찰의 탓만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법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원칙에 노 전 대통령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빈농의 가정에서 태어나 대통령에 오르기 까지 지난 63년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어떻게 보면 자수성가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그는 자신의 신분의 한계를 넘어 국가 최고 직에 오른 입지자적인 인물이다. 비록 그의 가족이 부정 부패에 연관돼 자신의 청렴성과 정직성에 치명적인 모욕을 안겨 주었다고 이유가 목숨을 버릴 만한 일이었는지는 오직 대통령 자신만이 알 것이다. 끊이지 않는 조문객 노 전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는 한국에 큰 충격을 주고 한편 극심한 불안을 남겼다. 그가 어떻게 지난 5년 대통령직을 수행했는지 후일 역사가 평가를 내리겠지만 권위주의를 타파하고 국민의 권력을 존중했던 대통령으로 국민들 가슴속에 오래 오래 남을 것이다. 대통령의 시신이 있는 봉하마을은 이어지는 조문객과 지지자들로 서서히 성역화 되어 가고 있으며, 서울과 각지방에 마련된 분향소에도 줄지은 조문객 방문으로 크게 붐비고 있다. 분향소를 방문한 조객들은 국화 한 송이를 영전에 바치기 위해 수 시간씩 기다리고 있으며, 그의 갑작스런 죽음에 눈물로 애도의 뜻을 표시하고 명복을 빌고 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서민들의 지지와 기대를 받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한 단면이기도 하다. 노 전 대통령의 당선은 혈연, 지연, 학연으로 꽁꽁 뭉쳐 있는 한국의 정치풍토에 신선한 충격이었으며, 도전이기도 했다. 지난 50여 년 동안 형성된 소위 한국의 기득권층에게 노 전 대통령의 등장은 자신들의 이익에 대한 침해자로 받아 들여졌고, 전통보수세력은 조중동 보수언론을 전면에 앞세워 지난 5년 동안 끊임없이 노 전 대통령과 대결을 벌렸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기득권 지지세력과의 대결로 전선이 확대되면서 그의 재임기간 탄핵까지 치르며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한국의 서민들은 그가 기득권층과의 싸움에서 이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가 아니 였다면 어느 누구도 그들의 이익을 또다시 대변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서민들이 오늘도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분향소로 향하는 것이다. 정치적 혼란은 피해야 이명박 대통령이 보내 조화가 봉화마을 입구에서 노사모와 마을 사람들에 의하여 찌어지고 불에 태워진 것으로 보도되고, 이회장 선진당 대표와 김형오 국회의장은 조문도 못하고 계란세례와 물벼락을 맞고 돌아간 것으로 보도 되면서 노 전 대통령 서거 후유증에 대한 불안이 커지고 있다. 일부 조문객들은 분향을 마친 후 추모대열을 형성해 정권퇴진, 독재타도를 외치며 거리데모를 벌이고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안개정국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시한폭탄 같은 정국의 파탄을 원치 않는 국민들은 일부 반 정부 주도자들이 시도하고 있는 정국혼란에 크게 우려하고 있으며, 경제계에서도 이제 겨우 불경기에서 벗어 나려는 순간 정국불안으로 경제가 그냥 주저 않을 것을 크게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장례절차가 가족장이 아닌 국민장으로 결정되고 고인의 유서에 나타난 것처럼 이번 기회가 대결이 아닌 화합과 화해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여론도 크게 늘고 있다. 뉴욕타임스도 버럭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에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장 절차가 정해지면 고위급 인사를 조문사절로 파견하는 방안도 고려 중이라고 보도하면서 노 전 대통령 서거가 한국사회에 미칠 파문에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신속하게 대응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성적이기 보다 감정적인 한국 국민의 국민성에 비추어 노 전 대통령의 서거는 이명박대통령에게 또 다른 정치적 시험대가 되고 있다. 이미 노 전 대통령의 노사모와 지지자들은 시신이 안치된 봉하마을을 반 정부 투쟁 진원지로 승화 시키려 하고 있으며 각 대도시에 마련된 분향소에선 조문객들이 거리데모를 시작해 사태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지난 미국산 수입 소고기 반대 촛불 시위 이후 노 전 대통령 서거가 가장 큰 데모 이슈로 등장하고 잇다. 이젠 편안히 잠드소서! 한국정부는 재외 공관에 분향소를 설치한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함에 따라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도 분향소를 설치하고 조문객을 맞이하게 된다. 지난 토요일 본지에 분향장소를 묻는 독자의 전화도 있었다. 보수적인 재외동포들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적지 않았지만 급작스런 죽음에 도 이상 나쁜 감정보다 큰 충격과 함께 애통하게 생각하고 있다. 정치적 갈등과 무조건 북한 퍼주기 등에 식상한 재미동포들에게 반미적 대통령의 언행에 크게 반발했지만 이젠 모든 것을 화해하고 애도하는 모습이다. 노 전 대통령이 정권을 놓은지 1년여 만에 부정부패와 연관해 비극적인 자살로 생을 마감해 “국가에 무책임 했다”고 말하는 동포들도 있지만 “국가적으로 불행한 일”이라는 측면에 대부분 동감하고 고인의 명복을 빌고 있다. 생전에 아웅다옹하지만 인생도 결국은 공수래공수거라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케 했다. 대통령이여! 이젠 모든 것을 잊으시고 편안히 잠드소서!
2009-05-01 오바마의 100일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한지 꼭 100일이 지났다. 워싱톤 백악관에선 전임 대통령 부시와 비교해 상당히 높은 수치의 지지율이 나와 상당히 고무돼 있으며 앞으로 정책 추진에도 많은 힘이 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허니문 기간인 100일이 지나도 지지해준 국민들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고공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CBS와 뉴욕타임스가 지난 22일과 23일 사이 미국전역의 유권자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70%에서 조금 모자라는 68% 지지율을 기록해 놀라게 했다. 특히 흑인들 사이에선 거의 96%의 지지를 받아 100%에 육박했다. 백인 지지율 34%에 비교하면 그 동안 흑인 등 소수민족의 불만이 얼마나 컸는지 표현한 수치로 흑백문제와 인종 차별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에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또한 흑, 백에 관계없이 미국 국민들 사이에선 오바마에 대한 호감이 지속적으로 높게 나타나고 있다. 2개의 전쟁과 불경기를 이겨야 오바마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경제 문제다. 세계 불경기를 촉발한 나라가 미국인데 비해 그 피해는 다른 나라가 받고 있다는 원망을 받고 있지만 미국 경기 침체는 매우 심각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 통계상 실업률이 이미 8.5%를 넘어섰고, 실질 실업률은 15%에 접근하고 있다는 전문가들의 견해도 나오고 있다. 오바마가 경기진작을 위하여 787 Billion 달러를 긴급 투입하고 있지만 경기가 살아나기는 커녕 더욱 침체되고 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그런 막대한 돈의 투입이 결국 허공에 삽질하는 것이라는 극단론까지 나오고 있어 금년 내에 경기부양책이 성공하지 못할 경우 오바마의 인기는 크게 떨어지고 사회 불안도 점차 늘어날 전망이다. 그리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두 곳에서 벌리고 있는 전쟁도 미국의 계획처럼 만만하게 진행되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론도 수구려 들지 않고 있다. 부시로 부터 물려 받은 여러 숙제를 놓고 어떻게 풀어 나갈지 국민들은 기대 반 우려 반 속에 백악관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여러가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오바마에게 희망을 갖고 인내 하는 이유는 그가 보여주고 있는 올바른 방향과 진실성을 우선 꼽을 수 있다. 오바마는 비록 어려운 경제 여건 속에 있어도 미래 투자를 위하여 자녀 교육과 과학에 국가예산 우선순위를 먼저 놓아야 한다는 주장을 변함없이 주장하고 있다. 경제는 항상 주기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몸부림 쳐도 어쩔 수 없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미국은 고립에서 벗어 나야 미국이 세계 경찰의 역할을 이제는 할 수 없다. 미국의 이익에 반대하는 다른 나라에 무조건 함대와 탱크를 앞세울 수 없다는 이야기다. 지난 1960년 큐바 미사일 위기 이후 미국의 정책은 적성국에 물리적인 고립과 경제활동 동결로 상대국을 압박해 왔다. 그 대표적인 피해자가 바로 큐바다. 미국에 인접한 섬나라지만 이념과 정책이 다르다는 이유와 미국을 한 때 위협했다는 괘심 죄가 합해져 미국 압박정책의 샘플이 되었던 것이다. ‘노인과 바다’의 작가 헤밍웨이가 그토록 사랑했던 큐바의 해안과 시가(cigar)가 다시 미국민의 관심을 받게 될지 기대 되고 있다. 오바마는 이미 이슬람과의 화해 제스처를 보낸데 이어 큐바와의 관계 개선 의지를 표명함에 따라 미국의 대외 이미지가 좋아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반면에 미국 보수 강경파들로 부터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 가고 있다는 악평을 받을 수도 있다. 미국의 경제를 주도하고 여론몰이 계략에 익숙한 보수파와 적대 관계를 만들지 않기 위해선 또 다른 정책이 요구되고 있다. 정책이란 항상 동전의 양면처럼 양면성을 갖게 되기 대문에 여론정치만도 할 수 없다. 오바마가 지난 100일 동안 내놓은 정책 가운데 또 하나 빠트릴 수 없는 것은 스템 셀 연구지원 중단을 해제한 것이다. 비록 찬반 논란의 중심에 있는 정책이지만 스템 셀 연구가 부활 됨으로써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투자가 활발해져 경기부양에 한 몫을 할 것으로 기대 되고 있다. 흑인 대통령의 탄생으로 소수민족에게 큰 자부심을 안긴 오바마 대통령의 성공을 기원하는 것은 한인들만의 마음은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한국의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뇌물죄 관련 검찰 소환을 보면서 이번이 부정부패에 연관돼 검찰 문을 두드리는 마지막 대통령이길 바란다. 일부에선 정치보복이라는 불평도 있지만 깨끗한 대통령으로 알려졌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1억 원짜리 시계 두 개를 생일선물로 받았다는 사실에 지지했던 국민까지 등을 돌렸다는 이야기도 흘러 나오고 있다. 하여튼 전두환이나 노태우 전 대통령과는 다른 레벨로 분류되었던 노 전 대통령의 추락은 모두에게 분노와 안타까움을 남겼다. 한국이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된 것처럼 프랑스대통령도 유사한 권력체제를 갖고 있어 항상 비교가 되었는데 프랑스에서도 역대 대통령에 대한 부정 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지만 결코 대통령이 퇴임 후 검찰에 불려나간 일은 없다는 전통이 지켜지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한지 꼭 100일이 지났다. 워싱톤 백악관에선 전임 대통령 부시와 비교해 상당히 높은 수치의 지지율이 나와 상당히 고무돼 있으며 앞으로 정책 추진에도 많은 힘이 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허니문 기간인 100일이 지나도 지지해준 국민들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고공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CBS와 뉴욕타임스가 지난 22일과 23일 사이 미국전역의 유권자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70%에서 조금 모자라는 68% 지지율을 기록해 놀라게 했다. 특히 흑인들 사이에선 거의 96%의 지지를 받아 100%에 육박했다. 백인 지지율 34%에 비교하면 그 동안 흑인 등 소수민족의 불만이 얼마나 컸는지 표현한 수치로 흑백문제와 인종 차별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에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또한 흑, 백에 관계없이 미국 국민들 사이에선 오바마에 대한 호감이 지속적으로 높게 나타나고 있다. 2개의 전쟁과 불경기를 이겨야 오바마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경제 문제다. 세계 불경기를 촉발한 나라가 미국인데 비해 그 피해는 다른 나라가 받고 있다는 원망을 받고 있지만 미국 경기 침체는 매우 심각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 통계상 실업률이 이미 8.5%를 넘어섰고, 실질 실업률은 15%에 접근하고 있다는 전문가들의 견해도 나오고 있다. 오바마가 경기진작을 위하여 787 Billion 달러를 긴급 투입하고 있지만 경기가 살아나기는 커녕 더욱 침체되고 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그런 막대한 돈의 투입이 결국 허공에 삽질하는 것이라는 극단론까지 나오고 있어 금년 내에 경기부양책이 성공하지 못할 경우 오바마의 인기는 크게 떨어지고 사회 불안도 점차 늘어날 전망이다. 그리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두 곳에서 벌리고 있는 전쟁도 미국의 계획처럼 만만하게 진행되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론도 수구려 들지 않고 있다. 부시로 부터 물려 받은 여러 숙제를 놓고 어떻게 풀어 나갈지 국민들은 기대 반 우려 반 속에 백악관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여러가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오바마에게 희망을 갖고 인내 하는 이유는 그가 보여주고 있는 올바른 방향과 진실성을 우선 꼽을 수 있다. 오바마는 비록 어려운 경제 여건 속에 있어도 미래 투자를 위하여 자녀 교육과 과학에 국가예산 우선순위를 먼저 놓아야 한다는 주장을 변함없이 주장하고 있다. 경제는 항상 주기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몸부림 쳐도 어쩔 수 없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미국은 고립에서 벗어 나야 미국이 세계 경찰의 역할을 이제는 할 수 없다. 미국의 이익에 반대하는 다른 나라에 무조건 함대와 탱크를 앞세울 수 없다는 이야기다. 지난 1960년 큐바 미사일 위기 이후 미국의 정책은 적성국에 물리적인 고립과 경제활동 동결로 상대국을 압박해 왔다. 그 대표적인 피해자가 바로 큐바다. 미국에 인접한 섬나라지만 이념과 정책이 다르다는 이유와 미국을 한 때 위협했다는 괘심 죄가 합해져 미국 압박정책의 샘플이 되었던 것이다. ‘노인과 바다’의 작가 헤밍웨이가 그토록 사랑했던 큐바의 해안과 시가(cigar)가 다시 미국민의 관심을 받게 될지 기대 되고 있다. 오바마는 이미 이슬람과의 화해 제스처를 보낸데 이어 큐바와의 관계 개선 의지를 표명함에 따라 미국의 대외 이미지가 좋아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반면에 미국 보수 강경파들로 부터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 가고 있다는 악평을 받을 수도 있다. 미국의 경제를 주도하고 여론몰이 계략에 익숙한 보수파와 적대 관계를 만들지 않기 위해선 또 다른 정책이 요구되고 있다. 정책이란 항상 동전의 양면처럼 양면성을 갖게 되기 대문에 여론정치만도 할 수 없다. 오바마가 지난 100일 동안 내놓은 정책 가운데 또 하나 빠트릴 수 없는 것은 스템 셀 연구지원 중단을 해제한 것이다. 비록 찬반 논란의 중심에 있는 정책이지만 스템 셀 연구가 부활 됨으로써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투자가 활발해져 경기부양에 한 몫을 할 것으로 기대 되고 있다. 흑인 대통령의 탄생으로 소수민족에게 큰 자부심을 안긴 오바마 대통령의 성공을 기원하는 것은 한인들만의 마음은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한국의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뇌물죄 관련 검찰 소환을 보면서 이번이 부정부패에 연관돼 검찰 문을 두드리는 마지막 대통령이길 바란다. 일부에선 정치보복이라는 불평도 있지만 깨끗한 대통령으로 알려졌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1억 원짜리 시계 두 개를 생일선물로 받았다는 사실에 지지했던 국민까지 등을 돌렸다는 이야기도 흘러 나오고 있다. 하여튼 전두환이나 노태우 전 대통령과는 다른 레벨로 분류되었던 노 전 대통령의 추락은 모두에게 분노와 안타까움을 남겼다. 한국이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된 것처럼 프랑스대통령도 유사한 권력체제를 갖고 있어 항상 비교가 되었는데 프랑스에서도 역대 대통령에 대한 부정 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지만 결코 대통령이 퇴임 후 검찰에 불려나간 일은 없다는 전통이 지켜지고 있다.
2009-04-20 김연아 광풍
김연아가 지난달 로스엔젤레스에서 피겨스케이팅 월드선수권대회에서 200점 이상을 획득하면서 우승했다. 그녀의 승리 소식이 한국 국민에게는 더 없이 즐거운 뉴스였다. 그 이유는 세계전체가 불경기 속에 빠지면서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부에선 10년여 전 IMF(금융환난) 시절보다 더 심각한 경기침체와 실업자 양산으로 한국전체가 스트레스속에서 희망 소식에 갈증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김연아 승리는 라이벌 일본 선수 아사다 마오가 넘어지는 순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연장 결승전 패배를 설욕했기 때문에 더욱 가치가 있었다. 그녀가 승전고를 안고 돌아간 날 한국 국민은 물론 해외에 살고 있는 재외동포들도 한결 같은 마음으로 승리를 축하하고 그 기쁨을 나누었다. 박세리만큼 큰 승리 여자골프에서 첫 승리를 안겨준 박세리와 비교할 만큼 김연아의 승리는 값어치가 있다. 박세리가 IMF시절 고통 속에 있는 국민들의 시름을 덜어 주고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던 것처럼 김연아도 그런 시기적인 ‘해냈다’는 유사성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시기나 상황의 유사성은 틀리지만 ‘희망의 바이러스’를 만든 것 만큼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녀의 귀국은 그야말로 금의환향이라고 표현해도 부족하지 않다. 피겨스케이팅은 과거 백인들에 의하여 독점되고 소수민족에게는 접근할 수 없는 운동에 속했었기 때문이다. 그런 어려운 부문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실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귀국 후 그녀의 성공 과정이 언론에 상세히 보도되면서 국민의 요정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너도 나도 김연아 화제로 한국 전체가 들떠지면서 일부 국민들 사이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첫 우승을 했고 앞으로 갈 길도 먼데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트리는 것이 아니냐는 소리가 나온 것이다. 체조와 피겨스케이팅 선수들의 연령이 계속 적어지는 추세 속에 올해 김연아의 나이가 19세로 적은 연령층에 속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일부에선 어린 선수를 너무 일찍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지도층은 자신의 얼굴내밀기 행사에 끌어내 뉴스꺼리로 부각 시키는 것이 아니냐는 걱정도 나왔다. 연일 한국 언론은 김연아가 입고 다니는 재켓의 메이커가 어디고, 가격은 얼마라는 식으로 보도를 하면서 시시콜콜히 보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얄팍한 마켓팅’ 그녀가 입학한 고려대학교에선 총장이 김연아를 안내하는 사진이 언론에 보도 되어 그녀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하게 했다. 특히 자유, 정의, 진리를 상징하는 고대가 신입생 김연아 얼굴을 넣고 만든 신문 광고에 ‘민족의 인재를 키워온 고려대학교, 세계의 리더를 낳았습니다!’라는 낯뜨거운 광고 문구가 웃음거리로 등장하기도 했다. 날아 가는 김연아 신드럼에 찰삭 붙어 가려는 고려대학교의 얄팍한 마켓팅이 들통 난 셈이다. 이젠 김연아의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언론과 국민의 시선이 좀 멀어지기를 기원하고 있다. 그 이유는 김연아가 대학생활에 적응하고 다음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연습할시간도 엄청 필요한데 이렇게 광적으로 접근하는 상혼과 언론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다. 김연아가 보통인으로 돌아가야 챔피언을 보다 오래 동안 유지할 수 있지 않겠냐는 논리다. 김연아의 엄마가 스케이팅 훈련을 시킨 사교육의 원조라면서 사교육의 정당성을 내세우는 아줌마들까지 등장하면서 한국 내 능력 있는 자와 없는 자의 분열은 더욱 깊어가고 있다. 부모 누구나 자녀에게 교육을 더 시키고 싶어하지만 형편 못된 가정에선 어쩔 수 없는데 한국 내에선 사교육의 정당성을 이런 식으로 부추기면서 결국 할 수 없는 계층은 더욱 소외감을 느끼게 되고 국민화합에도 마이너스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에서 연일 벌어지고 있는 김연아의 광풍을 보면서 미국 국민들의 의식 수준과 재삼 비교가 된다. 금메달을 8개나 따온 펠프스선수며, 당시 버클리대학의 컷플린이라는 수영선수도 몇 개의 금메달을 따냈다. 미국 언론은 그들의 국위 선양을 당시에 보도 되었을 뿐 그 이후 별다른 보도는 없었다. 언론과 국민은 그들이 4년 후도 올림픽에 출전해 이번 같은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 때문에 필요이상 행사나 언론에 노출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한국 언론과 국민처럼 이렇게 비 상식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은 선수 수명을 그 만큼 걱정하기 때문이다. 물론 선수들 자신도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는 만큼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 지금은 김연아에게 반해 있지만 연습부족으로 다음 경기에서 질 경우 얼마나 뒤에서 질타할지 걱정이 앞선다. 관심을 줄이자 김연아에게 보다 좋은 성적을 기대하고 그녀가 오래 동안 대한민국의 국위를 선양하기 원하면 이제 부터라도 그녀로 부터 손을 띠는 것이 시급하다. 김연아가 유명세에서 깨어나 스스로 선수의 길을 가도록 멀리서 보는 자세가 요구된다. 그녀가 국민 요정에서 한단계 업그레인 된 국민의 영웅으로 남기를 원하면 가슴속에 담고 좀 더 건강한 선수생활을 하도록 마음속으로 돕자. 김연아 신드롬으로 이미 피곤해진 일부 네티즌 사이에선 안티 김연아 카페를 만들었으며, 그녀가 이쁘지 않다는 질시의 댓글도 심심치 않게 뜨기 시작했다고 한다. 자녀를 기르는 부모들에게 김연아는 상당히 스트레스를 준다고 한다. 그 또래의 아이들은 모두 실패자로 비쳐지고 김연아만 성공자로 만드는 한국 언론은 문제가 있는 집단임에 틀림없다. 한국 국민처럼 영웅을 빨리 만들고, 빨리 버리는 국민들이 이 지구촌에 또 있을까? 미국에 사는 동포부터 이젠 김연아에게 관심을 줄이자. 그것이 애국하는 길이고 그녀가 더 성장하도록 도와 주는 길이 아닐까? 아마도 그것이 진정한 사랑일지도… 미주주간현대 (dyk47@ayhoo.com)
김연아가 지난달 로스엔젤레스에서 피겨스케이팅 월드선수권대회에서 200점 이상을 획득하면서 우승했다. 그녀의 승리 소식이 한국 국민에게는 더 없이 즐거운 뉴스였다. 그 이유는 세계전체가 불경기 속에 빠지면서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부에선 10년여 전 IMF(금융환난) 시절보다 더 심각한 경기침체와 실업자 양산으로 한국전체가 스트레스속에서 희망 소식에 갈증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김연아 승리는 라이벌 일본 선수 아사다 마오가 넘어지는 순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연장 결승전 패배를 설욕했기 때문에 더욱 가치가 있었다. 그녀가 승전고를 안고 돌아간 날 한국 국민은 물론 해외에 살고 있는 재외동포들도 한결 같은 마음으로 승리를 축하하고 그 기쁨을 나누었다. 박세리만큼 큰 승리 여자골프에서 첫 승리를 안겨준 박세리와 비교할 만큼 김연아의 승리는 값어치가 있다. 박세리가 IMF시절 고통 속에 있는 국민들의 시름을 덜어 주고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던 것처럼 김연아도 그런 시기적인 ‘해냈다’는 유사성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시기나 상황의 유사성은 틀리지만 ‘희망의 바이러스’를 만든 것 만큼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녀의 귀국은 그야말로 금의환향이라고 표현해도 부족하지 않다. 피겨스케이팅은 과거 백인들에 의하여 독점되고 소수민족에게는 접근할 수 없는 운동에 속했었기 때문이다. 그런 어려운 부문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실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귀국 후 그녀의 성공 과정이 언론에 상세히 보도되면서 국민의 요정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너도 나도 김연아 화제로 한국 전체가 들떠지면서 일부 국민들 사이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첫 우승을 했고 앞으로 갈 길도 먼데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트리는 것이 아니냐는 소리가 나온 것이다. 체조와 피겨스케이팅 선수들의 연령이 계속 적어지는 추세 속에 올해 김연아의 나이가 19세로 적은 연령층에 속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일부에선 어린 선수를 너무 일찍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지도층은 자신의 얼굴내밀기 행사에 끌어내 뉴스꺼리로 부각 시키는 것이 아니냐는 걱정도 나왔다. 연일 한국 언론은 김연아가 입고 다니는 재켓의 메이커가 어디고, 가격은 얼마라는 식으로 보도를 하면서 시시콜콜히 보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얄팍한 마켓팅’ 그녀가 입학한 고려대학교에선 총장이 김연아를 안내하는 사진이 언론에 보도 되어 그녀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하게 했다. 특히 자유, 정의, 진리를 상징하는 고대가 신입생 김연아 얼굴을 넣고 만든 신문 광고에 ‘민족의 인재를 키워온 고려대학교, 세계의 리더를 낳았습니다!’라는 낯뜨거운 광고 문구가 웃음거리로 등장하기도 했다. 날아 가는 김연아 신드럼에 찰삭 붙어 가려는 고려대학교의 얄팍한 마켓팅이 들통 난 셈이다. 이젠 김연아의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언론과 국민의 시선이 좀 멀어지기를 기원하고 있다. 그 이유는 김연아가 대학생활에 적응하고 다음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연습할시간도 엄청 필요한데 이렇게 광적으로 접근하는 상혼과 언론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다. 김연아가 보통인으로 돌아가야 챔피언을 보다 오래 동안 유지할 수 있지 않겠냐는 논리다. 김연아의 엄마가 스케이팅 훈련을 시킨 사교육의 원조라면서 사교육의 정당성을 내세우는 아줌마들까지 등장하면서 한국 내 능력 있는 자와 없는 자의 분열은 더욱 깊어가고 있다. 부모 누구나 자녀에게 교육을 더 시키고 싶어하지만 형편 못된 가정에선 어쩔 수 없는데 한국 내에선 사교육의 정당성을 이런 식으로 부추기면서 결국 할 수 없는 계층은 더욱 소외감을 느끼게 되고 국민화합에도 마이너스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에서 연일 벌어지고 있는 김연아의 광풍을 보면서 미국 국민들의 의식 수준과 재삼 비교가 된다. 금메달을 8개나 따온 펠프스선수며, 당시 버클리대학의 컷플린이라는 수영선수도 몇 개의 금메달을 따냈다. 미국 언론은 그들의 국위 선양을 당시에 보도 되었을 뿐 그 이후 별다른 보도는 없었다. 언론과 국민은 그들이 4년 후도 올림픽에 출전해 이번 같은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 때문에 필요이상 행사나 언론에 노출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한국 언론과 국민처럼 이렇게 비 상식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은 선수 수명을 그 만큼 걱정하기 때문이다. 물론 선수들 자신도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는 만큼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 지금은 김연아에게 반해 있지만 연습부족으로 다음 경기에서 질 경우 얼마나 뒤에서 질타할지 걱정이 앞선다. 관심을 줄이자 김연아에게 보다 좋은 성적을 기대하고 그녀가 오래 동안 대한민국의 국위를 선양하기 원하면 이제 부터라도 그녀로 부터 손을 띠는 것이 시급하다. 김연아가 유명세에서 깨어나 스스로 선수의 길을 가도록 멀리서 보는 자세가 요구된다. 그녀가 국민 요정에서 한단계 업그레인 된 국민의 영웅으로 남기를 원하면 가슴속에 담고 좀 더 건강한 선수생활을 하도록 마음속으로 돕자. 김연아 신드롬으로 이미 피곤해진 일부 네티즌 사이에선 안티 김연아 카페를 만들었으며, 그녀가 이쁘지 않다는 질시의 댓글도 심심치 않게 뜨기 시작했다고 한다. 자녀를 기르는 부모들에게 김연아는 상당히 스트레스를 준다고 한다. 그 또래의 아이들은 모두 실패자로 비쳐지고 김연아만 성공자로 만드는 한국 언론은 문제가 있는 집단임에 틀림없다. 한국 국민처럼 영웅을 빨리 만들고, 빨리 버리는 국민들이 이 지구촌에 또 있을까? 미국에 사는 동포부터 이젠 김연아에게 관심을 줄이자. 그것이 애국하는 길이고 그녀가 더 성장하도록 도와 주는 길이 아닐까? 아마도 그것이 진정한 사랑일지도… 미주주간현대 (dyk47@ayhoo.com)
2009-02-08 참정권 허용 약(藥)인가 독(毒)인가 [베이포럼]
참정권 허용 약(藥)인가 독(毒)인가 재외국민 참정권 법안이 5일(한국시간) 한국 국회를 통과 함에 따라 약 3백만 명에 달하는 재외국민 가운데 한국국적을 소유한 2백40만 명의 투표권 행사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실질 투표권자를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일본의 경우 10%, 프랑스의 경우 40%를 기록하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2년 전 재외동포 참정권 불허가 헌법 불일치 판결 후 마침내 입법이 완료 되었다. L.A지역에선 이미 재외국민 참정권과 관련 한나라당의 기능을 대신할 ‘한나라 포럼’이 결성되어 미국 전역에 지부를 결성하고 있다. 센프란시스코 지역 동포들 가운데 한나라당 성향의 몇몇 사람이 L.A대회 참석 후 기자회견을 갖고 샌프란시스코에 지부를 결성한다는 발표까지 했다. 발 빠른 재미 동포들의 움직임에 한국 한나라당에서도 당황했다는 뉴스가 흘러 나오고 있다. 동포사회 활력소 될까? 한국국회가 19살 이상의 재외국민의 권리를 인정한 참정권 법안을 통과 시킨 것은 2009년 신년 해외 동포사회 변화의 획을 긋는 결정이다. 2012년부터 재외국민의 투표권 행사에 따른 표심의 향방에 따라 한국 정계는 새로운 변화에 직면할 것으로 예상 되고 있다. 이미 한나라당이 보수세력을 미주에 만들기 위한 조직을 가동 시킴에 따라 민주당도 뒤따라 똑 같은 전철을 밟아 우호세력 키우기 노력을 배가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한국 정당의 해외 진출이 법적으로 불가능한 만큼 미주 내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대리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수순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한인사회 내 유력인사들의 향방에도 많은 관심이 집중될 것이다. 일부 인사들은 스스로 몸값을 높이기 위해 벌써부터 단체장 감투를 쓰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번지고 있다. 미국 주류사회 진출만이 한인사회의 위상을 높이는 유일한 방법으로 주창해온 일부 인사들은 이번 재외국민 참정권 법안 통과에 상당히 불쾌한 감정을 표시하고 있다. 그 동안 한인사회 내 분열이 있었지만, 참정권으로 인해 동포사회 전체가 크게 분열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우려가 우려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은 올바른 진단이다. 이런 변화가 세계 동포사회에 약(藥)이 될지 독(毒)이 될지는 아직 판단하기가 쉽지 않지만 새 인물 등장과 한인업소에 활력을 불러올 것 만은 틀림없다. 다 인종 사회에서 한인들의 정치력 신장을 위하여 적지 않은 동포들이 노력을 기울여 왔고 또한 소기의 성공을 거둔 것도 사실이다. 그 동안의 노력에 비해 주류 사회 내 한인의 영향력은 아직도 미미하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젠 한국 정당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한인사회에 투자를 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됨으로 인해 동포사회 전체가 동력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 새 인물이 등장해야 한국 국회가 재외국민 참정권 법안을 통과 시킴에 따라 새 인물 발굴이 가속화 될 것이다. 초기에는 동포사회에서 활동 중인 인물들이 중심이 되겠지만 점차 새로운 인물들의 등장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존인물로는 한인사회가 요구하는 역량을 충족 시키기 역부족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결국 새 인물의 경쟁적 등장과 함께 동포사회는 보다 역동적으로 활성화 될 것이다. 현재 한인사회에서 봉사하는 인물 대부분이 상당히 오래된 사람들로 다소 식상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번 참정권 법안이 대통령선거와 국회 정당 투표권을 행사하기 때문에 재외국민 가운데 비례대표제 국회의원이 나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정당마다 최소한 국회의원 몇 명을 추천하느냐에 그 열기는 더 해질 것이다. 재외국민 출신 국회의원이 나오면 그 뿌리가 해외인 만큼 동포들의 민원사항이나 관련 예산지원 등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한국정부가 글로벌화를 위한 새로운 역할을 재외국민들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 그 역할이 크게 활성화 되고 이에 따른 동포사회의 팽창도 예상된다. 동포사회 역할이 커지면 커질수록 실력을 갖춘 새로운 인물의 등장은 거의 필연적이다. 장미빛만 있을까 앞으로 한인회장 무투표 당선은 앞으로 구경하기 힘들 것이다. 참정권 행사가 시작이면서 한인회장의 위상이 크게 격상될 것으로 보인다. 대도시의 회장인 경우 비례대표제 국회의원 후보에 우선권을 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회장 선거가 중요하다면 그만큼 과열될 조짐도 커지기 때문이다. 회장 선거가 국회의원으로 가는 1차 관문으로 인식될 경우 선거로 인한 과열현상과 타락선거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결국 선거가 이전투구할 가능성도 커져서 참정권 행사가 장미빛 만은 아닐 것이다. 선거로 인한 동포사회 분열과 반목은 상당히 강도가 높아질 것이다. 한국정치와 동포사회가 연관 되다 보니 미 주류사회 진출은 우선순위가 뒤바귈 수도 있어 크게 우려되고 있다. 일부에선 영주권자는 한국사회에, 시민권자는 주류사회 진출에 각각 몰두하면 되지 않겠냐는 순진한 역할 분담론도 나오고 있으나 그렇게 생각처럼 간단치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대부분 똑 같은 인물들이 양다리를 거칠 것이고, 투표권 유무와 관계없이 특별히 구분할 이유도 명분도 없기 때문이다. 재외국민 참정권 부여는 예상보다 동포사회에 큰 파장을 몰고 올 것이고, 그 여파에 동포사회가 크게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정부는 보다 세밀하게 투표권을 갖고 있는 재외국민에게 선거관련 교육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아울러 재외국민이 거주국에서 정체성 유지에 혼란을 갖지 않도록 재외동포청 같은 동포전담 기구도 만들어 동포사회의 혼란을 사전에 예방해야 할 것이다. 하여튼 지속 되는 불경기와 동력부재로 침체된 세계 동포사회에 참정권을 부여한다는 변화는 실(失)보다 득(得)이 많을 것만은 확실하다. 미주주간현대 발행인 칼럼 / 김동열 (dyk47@yahoo.com)
참정권 허용 약(藥)인가 독(毒)인가 재외국민 참정권 법안이 5일(한국시간) 한국 국회를 통과 함에 따라 약 3백만 명에 달하는 재외국민 가운데 한국국적을 소유한 2백40만 명의 투표권 행사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실질 투표권자를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일본의 경우 10%, 프랑스의 경우 40%를 기록하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2년 전 재외동포 참정권 불허가 헌법 불일치 판결 후 마침내 입법이 완료 되었다. L.A지역에선 이미 재외국민 참정권과 관련 한나라당의 기능을 대신할 ‘한나라 포럼’이 결성되어 미국 전역에 지부를 결성하고 있다. 센프란시스코 지역 동포들 가운데 한나라당 성향의 몇몇 사람이 L.A대회 참석 후 기자회견을 갖고 샌프란시스코에 지부를 결성한다는 발표까지 했다. 발 빠른 재미 동포들의 움직임에 한국 한나라당에서도 당황했다는 뉴스가 흘러 나오고 있다. 동포사회 활력소 될까? 한국국회가 19살 이상의 재외국민의 권리를 인정한 참정권 법안을 통과 시킨 것은 2009년 신년 해외 동포사회 변화의 획을 긋는 결정이다. 2012년부터 재외국민의 투표권 행사에 따른 표심의 향방에 따라 한국 정계는 새로운 변화에 직면할 것으로 예상 되고 있다. 이미 한나라당이 보수세력을 미주에 만들기 위한 조직을 가동 시킴에 따라 민주당도 뒤따라 똑 같은 전철을 밟아 우호세력 키우기 노력을 배가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한국 정당의 해외 진출이 법적으로 불가능한 만큼 미주 내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대리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수순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한인사회 내 유력인사들의 향방에도 많은 관심이 집중될 것이다. 일부 인사들은 스스로 몸값을 높이기 위해 벌써부터 단체장 감투를 쓰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번지고 있다. 미국 주류사회 진출만이 한인사회의 위상을 높이는 유일한 방법으로 주창해온 일부 인사들은 이번 재외국민 참정권 법안 통과에 상당히 불쾌한 감정을 표시하고 있다. 그 동안 한인사회 내 분열이 있었지만, 참정권으로 인해 동포사회 전체가 크게 분열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우려가 우려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은 올바른 진단이다. 이런 변화가 세계 동포사회에 약(藥)이 될지 독(毒)이 될지는 아직 판단하기가 쉽지 않지만 새 인물 등장과 한인업소에 활력을 불러올 것 만은 틀림없다. 다 인종 사회에서 한인들의 정치력 신장을 위하여 적지 않은 동포들이 노력을 기울여 왔고 또한 소기의 성공을 거둔 것도 사실이다. 그 동안의 노력에 비해 주류 사회 내 한인의 영향력은 아직도 미미하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젠 한국 정당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한인사회에 투자를 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됨으로 인해 동포사회 전체가 동력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 새 인물이 등장해야 한국 국회가 재외국민 참정권 법안을 통과 시킴에 따라 새 인물 발굴이 가속화 될 것이다. 초기에는 동포사회에서 활동 중인 인물들이 중심이 되겠지만 점차 새로운 인물들의 등장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존인물로는 한인사회가 요구하는 역량을 충족 시키기 역부족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결국 새 인물의 경쟁적 등장과 함께 동포사회는 보다 역동적으로 활성화 될 것이다. 현재 한인사회에서 봉사하는 인물 대부분이 상당히 오래된 사람들로 다소 식상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번 참정권 법안이 대통령선거와 국회 정당 투표권을 행사하기 때문에 재외국민 가운데 비례대표제 국회의원이 나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정당마다 최소한 국회의원 몇 명을 추천하느냐에 그 열기는 더 해질 것이다. 재외국민 출신 국회의원이 나오면 그 뿌리가 해외인 만큼 동포들의 민원사항이나 관련 예산지원 등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한국정부가 글로벌화를 위한 새로운 역할을 재외국민들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 그 역할이 크게 활성화 되고 이에 따른 동포사회의 팽창도 예상된다. 동포사회 역할이 커지면 커질수록 실력을 갖춘 새로운 인물의 등장은 거의 필연적이다. 장미빛만 있을까 앞으로 한인회장 무투표 당선은 앞으로 구경하기 힘들 것이다. 참정권 행사가 시작이면서 한인회장의 위상이 크게 격상될 것으로 보인다. 대도시의 회장인 경우 비례대표제 국회의원 후보에 우선권을 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회장 선거가 중요하다면 그만큼 과열될 조짐도 커지기 때문이다. 회장 선거가 국회의원으로 가는 1차 관문으로 인식될 경우 선거로 인한 과열현상과 타락선거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결국 선거가 이전투구할 가능성도 커져서 참정권 행사가 장미빛 만은 아닐 것이다. 선거로 인한 동포사회 분열과 반목은 상당히 강도가 높아질 것이다. 한국정치와 동포사회가 연관 되다 보니 미 주류사회 진출은 우선순위가 뒤바귈 수도 있어 크게 우려되고 있다. 일부에선 영주권자는 한국사회에, 시민권자는 주류사회 진출에 각각 몰두하면 되지 않겠냐는 순진한 역할 분담론도 나오고 있으나 그렇게 생각처럼 간단치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대부분 똑 같은 인물들이 양다리를 거칠 것이고, 투표권 유무와 관계없이 특별히 구분할 이유도 명분도 없기 때문이다. 재외국민 참정권 부여는 예상보다 동포사회에 큰 파장을 몰고 올 것이고, 그 여파에 동포사회가 크게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정부는 보다 세밀하게 투표권을 갖고 있는 재외국민에게 선거관련 교육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아울러 재외국민이 거주국에서 정체성 유지에 혼란을 갖지 않도록 재외동포청 같은 동포전담 기구도 만들어 동포사회의 혼란을 사전에 예방해야 할 것이다. 하여튼 지속 되는 불경기와 동력부재로 침체된 세계 동포사회에 참정권을 부여한다는 변화는 실(失)보다 득(得)이 많을 것만은 확실하다. 미주주간현대 발행인 칼럼 / 김동열 (dyk47@yahoo.com)
2009-01-23 인수인계로 반목하는 한인회
제25대 샌프란시스코 한인회에서 26대 넘어 오는 길목 격인 한인회 업무 인수인계가 우려한 대로 궤도에서 벗어나 막다른 종착역을 향해 달리고 있다. 그 종착역은 화합과 협력이 아닌 갈등과 분열이라는 식상(食傷)한 역(驛)인 것이다. 이번 제25대와 26대의 인수인계는 초장부터 삐꺽 거릴 조짐을 유감없이 보였다. 우선 양대 한인회 구성원이 물과 기름처럼 서로를 공생과 협력의 대상이 아닌 반칙과 반목의 상대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니 양쪽 모두 상대방에 대한 이해나 존경은 명함조차 내밀기 어렵게 되었다. 뮨규만 인수위원장에 따르면 그 동안 수 차례에 걸쳐 인수인계 관련 서류를 요청했으나 처음에 받은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더 이상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문위원장은 첫 기자회견에서도 제25대 한인회가 협력하면 빨리 인수인계 업무를 마무리 짓고 제26대 한인회가 순조로운 스타트를 할 수 있겠다는 희망 사항을 수 차례 강조했었다. 결국 제25대 한인회의 협조 없이는 반쪽 인수인계 밖에 안 되는 현실을 우려한 것이다. 이번 인수인계 업무가 보다 실속 있고 정상적으로 마무리 짓기 위해선 우선 제25대 한인회의 실질적인 협력이 필요하다. 제26대와 협조가 잘 안되면 제 3자나 단체를 중간에 넣어 의사소통의 언로를 찾아야 한다. 가능한 중립적인 인물이면 양측 모두 거부반응은 적을 것이다. 우선 의사소통을 회복하는 것이 시급하다. 대의를 위해선 제25대가 먼저 성의를 보여야 한다. 인수위가 요청한 관련 서류나 은행서류 등 필요한 서류를 성의껏 전달하거나 협력해야 한다. 그래야만 제25대 한인회의 임무를 마무리 지을 수 있다. 요청한 서류를 무조건 모른다고 방치하면 결국 새 한인회와 반목하는 모습으로 비쳐지는 것은 물론 의혹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제25대 한인회에 해명을 요청한 몇 가지 사항에 가감 없이 신속한 답변이 이루어지면 좋겠다. 언론에 이미 보도됐다고 끝난 것은 더욱 아닐 것이다. 언론플레이가 목적은 아니다. 문규만 인수위원장은 좀 더 인내심을 갖고 제25대 한인회를 설득 시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언론을 통해서 일방적으로 제25대를 매도하면 결국 위원장 직분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유야무야(有耶無耶)로 끝날 확률도 적지 않다. 한인회라는 단체가 어떤 법적인 구속력이 없는 봉사단체인 만큼 시간이 걸리고 지루해도 가급적 설득하는데 시간과 노력을 우선해야 한다. 그 동안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반적인 해명만 요구하는 자세가 아닌 협력을 요청하는 자세로 일대 일 면담이라도 몇 차례 노력했는지 궁금하다. 혹자 가운데는 그렇게 사정할 필요가 있겠냐는 의문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한인사회의 약점으로 손꼽히는 대화의 통로라는 큰 벽을 넘기 위해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좋다. 언론에 일방적으로 자신의 입장만 나열할수록 제25대의 협력은 더욱 멀어져 갈 수도 있다. 아무리 훌륭한 방법으로 인수인계 시나리오를 만들어도 결국은 반쪽자리 보고서를 만들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인수위원회가 구성 되었을 때는 그래도 완벽하지는 못해도 양측의 입장이 모두 담긴 그런 충실한 인수인계 내용을 동포들은 기다리고 있다. 인수인계 업무가 제 시간 내 끝내지 못해도 보다 확실한 결과를 얻기 위해선 양측이 대화의 통로를 다시 열어야 한다. 질긴 사람이 이긴다? 세상은 질긴 사람이 이기게 되어 있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다. 이 뜻은 세상에 만만한 것이 없기 대문에 보다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는 사람이 최종 승자가 된다는 말이다. 언론을 통해서 계속 제25대를 코너에 몰아 넣으면 더욱 양측은 소통하기가 힘들다. 더욱 제 25대를 무슨 파렴치한 집단으로 매도하면 인수인계는 끝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제25대가 이미 어떤 언론플레이에도 각오하고 있다면 결국 무에서 시작해서 무로 끝날 수 밖에 없지 않겠나. 제25대가 이미 언론에 자신들의 이름이 오르내렸는데 칼자루 쥔 사람들과 다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한인회가 법적인 구속력이 없는 봉사단체인 만큼 늦게라는 원만한 타협이 이루어져 양측이 사실 그대로인수인계를 끝내고, 동포들을 위한 단체로 업데이드 되어야 한다. 그러나 최소한 대화의 통로마저 만들기 힘들다면 전직 한인회장단을 중심으로 중재를 요청하면 좋겠다. 질긴 사람이 이긴다는 말은 경쟁사회에서나 통할 말이지 봉사를 자청하고 나선 사람들 사이에선 옳은 말이 아니기 바란다. 요즘 지속되는 불경기 속에 잠 못 자는 동포들이 늘어나고 있다. 직장과 사업체가 불안하고, 페이먼트 압박에 하루하루 노심초사하는 동포들이 적지 않은데 한인회의 반목이 지속 되면 그들에게 잡음으로 들릴 수도 있다. 이 지역 10만 동포들부터 사랑 받는 한인회가 되기 위해선 다툼으로 비치기 보다 함께 뭉쳐 가는 모습을 보이면 좋겠다. 오바마가 취임사에서 화합을 강조 하듯 화합하는 봉사단체로 제 26대 한인회가 자리를 잡기 바란다. (dyk47@yahoo.com)
제25대 샌프란시스코 한인회에서 26대 넘어 오는 길목 격인 한인회 업무 인수인계가 우려한 대로 궤도에서 벗어나 막다른 종착역을 향해 달리고 있다. 그 종착역은 화합과 협력이 아닌 갈등과 분열이라는 식상(食傷)한 역(驛)인 것이다. 이번 제25대와 26대의 인수인계는 초장부터 삐꺽 거릴 조짐을 유감없이 보였다. 우선 양대 한인회 구성원이 물과 기름처럼 서로를 공생과 협력의 대상이 아닌 반칙과 반목의 상대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니 양쪽 모두 상대방에 대한 이해나 존경은 명함조차 내밀기 어렵게 되었다. 뮨규만 인수위원장에 따르면 그 동안 수 차례에 걸쳐 인수인계 관련 서류를 요청했으나 처음에 받은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더 이상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문위원장은 첫 기자회견에서도 제25대 한인회가 협력하면 빨리 인수인계 업무를 마무리 짓고 제26대 한인회가 순조로운 스타트를 할 수 있겠다는 희망 사항을 수 차례 강조했었다. 결국 제25대 한인회의 협조 없이는 반쪽 인수인계 밖에 안 되는 현실을 우려한 것이다. 이번 인수인계 업무가 보다 실속 있고 정상적으로 마무리 짓기 위해선 우선 제25대 한인회의 실질적인 협력이 필요하다. 제26대와 협조가 잘 안되면 제 3자나 단체를 중간에 넣어 의사소통의 언로를 찾아야 한다. 가능한 중립적인 인물이면 양측 모두 거부반응은 적을 것이다. 우선 의사소통을 회복하는 것이 시급하다. 대의를 위해선 제25대가 먼저 성의를 보여야 한다. 인수위가 요청한 관련 서류나 은행서류 등 필요한 서류를 성의껏 전달하거나 협력해야 한다. 그래야만 제25대 한인회의 임무를 마무리 지을 수 있다. 요청한 서류를 무조건 모른다고 방치하면 결국 새 한인회와 반목하는 모습으로 비쳐지는 것은 물론 의혹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제25대 한인회에 해명을 요청한 몇 가지 사항에 가감 없이 신속한 답변이 이루어지면 좋겠다. 언론에 이미 보도됐다고 끝난 것은 더욱 아닐 것이다. 언론플레이가 목적은 아니다. 문규만 인수위원장은 좀 더 인내심을 갖고 제25대 한인회를 설득 시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언론을 통해서 일방적으로 제25대를 매도하면 결국 위원장 직분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유야무야(有耶無耶)로 끝날 확률도 적지 않다. 한인회라는 단체가 어떤 법적인 구속력이 없는 봉사단체인 만큼 시간이 걸리고 지루해도 가급적 설득하는데 시간과 노력을 우선해야 한다. 그 동안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반적인 해명만 요구하는 자세가 아닌 협력을 요청하는 자세로 일대 일 면담이라도 몇 차례 노력했는지 궁금하다. 혹자 가운데는 그렇게 사정할 필요가 있겠냐는 의문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한인사회의 약점으로 손꼽히는 대화의 통로라는 큰 벽을 넘기 위해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좋다. 언론에 일방적으로 자신의 입장만 나열할수록 제25대의 협력은 더욱 멀어져 갈 수도 있다. 아무리 훌륭한 방법으로 인수인계 시나리오를 만들어도 결국은 반쪽자리 보고서를 만들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인수위원회가 구성 되었을 때는 그래도 완벽하지는 못해도 양측의 입장이 모두 담긴 그런 충실한 인수인계 내용을 동포들은 기다리고 있다. 인수인계 업무가 제 시간 내 끝내지 못해도 보다 확실한 결과를 얻기 위해선 양측이 대화의 통로를 다시 열어야 한다. 질긴 사람이 이긴다? 세상은 질긴 사람이 이기게 되어 있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다. 이 뜻은 세상에 만만한 것이 없기 대문에 보다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는 사람이 최종 승자가 된다는 말이다. 언론을 통해서 계속 제25대를 코너에 몰아 넣으면 더욱 양측은 소통하기가 힘들다. 더욱 제 25대를 무슨 파렴치한 집단으로 매도하면 인수인계는 끝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제25대가 이미 어떤 언론플레이에도 각오하고 있다면 결국 무에서 시작해서 무로 끝날 수 밖에 없지 않겠나. 제25대가 이미 언론에 자신들의 이름이 오르내렸는데 칼자루 쥔 사람들과 다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한인회가 법적인 구속력이 없는 봉사단체인 만큼 늦게라는 원만한 타협이 이루어져 양측이 사실 그대로인수인계를 끝내고, 동포들을 위한 단체로 업데이드 되어야 한다. 그러나 최소한 대화의 통로마저 만들기 힘들다면 전직 한인회장단을 중심으로 중재를 요청하면 좋겠다. 질긴 사람이 이긴다는 말은 경쟁사회에서나 통할 말이지 봉사를 자청하고 나선 사람들 사이에선 옳은 말이 아니기 바란다. 요즘 지속되는 불경기 속에 잠 못 자는 동포들이 늘어나고 있다. 직장과 사업체가 불안하고, 페이먼트 압박에 하루하루 노심초사하는 동포들이 적지 않은데 한인회의 반목이 지속 되면 그들에게 잡음으로 들릴 수도 있다. 이 지역 10만 동포들부터 사랑 받는 한인회가 되기 위해선 다툼으로 비치기 보다 함께 뭉쳐 가는 모습을 보이면 좋겠다. 오바마가 취임사에서 화합을 강조 하듯 화합하는 봉사단체로 제 26대 한인회가 자리를 잡기 바란다. (dyk47@yahoo.com)
2009-01-15 충격적인 경찰의 만행(베이포럼)
충격적인 경찰의 만행 오클랜드 경찰 총격사건이 예사롭지 않다. 수갑이 채워진 상태의 흑인청년 오스카 그랜드(사진)를 엎드려 앉힌 상태에서 사살한 충격적인 경찰의 만행에 대한 분노가 오클랜드 시민은 물론 미국전체로 급속도로 번지고 있다. 특히 사살장면과 수갑이 채워진 손이 동영상을 통해 언론에 보도 되면서 경찰의 총격에 미국전체가 부글부글하고 있다. 지난주 오클랜드 다운타운에선 경찰이 데모대를 상대로 강력한 진압활동을 펼쳤지만 ‘Justice(정의)’를 외치는 데모대는 거리에 주차된 차에 불을 지르고 상점유리창을 깨트리는 등 폭력시위를 멈추지 않았다. 일부 피해 상인들은 상가파손 사태를 개탄하며 시위대의 초점이 흐려질까 두렵다는 표현도 했다. 흑백의 다른 시각 이번 사태를 보는 흑백의 시각은 매우 대조적이다. 일부 백인들은 이번 경찰총격사건은 경찰관의 실수(wrongful death)였지, 고의성은 없었을 것이라는 점과 당시 주변이 어두웠고 상당히 흥분된 상태여서 판단 집중력이 떨어진 환경 을 강조하고 있다. 어떻게 수갑을 채운 피의자에게 총격을 가할 수 있겠냐는 논리다. 아마도 스팅건으로 착각하고 깊은 생각 없이 총을 쏘았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경찰과 검찰에서 이미 관련 경찰관 안전을 위하여 구속했고 현장 증인들 수사를 시작해 사건의 윤곽은 파악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휘발성이 너무나 강한 사건이라 중간 진상발표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뒷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로드니 킹 폭동’도 사건발생 직후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재판에게 폭력경찰들에 대한 무죄평결이 나온 직후에 터진 경험이 있어 이번 사건은 재판과정에 따라 폭발 가능성은 상존하고 있다. 만에 하나 경찰관이 실수로 피해자를 사살했다는 증언이 나오면 재판부도 심각한 고민에 빠질 수 있다. 근무 중 고의성이 아닌 실수를 어떻게 처리할지 보통문제가 아닌 것이다. 결국 배심원이 그런 실수를 인정 하느냐 에 따라 경찰관의 운명은 물론 그 후유증은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인사회에서 이번 사건에 특별히 촉각을 세우는 가장 큰 이유는 오클랜드에서 자영업을 하는 한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오클랜드 다운타운 샌드위치 샵의 반 이상은 한인들이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그들에 대한 피해가 크게 우려 되고 있으며, 오클랜드 곳곳에서 흑인고객을 상대로 식당과 마켓 그리고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인 경찰들에 의한 흑인 총격사건이 어제와 오늘 일만은 아니지만 이번처럼 어처구니 없는 사건도 없었다. 새해 이브에 젊은이들이 패싸움을 했던 것이 옳은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새해를 맞이 한 기쁨에 다소 흥분되고 음주도 했을 수 있어 말다툼이나 몸싸움도 있었을 것이다. 지난번 더블린 한인주택에서 식칼을 들은 한국방문객이 경찰의 총격에 사살된 일이 잊혀지기도 전에 또다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대하고 나니 경찰이 누구를 위한 집단인지 다시 비쳐진다. 더블린사건 당시 경찰과 언어의 소통에 문제는 있었지만 거리상 경찰관에 위험을 줄 만큼 위급한 환경이 아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사건도 이미 수갑이 채워졌는데 무슨 위험이 경찰에 있다고 피의자를 사살했느냐는 주장이다. 결국 백인들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이 마음 어딘가에 잠재적으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역사적인 오바마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이런 사건이 발생한 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다. 일부 흑인커뮤니티에선 오마바 대통령을 선출한 만큼 흑인들도 사회의 방관자가 아닌 참여자로 책임 있는 행동을 보여야 한다는 자성과 각오를 다짐한다는 긍정적인 이야기도 들리고 있었는데…… 유비무환(有備無患)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담을 수는 없다. 우연인지 고의적인지 법원이 결정할 일이지만 한인사회에서도 크게 관심을 갖고 흑인사회와 소통을 시작해야 한다. 진실을 밝혀내고 그에 따른 책임을 묻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실제 꼭 그렇게 굴러가지 않는 경우도 발생한다. 과거 역사 속에는 흑, 백인이 자신의 몫을 지키기 위해 대결도 마다했지만 이제 두 집단이 맞짱뜨고 싸우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 이유는 서로가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백인은 항상 흑인들에게 빚을 진 느낌을 갖고 있으며, 흑인은 백인들의 잔인함에 겁을 내고 있다. 결국 그들의 싸움에는 감정을 소화 시키는 희생양을 항상 필요로 했다. 로스엔젤레스에서 발생한 ‘로드니 킹 폭동’도 결국 한인사회라는 희생양이 두 집단의 이해관계에 맞아 떨어진 사건이다. 이번 사건의 흐름을 언론에서도 철저히 감시 하겠지만 한인단체에서도 조속히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초기 재판과정에서부터 적절한 논평 등 우리의 목소리를 내 흑인 사회에 알리도록 해야 한다. 흑인커뮤니티도 다른 소수사회처럼 상당히 소통이 어렵고, 불신이 많은 사회로 알려져 있다. 이런 소통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전향적으로 상호간 인적 교류를 넓히고, 사건재발을 모색하는 방안을 공동으로 마련하는 등 관심과 애정을 보여야 한다. 앞으로 어떻게 이번 경찰 총격사건이 진행될지 알 수 없지만 방관자 입장이 아닌 당사자로서 유비무환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로스엔젤레스 폭동 당시 한인사회가 초토화를 당했던 그런 비극이 오클랜드에서 재현되어서는 안 된다. 이미 오클랜드 일부 한인업소는 시청앞에서 데모하는 날에는 피해를 우려해 영업시간을 단축하는 등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결국 깨어 있는 자만이 자신의 것을 지킬 수 있다는 옛 지혜를 잊지 말자. (dyk47@yahoo.com)
충격적인 경찰의 만행 오클랜드 경찰 총격사건이 예사롭지 않다. 수갑이 채워진 상태의 흑인청년 오스카 그랜드(사진)를 엎드려 앉힌 상태에서 사살한 충격적인 경찰의 만행에 대한 분노가 오클랜드 시민은 물론 미국전체로 급속도로 번지고 있다. 특히 사살장면과 수갑이 채워진 손이 동영상을 통해 언론에 보도 되면서 경찰의 총격에 미국전체가 부글부글하고 있다. 지난주 오클랜드 다운타운에선 경찰이 데모대를 상대로 강력한 진압활동을 펼쳤지만 ‘Justice(정의)’를 외치는 데모대는 거리에 주차된 차에 불을 지르고 상점유리창을 깨트리는 등 폭력시위를 멈추지 않았다. 일부 피해 상인들은 상가파손 사태를 개탄하며 시위대의 초점이 흐려질까 두렵다는 표현도 했다. 흑백의 다른 시각 이번 사태를 보는 흑백의 시각은 매우 대조적이다. 일부 백인들은 이번 경찰총격사건은 경찰관의 실수(wrongful death)였지, 고의성은 없었을 것이라는 점과 당시 주변이 어두웠고 상당히 흥분된 상태여서 판단 집중력이 떨어진 환경 을 강조하고 있다. 어떻게 수갑을 채운 피의자에게 총격을 가할 수 있겠냐는 논리다. 아마도 스팅건으로 착각하고 깊은 생각 없이 총을 쏘았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경찰과 검찰에서 이미 관련 경찰관 안전을 위하여 구속했고 현장 증인들 수사를 시작해 사건의 윤곽은 파악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휘발성이 너무나 강한 사건이라 중간 진상발표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뒷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로드니 킹 폭동’도 사건발생 직후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재판에게 폭력경찰들에 대한 무죄평결이 나온 직후에 터진 경험이 있어 이번 사건은 재판과정에 따라 폭발 가능성은 상존하고 있다. 만에 하나 경찰관이 실수로 피해자를 사살했다는 증언이 나오면 재판부도 심각한 고민에 빠질 수 있다. 근무 중 고의성이 아닌 실수를 어떻게 처리할지 보통문제가 아닌 것이다. 결국 배심원이 그런 실수를 인정 하느냐 에 따라 경찰관의 운명은 물론 그 후유증은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인사회에서 이번 사건에 특별히 촉각을 세우는 가장 큰 이유는 오클랜드에서 자영업을 하는 한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오클랜드 다운타운 샌드위치 샵의 반 이상은 한인들이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그들에 대한 피해가 크게 우려 되고 있으며, 오클랜드 곳곳에서 흑인고객을 상대로 식당과 마켓 그리고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인 경찰들에 의한 흑인 총격사건이 어제와 오늘 일만은 아니지만 이번처럼 어처구니 없는 사건도 없었다. 새해 이브에 젊은이들이 패싸움을 했던 것이 옳은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새해를 맞이 한 기쁨에 다소 흥분되고 음주도 했을 수 있어 말다툼이나 몸싸움도 있었을 것이다. 지난번 더블린 한인주택에서 식칼을 들은 한국방문객이 경찰의 총격에 사살된 일이 잊혀지기도 전에 또다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대하고 나니 경찰이 누구를 위한 집단인지 다시 비쳐진다. 더블린사건 당시 경찰과 언어의 소통에 문제는 있었지만 거리상 경찰관에 위험을 줄 만큼 위급한 환경이 아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사건도 이미 수갑이 채워졌는데 무슨 위험이 경찰에 있다고 피의자를 사살했느냐는 주장이다. 결국 백인들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이 마음 어딘가에 잠재적으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역사적인 오바마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이런 사건이 발생한 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다. 일부 흑인커뮤니티에선 오마바 대통령을 선출한 만큼 흑인들도 사회의 방관자가 아닌 참여자로 책임 있는 행동을 보여야 한다는 자성과 각오를 다짐한다는 긍정적인 이야기도 들리고 있었는데…… 유비무환(有備無患)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담을 수는 없다. 우연인지 고의적인지 법원이 결정할 일이지만 한인사회에서도 크게 관심을 갖고 흑인사회와 소통을 시작해야 한다. 진실을 밝혀내고 그에 따른 책임을 묻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실제 꼭 그렇게 굴러가지 않는 경우도 발생한다. 과거 역사 속에는 흑, 백인이 자신의 몫을 지키기 위해 대결도 마다했지만 이제 두 집단이 맞짱뜨고 싸우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 이유는 서로가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백인은 항상 흑인들에게 빚을 진 느낌을 갖고 있으며, 흑인은 백인들의 잔인함에 겁을 내고 있다. 결국 그들의 싸움에는 감정을 소화 시키는 희생양을 항상 필요로 했다. 로스엔젤레스에서 발생한 ‘로드니 킹 폭동’도 결국 한인사회라는 희생양이 두 집단의 이해관계에 맞아 떨어진 사건이다. 이번 사건의 흐름을 언론에서도 철저히 감시 하겠지만 한인단체에서도 조속히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초기 재판과정에서부터 적절한 논평 등 우리의 목소리를 내 흑인 사회에 알리도록 해야 한다. 흑인커뮤니티도 다른 소수사회처럼 상당히 소통이 어렵고, 불신이 많은 사회로 알려져 있다. 이런 소통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전향적으로 상호간 인적 교류를 넓히고, 사건재발을 모색하는 방안을 공동으로 마련하는 등 관심과 애정을 보여야 한다. 앞으로 어떻게 이번 경찰 총격사건이 진행될지 알 수 없지만 방관자 입장이 아닌 당사자로서 유비무환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로스엔젤레스 폭동 당시 한인사회가 초토화를 당했던 그런 비극이 오클랜드에서 재현되어서는 안 된다. 이미 오클랜드 일부 한인업소는 시청앞에서 데모하는 날에는 피해를 우려해 영업시간을 단축하는 등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결국 깨어 있는 자만이 자신의 것을 지킬 수 있다는 옛 지혜를 잊지 말자. (dyk47@yahoo.com)
2009-01-07 모나크 나비의 신비
새해 연휴를 맞아 샌프란시스코에서 2시간 거리에 위치한 몬트레이 베이를 다시 찾았다. 지난 12월 19일 몬트레이에서 한인회 주최 한국국악교육원 예술단 초청 ‘송년의 밤’ 공연에 있었다. 특별히 찾은 이유는 그 동안 준비해온 모나크 나비에 대한 정보 수집을 위해서다. 예정 시간을 넘겨 늦게 도착했지만 그래도 따듯한 분의 도움을 받아 생생한 현지 취재를 할 수 있었다. 나비의 이동 요즘 같은 추위에 안타깝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몬트레이 반도 남단에 위치한 패시픽 그로브에 사는 주민들과 이곳을 특별히 찾는 관광객 이다. 그 이유는 나비가 추위와 찬 바람에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패시픽 그로브는 몬트레이 지역 내에서 클린튼 이스트우드가 시장을 역임한 카멜시와 함께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지역이다. 카멜은 페블비치와 골프장으로 너무나 유명한 명소로 알려진 곳이다. 살리나스(Salinas)가 죤 스타인백의 짖은 향기에 묻혀 있다면 패시픽 그로브는 모나크 나비(monarch butterfly / 왕나비)가 매년 겨울을 나기 위하여 찾는 나비의 고향으로 불리고 있다. 지난 10월 중순부터 날아온 모나크 나비 숫자는 약1만8천 마리로 추정되고 있다. 지난해에는 약 8~9천 마리가 찾아 왔다니 올해엔 두 배로 찾아온 셈이다. 이들 모나크 나비는 대부분 알라스카에서 날아온다 약 2천 마일 거리를 날아 온다니 선 듯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비의 날개 크기는 전부 합쳐도 대부분 4인치를 넘지 못한다. 그런 가녀린 날개로 날아 오다니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미스터리다. 전문가들은 모나크 나비가 스스로 날개를 펄럭이면서 오는 것은 불가능하고 아마도 지구의 기류를 타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알라스카의 빙하가 녹아 샌프란시스코 베이 캐스케이트 산맥까지 흘러내려 특이한 기후를 형성하는 것도 기류변화에 상당한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한가지 특이한 것은 모나크 나비가 높은 록키산맥을 넘지 못하기 때문에 동부 뉴잉글랜드 지역의 나비는 겨울철이 다가 오면 멕시코로 이동하고 서부 지역 알라스카 서식 나비는 캘리포니아 주로 온다. 이 말은 나비가 동서로 이동하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자연의 기적 미국 전역에 약 1억 마리의 모나크 나비가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 나비 수명은 생각보다 짧다. 모나크 나비의 일생은 암컷이 유액식물인 밀크위드(milkweed plant) 잎사귀 위에 알을 낳으면 약 4일이 지나 부화하고 애벌레로 약 2주간 지내는데 이때 오직 밀크위드 잎사귀만 먹는다. 나비 애벌레는 밀키위드 잎사귀만 먹기 때문에 이 나무가 고갈되면 모나크 나비도 자연스럽게 지구상에서 사라질 수 밖에 있다. 일부 지역에서 밀크위드 유화나무가 잡목으로 분류돼 벌목되기도 한다. 밀크위드 잎사귀는 강한 독성이 있어 새나 동물이 먹으면 죽는데 유독 왕 나비 애벌레에겐 어떤 중독현상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애벌레가 이런 독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새나 다른 곤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 애벌레 후 번데기 같은 용기에 담겨 약 2주간 나무에 매달리게 되는데 이때 번데기 속에서 애벌레 녹색에서 오랜지와 검정색으로 변화되어 용기 밖으로 나오게 된다. 마침내 세상으로 나온 나비는 대개 약 2-6주의 생명을 유지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것은 알라스카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나아오는 모나크 나비의 수명은 약6-8개월로 알려지고 있다. 즉 같은 나비라도 환경에 따라 수명이 다른 점이 있다. 알라스카에서 날아 온 모나크 나비들은 지금 이곳에서 겨울을 나고 있는데 2~3월이 되면 교미가 끝나고 암컷만 다시 샌후아퀸 밸리로 이동해 알을 낳고 죽게 된다. 그러면 다시 알이 부화하고 나비가 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4대 후에 알라스카를 거쳐 중 캘리포니아로 돌아 오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가장 수수께끼로 남는 부분은 4대가 거친 후에 날아 오는 나비가 대부분 똑 같은 나무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어떻게 4대 후 증조할아버지의 자리를 알겠냐는 뜻이다. ‘자연의 기적(nature’s miracle)’으로 불리는 이 숙제를 풀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아마도 나비가 대대로 슈퍼 칩을 물려주고 있을지도. 모나크 나비의 이동이 스펙타클하게 관심을 끌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이동이 철새 떼처럼 웅장하게 보이지 않고 수백 마리가 뭉쳐 작은 포도송이 단위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 유화나무 꼭대기에 매달려 있어 육안으로 관찰 하기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차가운 바람과 비에 모나크 나비가 대단히 약하다. 그래서 따듯한 날이 아니면 왕처럼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날아가는 나비를 보기가 쉽지 않다. 패시픽 그로브에 가장 많이 온 것은 1951~1952으로 약 1백만 마리였다는 풍문도 있으나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는 없다. 현재 패시픽 그로브외에 모나크 나비 있는 지역으로는 산타크루즈, 피스모 비치, 멀리 산타바바라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패시픽 그로브지역에서 해마다 10월 첫째 주 토요일을 모나크 나비 기념일로 정하여 butterfly parade 행사를 하고 있다. 모나크 나비의 홈 커밍(home coming)을 환영하는 뜻이다.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패시픽 그로브를 모나크 나비 보호구역(butterfly sanctuary)으로 정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모나크 나비를 잡거나 소음으로 방해할 경우 5백 달러의 벌금을 부과하고 있다. 오는 2~3월이 오면 모나크 나비의 여정은 다시 시작될 것이다. 암컷 모나크 나비가 모두 떠나고 수컷만 남아 자신의 수명까지 살다가 죽게 된다. 이번 모나크 나비를 취재하면서 관심 있었던 사람들로부터 정보를 받을 수 있었다. 특히 모나크 나비가 서식하고 있는 패시픽 그로브에서 Butterfly Grove Inn을 운영하는 에릭 박선생님이 주신 사진과 정보에 다시 한번 지면을 통해 감사 드리며 그 외 협조해 주신 다른 분들에게도 같은 뜻을 전해 드린다. 날씨 좋은날 왕나비들이 떠나기 전에 꼭 알현을 해야 되겠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김동열 드림 / 미주주간현대 (dyk47@yahoo.com)
새해 연휴를 맞아 샌프란시스코에서 2시간 거리에 위치한 몬트레이 베이를 다시 찾았다. 지난 12월 19일 몬트레이에서 한인회 주최 한국국악교육원 예술단 초청 ‘송년의 밤’ 공연에 있었다. 특별히 찾은 이유는 그 동안 준비해온 모나크 나비에 대한 정보 수집을 위해서다. 예정 시간을 넘겨 늦게 도착했지만 그래도 따듯한 분의 도움을 받아 생생한 현지 취재를 할 수 있었다. 나비의 이동 요즘 같은 추위에 안타깝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몬트레이 반도 남단에 위치한 패시픽 그로브에 사는 주민들과 이곳을 특별히 찾는 관광객 이다. 그 이유는 나비가 추위와 찬 바람에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패시픽 그로브는 몬트레이 지역 내에서 클린튼 이스트우드가 시장을 역임한 카멜시와 함께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지역이다. 카멜은 페블비치와 골프장으로 너무나 유명한 명소로 알려진 곳이다. 살리나스(Salinas)가 죤 스타인백의 짖은 향기에 묻혀 있다면 패시픽 그로브는 모나크 나비(monarch butterfly / 왕나비)가 매년 겨울을 나기 위하여 찾는 나비의 고향으로 불리고 있다. 지난 10월 중순부터 날아온 모나크 나비 숫자는 약1만8천 마리로 추정되고 있다. 지난해에는 약 8~9천 마리가 찾아 왔다니 올해엔 두 배로 찾아온 셈이다. 이들 모나크 나비는 대부분 알라스카에서 날아온다 약 2천 마일 거리를 날아 온다니 선 듯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비의 날개 크기는 전부 합쳐도 대부분 4인치를 넘지 못한다. 그런 가녀린 날개로 날아 오다니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미스터리다. 전문가들은 모나크 나비가 스스로 날개를 펄럭이면서 오는 것은 불가능하고 아마도 지구의 기류를 타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알라스카의 빙하가 녹아 샌프란시스코 베이 캐스케이트 산맥까지 흘러내려 특이한 기후를 형성하는 것도 기류변화에 상당한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한가지 특이한 것은 모나크 나비가 높은 록키산맥을 넘지 못하기 때문에 동부 뉴잉글랜드 지역의 나비는 겨울철이 다가 오면 멕시코로 이동하고 서부 지역 알라스카 서식 나비는 캘리포니아 주로 온다. 이 말은 나비가 동서로 이동하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자연의 기적 미국 전역에 약 1억 마리의 모나크 나비가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 나비 수명은 생각보다 짧다. 모나크 나비의 일생은 암컷이 유액식물인 밀크위드(milkweed plant) 잎사귀 위에 알을 낳으면 약 4일이 지나 부화하고 애벌레로 약 2주간 지내는데 이때 오직 밀크위드 잎사귀만 먹는다. 나비 애벌레는 밀키위드 잎사귀만 먹기 때문에 이 나무가 고갈되면 모나크 나비도 자연스럽게 지구상에서 사라질 수 밖에 있다. 일부 지역에서 밀크위드 유화나무가 잡목으로 분류돼 벌목되기도 한다. 밀크위드 잎사귀는 강한 독성이 있어 새나 동물이 먹으면 죽는데 유독 왕 나비 애벌레에겐 어떤 중독현상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애벌레가 이런 독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새나 다른 곤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 애벌레 후 번데기 같은 용기에 담겨 약 2주간 나무에 매달리게 되는데 이때 번데기 속에서 애벌레 녹색에서 오랜지와 검정색으로 변화되어 용기 밖으로 나오게 된다. 마침내 세상으로 나온 나비는 대개 약 2-6주의 생명을 유지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것은 알라스카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나아오는 모나크 나비의 수명은 약6-8개월로 알려지고 있다. 즉 같은 나비라도 환경에 따라 수명이 다른 점이 있다. 알라스카에서 날아 온 모나크 나비들은 지금 이곳에서 겨울을 나고 있는데 2~3월이 되면 교미가 끝나고 암컷만 다시 샌후아퀸 밸리로 이동해 알을 낳고 죽게 된다. 그러면 다시 알이 부화하고 나비가 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4대 후에 알라스카를 거쳐 중 캘리포니아로 돌아 오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가장 수수께끼로 남는 부분은 4대가 거친 후에 날아 오는 나비가 대부분 똑 같은 나무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어떻게 4대 후 증조할아버지의 자리를 알겠냐는 뜻이다. ‘자연의 기적(nature’s miracle)’으로 불리는 이 숙제를 풀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아마도 나비가 대대로 슈퍼 칩을 물려주고 있을지도. 모나크 나비의 이동이 스펙타클하게 관심을 끌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이동이 철새 떼처럼 웅장하게 보이지 않고 수백 마리가 뭉쳐 작은 포도송이 단위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 유화나무 꼭대기에 매달려 있어 육안으로 관찰 하기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차가운 바람과 비에 모나크 나비가 대단히 약하다. 그래서 따듯한 날이 아니면 왕처럼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날아가는 나비를 보기가 쉽지 않다. 패시픽 그로브에 가장 많이 온 것은 1951~1952으로 약 1백만 마리였다는 풍문도 있으나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는 없다. 현재 패시픽 그로브외에 모나크 나비 있는 지역으로는 산타크루즈, 피스모 비치, 멀리 산타바바라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패시픽 그로브지역에서 해마다 10월 첫째 주 토요일을 모나크 나비 기념일로 정하여 butterfly parade 행사를 하고 있다. 모나크 나비의 홈 커밍(home coming)을 환영하는 뜻이다.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패시픽 그로브를 모나크 나비 보호구역(butterfly sanctuary)으로 정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모나크 나비를 잡거나 소음으로 방해할 경우 5백 달러의 벌금을 부과하고 있다. 오는 2~3월이 오면 모나크 나비의 여정은 다시 시작될 것이다. 암컷 모나크 나비가 모두 떠나고 수컷만 남아 자신의 수명까지 살다가 죽게 된다. 이번 모나크 나비를 취재하면서 관심 있었던 사람들로부터 정보를 받을 수 있었다. 특히 모나크 나비가 서식하고 있는 패시픽 그로브에서 Butterfly Grove Inn을 운영하는 에릭 박선생님이 주신 사진과 정보에 다시 한번 지면을 통해 감사 드리며 그 외 협조해 주신 다른 분들에게도 같은 뜻을 전해 드린다. 날씨 좋은날 왕나비들이 떠나기 전에 꼭 알현을 해야 되겠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김동열 드림 / 미주주간현대 (dyk47@yahoo.com)
2009-01-03 사랑의 빚
새해를 맞으며 기대하고 계획하는 일들이 많지만 지나간 일들을 아쉬워하게 된다. 얼마전 한 작가가 옛 것은 잊어야 하나라는 질문을 던지며 돌아가신 아버지가 애용하던 향수를 찾아 헤맨 이야기를 적은 기사를 보았다. 망각은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하지만 옛 것이라고 다 보내고 다 잊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간혹 가다 옛 사람 옛 것을 추억하며 센티멘탈할 수 있는 순간도 있어 인생이 더 풍요해 지는 것 같다. 아버지의 마지막 생신에 아버지가 과거 애용하시던, 더 이상 팔지 않는 향수를 드리고자 각방으로 노력하다 결국 찾지 못했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찾게 되어 그 향기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새삼 발견했다는 글을 보며 떠오른 것은 모리츠 (Moritz) 라는 식당이다. 이 식당은 내 대학 시절의 추억이 많이 담겨 있는 곳이다. 대학가 콘도 빌딩 1층에 있는 식당이었는데 로컬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돌아가면서 전시하고 한 켠에서는 누군가 늘 기타를 치며 노래를 했는데 비틀즈 노래를 많이 연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떤 음식이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당시 외식 경험이 별로 없던 나에게는 그 식당에 가는 것이 마치 세상에서 가장 고급스럽고 우아한 곳에 가는 것 같은 행복감을 주었었다. 이 식당을 내게 처음 소개해준 사람은 애칭이 디디 (Dee Dee) 라는 대학 선배였다. 고등학교 여름 방학때 불어 연수를 갔다가 만난 몇살위의 멋쟁이였는데, 사교적으로 서투른 내가 안 되어 보였는지 친 언니처럼 보살펴 주었었다. 나중에 내가 본인이 다니는 대학에 지망하게 된 것을 알고 대학 방문을 갔을때 이 모리츠라는 식당에서 저녁을 사주었었다. 디디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멈추고 돌아볼 만한 미인이었는데다 머리도 아주 좋아 나는 늘 그녀에게 감탄했었다.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는 것 같은 디디가 좋아하고 소개해준 식당이라 모리츠는 내게 특별한 곳이 되었던 것 같다.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은 디디는 사실 근육이 후퇴하는 불치병을 앓고 있었다. 유전병이라 친척중 두명이 그 병으로 죽었고 본인도 휴학을 하기도 하고 물리 치료등을 받으며 늘 병과 싸우고 있었다. 당장 몇년안에 죽을 병은 아니었지만 언제 악화될 지 몰라 미래를 계획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디디는 그런 중에도 늘 무엇인가 내게 베풀어 주고 새로운 경험을 주려고 했는데 나는 아직 사회 물정이나 대인 관계에 대한 경험이 부족해 고마워 하면서도 감사의 표현조차 제대로 못했었다. 오히려 그녀에게 짐이 되었던 적이 많은 것 같다. 디디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녀의 결혼식이었다. 의대생과 사귀고 있었는데 건강때문에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으려고 하다 결혼에 이르렀고 다른 도시로 이사간 후 아이를 낳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기적적으로 아이를 낳았다는 카드까지 받았었다. 이후 서로 이사를 거듭하다 연락처를 잃게 되고 그녀의 소식도 끊겼다. 그녀를 찾아 보려고 의사 디렉토리로 남편이름을 찾아 보기도 했는데 연락처를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대학을 다시 방문할 일이 있을때 마다 찾아 가던 모리츠 또한 어느날 연락해 보니 문을 닫았다. 대학 시절의 추억을 되살려주던 모리츠에 대한 아쉬움보다 더 큰 것은 디디 처럼 내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었던 이들에게 진 사랑의 빚을 더 이상 갚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개중에는 아직도 연락이 되고 감사의 표현을 할 수 있는 이들도 있지만 너무 많은 이들과 찾아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세월이 가면서 사랑의 빚의 무게도 더 늘고 있다. 억울했던 일을 해결하지 못한 마음의 분은 시간이 가면 잊혀 지는데 사랑을 받고 미처 보답하지 못한 미안함은 시간이 갈수록 커진다. 그분들을 찾아 볼 수 있는 확률이, 이제 와서 제대로 감사를 표현할 만한 방법을 찾을 확률이 점점 더 줄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올 겨울에는 감사한 분들에게 더 늦기 전에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또 새해에는 직접 갚지 못한 사랑의 빚을 간접적으로 라도 갚을 수 있는 길을 찾아 보고자 한다. 그래야 디디를 추억할 때 미안함 보다 고마움이 더 클 것 같다. Copyright© Judy J. Chang, Esq. All rights reserved. 기사에 대한 의견은 글쓴이에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쥬디 장 변호사, J Global Law Group. T: 650-856-2500; www.jgloballaw.com)
새해를 맞으며 기대하고 계획하는 일들이 많지만 지나간 일들을 아쉬워하게 된다. 얼마전 한 작가가 옛 것은 잊어야 하나라는 질문을 던지며 돌아가신 아버지가 애용하던 향수를 찾아 헤맨 이야기를 적은 기사를 보았다. 망각은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하지만 옛 것이라고 다 보내고 다 잊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간혹 가다 옛 사람 옛 것을 추억하며 센티멘탈할 수 있는 순간도 있어 인생이 더 풍요해 지는 것 같다. 아버지의 마지막 생신에 아버지가 과거 애용하시던, 더 이상 팔지 않는 향수를 드리고자 각방으로 노력하다 결국 찾지 못했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찾게 되어 그 향기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새삼 발견했다는 글을 보며 떠오른 것은 모리츠 (Moritz) 라는 식당이다. 이 식당은 내 대학 시절의 추억이 많이 담겨 있는 곳이다. 대학가 콘도 빌딩 1층에 있는 식당이었는데 로컬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돌아가면서 전시하고 한 켠에서는 누군가 늘 기타를 치며 노래를 했는데 비틀즈 노래를 많이 연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떤 음식이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당시 외식 경험이 별로 없던 나에게는 그 식당에 가는 것이 마치 세상에서 가장 고급스럽고 우아한 곳에 가는 것 같은 행복감을 주었었다. 이 식당을 내게 처음 소개해준 사람은 애칭이 디디 (Dee Dee) 라는 대학 선배였다. 고등학교 여름 방학때 불어 연수를 갔다가 만난 몇살위의 멋쟁이였는데, 사교적으로 서투른 내가 안 되어 보였는지 친 언니처럼 보살펴 주었었다. 나중에 내가 본인이 다니는 대학에 지망하게 된 것을 알고 대학 방문을 갔을때 이 모리츠라는 식당에서 저녁을 사주었었다. 디디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멈추고 돌아볼 만한 미인이었는데다 머리도 아주 좋아 나는 늘 그녀에게 감탄했었다.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는 것 같은 디디가 좋아하고 소개해준 식당이라 모리츠는 내게 특별한 곳이 되었던 것 같다.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은 디디는 사실 근육이 후퇴하는 불치병을 앓고 있었다. 유전병이라 친척중 두명이 그 병으로 죽었고 본인도 휴학을 하기도 하고 물리 치료등을 받으며 늘 병과 싸우고 있었다. 당장 몇년안에 죽을 병은 아니었지만 언제 악화될 지 몰라 미래를 계획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디디는 그런 중에도 늘 무엇인가 내게 베풀어 주고 새로운 경험을 주려고 했는데 나는 아직 사회 물정이나 대인 관계에 대한 경험이 부족해 고마워 하면서도 감사의 표현조차 제대로 못했었다. 오히려 그녀에게 짐이 되었던 적이 많은 것 같다. 디디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녀의 결혼식이었다. 의대생과 사귀고 있었는데 건강때문에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으려고 하다 결혼에 이르렀고 다른 도시로 이사간 후 아이를 낳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기적적으로 아이를 낳았다는 카드까지 받았었다. 이후 서로 이사를 거듭하다 연락처를 잃게 되고 그녀의 소식도 끊겼다. 그녀를 찾아 보려고 의사 디렉토리로 남편이름을 찾아 보기도 했는데 연락처를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대학을 다시 방문할 일이 있을때 마다 찾아 가던 모리츠 또한 어느날 연락해 보니 문을 닫았다. 대학 시절의 추억을 되살려주던 모리츠에 대한 아쉬움보다 더 큰 것은 디디 처럼 내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었던 이들에게 진 사랑의 빚을 더 이상 갚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개중에는 아직도 연락이 되고 감사의 표현을 할 수 있는 이들도 있지만 너무 많은 이들과 찾아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세월이 가면서 사랑의 빚의 무게도 더 늘고 있다. 억울했던 일을 해결하지 못한 마음의 분은 시간이 가면 잊혀 지는데 사랑을 받고 미처 보답하지 못한 미안함은 시간이 갈수록 커진다. 그분들을 찾아 볼 수 있는 확률이, 이제 와서 제대로 감사를 표현할 만한 방법을 찾을 확률이 점점 더 줄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올 겨울에는 감사한 분들에게 더 늦기 전에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또 새해에는 직접 갚지 못한 사랑의 빚을 간접적으로 라도 갚을 수 있는 길을 찾아 보고자 한다. 그래야 디디를 추억할 때 미안함 보다 고마움이 더 클 것 같다. Copyright© Judy J. Chang, Esq. All rights reserved. 기사에 대한 의견은 글쓴이에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쥬디 장 변호사, J Global Law Group. T: 650-856-2500; www.jgloballaw.com)
2008-12-05 [베이포럼] 블랙 프라이데이
불경기 속에 모두가 어렵다고 한다. 요즘 장사가 잘 된다는 사람은 ‘역적’이라고 할 만큼 경기가 침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주 추수감사절이 있었다. 미국인들은 터키고기 먹는 날이기 보다 그 다음날 블랙 프라이데이(Black Friday)에 녹아져 있었다. 왜냐하면 그 날이 일년 중 가장 바쁜 쇼핑데이로 알려져 있을뿐더러, 그 날 매출이 얼마를 기록했느냐에 따라 크리스마스 전체 경기를 가름하는 바로미터가 되기 때문이다. 올해는 금융시장의 신용경색으로 저조한 실적을 예상 했으나 의외로 작년 매출 1백3억 달러를 돌파한 1백6억 달러를 3일 동안 기록해 경제전문가들을 놀라게 했다. 일단은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 들이고 있지만 여전히 조심스럽게 관망하고 있는 실정이다. 글로벌 신용경색 쓰나미를 불러 있으킨 미국 발 서프라임 융자는 아직까지 바닥을 쳤다는 보도가 나오지 않고 있어 언제까지 부실 주택융자 뒷처리에 공적 자금을 투입해야 할지 아무도 모른다. 부시정부는 불투명한 경기전망에 뚜렸한 대책을 아직까지 내놓지 못하고 있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금융기관과 채권회사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부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내일까지 생각하기 힘든 현실의 국민은 멀지 않은 후일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올 엄청난 빚부담을 생각할 여유도 없이 돈만 풀라고 소리치고 있다. 재무부가 이미 7천억 달러를 퍼 붓기 시작했으며, 이어서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도 8천억 달러에 가까운 공적 자금을 쏠 준비를 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돈을 퍼부어 미국경제를 살리겠다고 하는데 실제 소비자에게 얼마만큼 혜택이 올지 궁금증을 더하고 있다. 은행은 이런 저런 뭉칫돈으로 넘쳐 나는데 정작 밑으로 흐르지 않고 있다. 아무리 대통령이 돈을 풀라고 해도 은행은 끔적도 하지 않는다. 결국 정부로부터 공적 자금은 받은 은행들이 가계 융자를 외면한 채 배째라고 내밀고 있다. 경기부양책으로 도로와 다리를 고치고 공공사업을 일으켜 돈을 풀겠다고 하원의장 낸시 펠로시가 지난 의회에서 주장했지만 찬, 반이 맞서 아직까지 결론을 못 내고 있다. 지난 총선에서 의회를 완전히 장악한 민주당은 천문학적인 공적자금 투여에 못마땅한 야당 공화당 반대보다 자체 분열이 더욱 어렵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민주당내에서 경기회복에 대한 방안을 놓고 저마다 다른 목소리를 내 시급한 정책수립이 용이치 않다고 한다. 민주당내 분열의 가장 큰 이유는 저마다 자기 선거구 입장을 먼저 처리하려는 지역 이기주의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경제가 나쁘다 보니 시급한 국가 경제회복보다 실적이 나는 자신의 선거구 경기회복이 더 시급한 것이다. 결국 작은 것을 욕심 내 큰 것을 잃을 판이다. 오바마 경제팀 오바마 당선자가 새로이 경제팀을 구성했다. 미국 최고의 인재로 구성된 드림 팀이라고 할 만큼 초호화판 오바마 경제팀은 이미 최악의 경제상태에서 탈출하기 위해 여러가지 방안을 강구하고 있으나 지름길이 없다고 한다. 결국 기업부도와 직장감원 및 주택차압을 피하기는 힘들다는 뜻이다. 노숙자가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국민들이 받을 고통에 대한 우려에 공감하지만 방법이 여의치 않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 사람들은 연말연시 홀리데이 시즌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일년 중 가족들이 모이는 특별한 날이기에 이 기간 중 감원은 피하자는 전통이 있다. 그래서 아직 구조조정을 하지 않은 기업의 직원들은 다가오는 신년이 더욱 무섭다고 한다. 이미 일부 대기업은 구조조정을 시작했지만 내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피를 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직장인은 내년 6월까지 구조조정만 면하면 일단 고비를 넘길 것이라는 시간표도 나왔다. 기업도 6월까지 살아나면 더 이상 경기악화는 면할 수 있다는 뜻이다. 큰 기업이 현금확보에 사활을 걸었다는 말도 6월까지 견디자는 뜻과 동일하다. 동포사회의 경기도 미 주류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전망하나 그 동안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온 만큼 미국사람보다 맷집은 더 좋다고 한다. 그 이유는 미국경제가 아무리 좋아도 동포사회 경기는 그날이 그날이었던 관계로 불경기에 상당히 익숙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리고 동포사회의 특수성 즉 혈연과 지연, 학연 등으로 상부상조하는 보호막이 그런대로 형성되어 있다는 점도 어려운 때 효력을 발휘한다. 불경기를 이기는 방법으로 전문가들은 몸을 가볍게 하라고 한다. 털어 버릴 것은 가급적 빨리 털어야 장거리를 뛸 수 있다는 뜻이다. 블랙프라이데이 매상이 예상을 뛰는 긍정적인 수치가 나오고, 오바마 경제팀이 머리를 짜내고 있다니 좋은 때가 올 것이라는 소망의 끈 만큼은 놓지 말아야 한다. 어떻게 내년 6월까지 잘 견디는 지혜라도 전수 받았으면 좋겠다. (dyk47@yahoo.com)
불경기 속에 모두가 어렵다고 한다. 요즘 장사가 잘 된다는 사람은 ‘역적’이라고 할 만큼 경기가 침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주 추수감사절이 있었다. 미국인들은 터키고기 먹는 날이기 보다 그 다음날 블랙 프라이데이(Black Friday)에 녹아져 있었다. 왜냐하면 그 날이 일년 중 가장 바쁜 쇼핑데이로 알려져 있을뿐더러, 그 날 매출이 얼마를 기록했느냐에 따라 크리스마스 전체 경기를 가름하는 바로미터가 되기 때문이다. 올해는 금융시장의 신용경색으로 저조한 실적을 예상 했으나 의외로 작년 매출 1백3억 달러를 돌파한 1백6억 달러를 3일 동안 기록해 경제전문가들을 놀라게 했다. 일단은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 들이고 있지만 여전히 조심스럽게 관망하고 있는 실정이다. 글로벌 신용경색 쓰나미를 불러 있으킨 미국 발 서프라임 융자는 아직까지 바닥을 쳤다는 보도가 나오지 않고 있어 언제까지 부실 주택융자 뒷처리에 공적 자금을 투입해야 할지 아무도 모른다. 부시정부는 불투명한 경기전망에 뚜렸한 대책을 아직까지 내놓지 못하고 있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금융기관과 채권회사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부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내일까지 생각하기 힘든 현실의 국민은 멀지 않은 후일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올 엄청난 빚부담을 생각할 여유도 없이 돈만 풀라고 소리치고 있다. 재무부가 이미 7천억 달러를 퍼 붓기 시작했으며, 이어서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도 8천억 달러에 가까운 공적 자금을 쏠 준비를 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돈을 퍼부어 미국경제를 살리겠다고 하는데 실제 소비자에게 얼마만큼 혜택이 올지 궁금증을 더하고 있다. 은행은 이런 저런 뭉칫돈으로 넘쳐 나는데 정작 밑으로 흐르지 않고 있다. 아무리 대통령이 돈을 풀라고 해도 은행은 끔적도 하지 않는다. 결국 정부로부터 공적 자금은 받은 은행들이 가계 융자를 외면한 채 배째라고 내밀고 있다. 경기부양책으로 도로와 다리를 고치고 공공사업을 일으켜 돈을 풀겠다고 하원의장 낸시 펠로시가 지난 의회에서 주장했지만 찬, 반이 맞서 아직까지 결론을 못 내고 있다. 지난 총선에서 의회를 완전히 장악한 민주당은 천문학적인 공적자금 투여에 못마땅한 야당 공화당 반대보다 자체 분열이 더욱 어렵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민주당내에서 경기회복에 대한 방안을 놓고 저마다 다른 목소리를 내 시급한 정책수립이 용이치 않다고 한다. 민주당내 분열의 가장 큰 이유는 저마다 자기 선거구 입장을 먼저 처리하려는 지역 이기주의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경제가 나쁘다 보니 시급한 국가 경제회복보다 실적이 나는 자신의 선거구 경기회복이 더 시급한 것이다. 결국 작은 것을 욕심 내 큰 것을 잃을 판이다. 오바마 경제팀 오바마 당선자가 새로이 경제팀을 구성했다. 미국 최고의 인재로 구성된 드림 팀이라고 할 만큼 초호화판 오바마 경제팀은 이미 최악의 경제상태에서 탈출하기 위해 여러가지 방안을 강구하고 있으나 지름길이 없다고 한다. 결국 기업부도와 직장감원 및 주택차압을 피하기는 힘들다는 뜻이다. 노숙자가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국민들이 받을 고통에 대한 우려에 공감하지만 방법이 여의치 않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 사람들은 연말연시 홀리데이 시즌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일년 중 가족들이 모이는 특별한 날이기에 이 기간 중 감원은 피하자는 전통이 있다. 그래서 아직 구조조정을 하지 않은 기업의 직원들은 다가오는 신년이 더욱 무섭다고 한다. 이미 일부 대기업은 구조조정을 시작했지만 내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피를 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직장인은 내년 6월까지 구조조정만 면하면 일단 고비를 넘길 것이라는 시간표도 나왔다. 기업도 6월까지 살아나면 더 이상 경기악화는 면할 수 있다는 뜻이다. 큰 기업이 현금확보에 사활을 걸었다는 말도 6월까지 견디자는 뜻과 동일하다. 동포사회의 경기도 미 주류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전망하나 그 동안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온 만큼 미국사람보다 맷집은 더 좋다고 한다. 그 이유는 미국경제가 아무리 좋아도 동포사회 경기는 그날이 그날이었던 관계로 불경기에 상당히 익숙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리고 동포사회의 특수성 즉 혈연과 지연, 학연 등으로 상부상조하는 보호막이 그런대로 형성되어 있다는 점도 어려운 때 효력을 발휘한다. 불경기를 이기는 방법으로 전문가들은 몸을 가볍게 하라고 한다. 털어 버릴 것은 가급적 빨리 털어야 장거리를 뛸 수 있다는 뜻이다. 블랙프라이데이 매상이 예상을 뛰는 긍정적인 수치가 나오고, 오바마 경제팀이 머리를 짜내고 있다니 좋은 때가 올 것이라는 소망의 끈 만큼은 놓지 말아야 한다. 어떻게 내년 6월까지 잘 견디는 지혜라도 전수 받았으면 좋겠다. (dyk47@yahoo.com)
2008-11-02 환상적인 가을여행 (June Lake 가는 길)
SFKorean에 `등대` 아이디를 사용하시는 분이 주말여행을 다녀오시고 자유게시판에 올려준 글입니다. 지난 주말인 토요일... 시월도 막바지인데 너무 좋은 날씨에 무작정 길을 나섰다. Sonora 쪽으로 길을 잡았는데 드라이브 코스로는 좋은 것 같지만 우리가 원하던 가을경치는 별로라 Eastern Sierra 지역인 US 395번을 따라 가보기로 했다. 120번을 따라 요세미티를 가로질러 가는 길이 빠른 것 같았지만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 Sonora Pass쪽인108번을 택했다. 깊은 산속으로 구비구비 흐르는 계곡따라 노란색의 아스펜과 송어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아침 햇살에 비치는 노란색잎들이 투명하게 맑아 눈이 부시게 화려하게 보이기도... 가을은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한가로운 목장의 아침 풍경에도... 드넓게 펼쳐진 평원에도... 이미 떨어져버린 나뭇잎으로 드러난 가지들의 앙상한 모습조차도 내눈엔 그저 아름답게만 보였다. 사실 10월 초에 가려고 했었지만 눈이 온다는 정보에 포기했었는데 그때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고 군데군데 쌓여 있었다. 가을 들꽃의 아름다운 모습... Leavitt Meadows and the West Walker River 의 광활한 모습... 역시 눈보다 좋은 카메라는 없는 듯 눈으로 보이는 느낌을 카메라에 담을 수가 없어 아쉽다. 기기묘묘한 바위들의 형상도 신기했지만 한국의 불상같은(?) 모습의 바위를 발견하기도... Mono Lake 이 멀리 내려다 보이는 Vista Point... 엷은 안개가 펴져있어 선명하지는 않은데 이곳은 동틀 무렵에 찍은 사진들이 좋다고 한다. 이 호수는 화산활동에 의해 75만-100만년전에 생성된 것으로 북미 대륙에서 오래된 호수 중 하나이며 65 평방마일에 달하는 크기이다.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물줄기가 들어오지만 뜨거운 사막기후로 인해 물이 증발되며 소금, 미네랄등만 침전되는 상태로 바닷물 5배의 염분과 알칼리 함유량으로 인해 물고기같은 생물이 서식할 수 없으며 특별한 종류의 brine 새우가 지구상에서 이곳에만 살고 있다고 한다. 바람이 있는 날에는 파도가 심하다는데 이 날은 너무 잔잔하여 거울같은 수면위에 비친 산그림자가 더 고즈넉한 느낌이다. Mono Lake 을 지나 남쪽으로 가는 길... 계곡의 능선을 따라 노란잎의 나무들이 무리지어 있는 모습. Grant Lake 을 끼고 돌아가는 길... 크고 작은 호수들이 많아서 더욱 아름다운 길인 것 같다. Silver Lake 쪽으로 가는 길... 구비구비 길을 돌아 나올 때마다 더욱 아름다운 풍경이 나타나고... 또 다른 아름다움에 탄성이 절로 나오기도 한다. 차를 세울만한 곳에는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저마다 좋은 경치를 놓치지 않으려고 카메라에 담기 바쁘다. 너무나 아름다운 Gull Lake... 낚시를 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높은 산의 만년설이 녹아내린 맑은 호수의 정경... 좋은 날씨와 맑은 공기, 그리고 북적이는 인파도 별로 없는 호젓한 산속의 호숫가를 달리는 기분을 만끽하며... 그림같은 풍경... June Lake... 노란색의 나뭇잎뒤로 햇살 비친 은빛 물결의 파란 호수가 더욱 잔잔해 보이고... June Lake 주변에 Gull Lake, Silver Lake, Pyramid Lake, Grant Lake 등 크고 작은 호수들이 주위에 많아 관광객들의 레저시설이 잘되어 있다고 한다. 노란 단풍물결과 호수들의 푸른 옥수의 물 빛깔... 시골 마을의 한적한 풍경은 한폭의 그림과 같았다. 신이 만들어 준 자연에 감사하며 서둘러 돌아 나오는 길...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는 108번... 길을 살짝 잘못들어 잠시 헤매던 중에 벌써 캄캄해져서 9624 feet 의 고산준봉을 넘어 올 때는 차안에서도 약간 무서움증이... 그러나 바로 머리위에서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 여태 그렇게 선명한 빛깔로 쏟아지는 은하수를 본 기억이 없다. '아, 너무 좋다!' 더 이상의 무슨 말이 필요할까...? *** 사진은 '캐논 EOS'(DSLR) 와 일명 똑딱이라고 하는 디카로 찍은 것임 등대님이 자유게시판에 쓰신글
SFKorean에 `등대` 아이디를 사용하시는 분이 주말여행을 다녀오시고 자유게시판에 올려준 글입니다. 지난 주말인 토요일... 시월도 막바지인데 너무 좋은 날씨에 무작정 길을 나섰다. Sonora 쪽으로 길을 잡았는데 드라이브 코스로는 좋은 것 같지만 우리가 원하던 가을경치는 별로라 Eastern Sierra 지역인 US 395번을 따라 가보기로 했다. 120번을 따라 요세미티를 가로질러 가는 길이 빠른 것 같았지만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 Sonora Pass쪽인108번을 택했다. 깊은 산속으로 구비구비 흐르는 계곡따라 노란색의 아스펜과 송어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아침 햇살에 비치는 노란색잎들이 투명하게 맑아 눈이 부시게 화려하게 보이기도... 가을은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한가로운 목장의 아침 풍경에도... 드넓게 펼쳐진 평원에도... 이미 떨어져버린 나뭇잎으로 드러난 가지들의 앙상한 모습조차도 내눈엔 그저 아름답게만 보였다. 사실 10월 초에 가려고 했었지만 눈이 온다는 정보에 포기했었는데 그때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고 군데군데 쌓여 있었다. 가을 들꽃의 아름다운 모습... Leavitt Meadows and the West Walker River 의 광활한 모습... 역시 눈보다 좋은 카메라는 없는 듯 눈으로 보이는 느낌을 카메라에 담을 수가 없어 아쉽다. 기기묘묘한 바위들의 형상도 신기했지만 한국의 불상같은(?) 모습의 바위를 발견하기도... Mono Lake 이 멀리 내려다 보이는 Vista Point... 엷은 안개가 펴져있어 선명하지는 않은데 이곳은 동틀 무렵에 찍은 사진들이 좋다고 한다. 이 호수는 화산활동에 의해 75만-100만년전에 생성된 것으로 북미 대륙에서 오래된 호수 중 하나이며 65 평방마일에 달하는 크기이다.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물줄기가 들어오지만 뜨거운 사막기후로 인해 물이 증발되며 소금, 미네랄등만 침전되는 상태로 바닷물 5배의 염분과 알칼리 함유량으로 인해 물고기같은 생물이 서식할 수 없으며 특별한 종류의 brine 새우가 지구상에서 이곳에만 살고 있다고 한다. 바람이 있는 날에는 파도가 심하다는데 이 날은 너무 잔잔하여 거울같은 수면위에 비친 산그림자가 더 고즈넉한 느낌이다. Mono Lake 을 지나 남쪽으로 가는 길... 계곡의 능선을 따라 노란잎의 나무들이 무리지어 있는 모습. Grant Lake 을 끼고 돌아가는 길... 크고 작은 호수들이 많아서 더욱 아름다운 길인 것 같다. Silver Lake 쪽으로 가는 길... 구비구비 길을 돌아 나올 때마다 더욱 아름다운 풍경이 나타나고... 또 다른 아름다움에 탄성이 절로 나오기도 한다. 차를 세울만한 곳에는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저마다 좋은 경치를 놓치지 않으려고 카메라에 담기 바쁘다. 너무나 아름다운 Gull Lake... 낚시를 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높은 산의 만년설이 녹아내린 맑은 호수의 정경... 좋은 날씨와 맑은 공기, 그리고 북적이는 인파도 별로 없는 호젓한 산속의 호숫가를 달리는 기분을 만끽하며... 그림같은 풍경... June Lake... 노란색의 나뭇잎뒤로 햇살 비친 은빛 물결의 파란 호수가 더욱 잔잔해 보이고... June Lake 주변에 Gull Lake, Silver Lake, Pyramid Lake, Grant Lake 등 크고 작은 호수들이 주위에 많아 관광객들의 레저시설이 잘되어 있다고 한다. 노란 단풍물결과 호수들의 푸른 옥수의 물 빛깔... 시골 마을의 한적한 풍경은 한폭의 그림과 같았다. 신이 만들어 준 자연에 감사하며 서둘러 돌아 나오는 길...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는 108번... 길을 살짝 잘못들어 잠시 헤매던 중에 벌써 캄캄해져서 9624 feet 의 고산준봉을 넘어 올 때는 차안에서도 약간 무서움증이... 그러나 바로 머리위에서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 여태 그렇게 선명한 빛깔로 쏟아지는 은하수를 본 기억이 없다. '아, 너무 좋다!' 더 이상의 무슨 말이 필요할까...? *** 사진은 '캐논 EOS'(DSLR) 와 일명 똑딱이라고 하는 디카로 찍은 것임 등대님이 자유게시판에 쓰신글
2008-10-24 사라 페일린 (Sarah Palin) 과 신여성상
미국 대통령 선거가 코앞이다. 선거의 결과를 떠나 이번 선거 유세에서 흥미로왔던 점은 부통령 후보인 사라 페일린과 그녀에 대한 대중의 반응이었다. 사라 페일린은 보통 우리가 보아온 지도자급 여성들과 달리 대학원을 가지도 않았고, 어려서 결혼해 젊은나이에 아이가 다섯이고, 페미니스트들이 우스개거리로 생각하는 미인대회 출신인데다, 지성인들이 반대하는 사냥을 즐기고 신앙에 대해 거리낌없이 솔직하다. 사라 페일린의 등장으로 다시 선거에 관심을 갖게된 이들이 있는가 하면 인터넷과 TV 신문 지상에는 인신 모독에 가까운 평가도 눈에 자주 띈다. 정치적 엘리트 주의자들이 많다는 워싱턴, 뉴욕, 실리콘 밸리, 헐리우드에서는 사라 페일린이 ‘너무 평범하다’ (즉 본인보다 무식하다), ‘알라스카에서나 통했다’ (본인이 사는 곳과 상대않되는 시골 출신이다), ‘예쁜척한다’ (똑똑한 여자들은 외모에 신경쓰지 않는다) 등의 표현을 쉽게 듣는다. 여성의 부통령 후보 등장을 축하하며 약자에 대해 공평해야할 페미니스트들이 더 비판적인 모습을 보며, 같은 여자의 편을 들면 약해보일까 걱정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아이러니와 평균 페미니스트보다 보수적인 의견을 갖은 여성을 비하하는 편협함을 보았다. 사라 페일린이 홍보하는 정치적 견해는 내 개인의 생각과 많이 다르다. 그녀의 인생 이야기는 내가 아는 누구의 인생 방식과도 같지 않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등장이 신선했다. 경험은 없고 욕심이 앞선다는 평도 있지만 2005년에 상원의원이 되어 자서전을 두개나 내는 동안 별다른 입법 활동이 없었던 오바마 상원의원보다 경험이 모자라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후보로서 모자라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이렇게 다 할 수 있는 여성도 있다는 생각에 개인적으로 도전을 받았었다. 불만이 있다면 성공적인 여성의 기준을 다섯명의 아이들을 낳고 기르며 한 주의 주지사로서의 역할까지 잘 감당하는 수퍼 우먼의 수준으로 올렸다는 것에 있다. 내 시대의 여성들은 커리어와 가정을 둘 다 성공시키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며 자랐다. 아니 어쩌면 나 혼자의 생각일 수 있으나, 마치 우물은 하나만 파야 한다는 기분으로 가정과 커리어 둘중에 하나를 선택하거나 아니면 둘다 제대로 할 수 없다는 부담을 늘 지고 살아 왔다. 그래서 일에 파묻혀 밤낮없이 일하는 것이 생활의 밸런스를 깨는 행동이 아니라 당연한 선택이라고 느끼고 만족해 했고, 아이 하나 키우는 것만도 벅차고 감사해서 더 큰 가족생활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그런 생각이 마치 바다로 수영을 나가기 전 파도가 너무 세니 나는 수영장에서만 수영을 하는 것이 더 좋다고 미리 포기해 버리는 것과 매한가지 아닐까? 그동안 나 자신을 상자안에 가두며 살아 온것은 아닌가 사라 페일린을 통해 돌아보게 된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열심히 전진해야 겠다는 생각이 어느 순간부터 희생없이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는 ‘희생’에 대한 강조가 되지 않았는가 돌아 보게 된다. 사라 페일린의 인생 이야기를 보며, 수퍼 우먼 보다는 굴레에서 벗어난 여성상을 얻고 싶다. 좀 더 현실을 벗어난 가능성을 꿈꾸고 조금 덜 혼자 하려는 완벽 주의를 버린 여성상을 떠올린다. 죄책감 없이 순간의 즐거움을 누리고, 약해 보인다는 두려움 없이 도움을 요청할 줄 알고, 패배를 두려워 하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을 시도하는 여성상을 그려본다. 또 힐러리 클린튼과 사라 페일린의 선거 운동 동안 비록 공인이더라도 인격체인 한 사람을 너무 쉽게 비하하는 풍조를 보며, 나와 다른 모습의 생활을 사는 사람에 대한 관심과 이해, 나와 다른 가치관을 선택한 이들에 대한 존중이 넘쳐나는 커뮤니티도 꿈꾸어 본다. Copyright© Judy J. Chang, Esq. All rights reserved. 기사에 대한 의견은 글쓴이에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쥬디 장 변호사, J Global Law Group. T: 650-856-2500; www.jgloballaw.com)
미국 대통령 선거가 코앞이다. 선거의 결과를 떠나 이번 선거 유세에서 흥미로왔던 점은 부통령 후보인 사라 페일린과 그녀에 대한 대중의 반응이었다. 사라 페일린은 보통 우리가 보아온 지도자급 여성들과 달리 대학원을 가지도 않았고, 어려서 결혼해 젊은나이에 아이가 다섯이고, 페미니스트들이 우스개거리로 생각하는 미인대회 출신인데다, 지성인들이 반대하는 사냥을 즐기고 신앙에 대해 거리낌없이 솔직하다. 사라 페일린의 등장으로 다시 선거에 관심을 갖게된 이들이 있는가 하면 인터넷과 TV 신문 지상에는 인신 모독에 가까운 평가도 눈에 자주 띈다. 정치적 엘리트 주의자들이 많다는 워싱턴, 뉴욕, 실리콘 밸리, 헐리우드에서는 사라 페일린이 ‘너무 평범하다’ (즉 본인보다 무식하다), ‘알라스카에서나 통했다’ (본인이 사는 곳과 상대않되는 시골 출신이다), ‘예쁜척한다’ (똑똑한 여자들은 외모에 신경쓰지 않는다) 등의 표현을 쉽게 듣는다. 여성의 부통령 후보 등장을 축하하며 약자에 대해 공평해야할 페미니스트들이 더 비판적인 모습을 보며, 같은 여자의 편을 들면 약해보일까 걱정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아이러니와 평균 페미니스트보다 보수적인 의견을 갖은 여성을 비하하는 편협함을 보았다. 사라 페일린이 홍보하는 정치적 견해는 내 개인의 생각과 많이 다르다. 그녀의 인생 이야기는 내가 아는 누구의 인생 방식과도 같지 않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등장이 신선했다. 경험은 없고 욕심이 앞선다는 평도 있지만 2005년에 상원의원이 되어 자서전을 두개나 내는 동안 별다른 입법 활동이 없었던 오바마 상원의원보다 경험이 모자라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후보로서 모자라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이렇게 다 할 수 있는 여성도 있다는 생각에 개인적으로 도전을 받았었다. 불만이 있다면 성공적인 여성의 기준을 다섯명의 아이들을 낳고 기르며 한 주의 주지사로서의 역할까지 잘 감당하는 수퍼 우먼의 수준으로 올렸다는 것에 있다. 내 시대의 여성들은 커리어와 가정을 둘 다 성공시키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며 자랐다. 아니 어쩌면 나 혼자의 생각일 수 있으나, 마치 우물은 하나만 파야 한다는 기분으로 가정과 커리어 둘중에 하나를 선택하거나 아니면 둘다 제대로 할 수 없다는 부담을 늘 지고 살아 왔다. 그래서 일에 파묻혀 밤낮없이 일하는 것이 생활의 밸런스를 깨는 행동이 아니라 당연한 선택이라고 느끼고 만족해 했고, 아이 하나 키우는 것만도 벅차고 감사해서 더 큰 가족생활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그런 생각이 마치 바다로 수영을 나가기 전 파도가 너무 세니 나는 수영장에서만 수영을 하는 것이 더 좋다고 미리 포기해 버리는 것과 매한가지 아닐까? 그동안 나 자신을 상자안에 가두며 살아 온것은 아닌가 사라 페일린을 통해 돌아보게 된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열심히 전진해야 겠다는 생각이 어느 순간부터 희생없이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는 ‘희생’에 대한 강조가 되지 않았는가 돌아 보게 된다. 사라 페일린의 인생 이야기를 보며, 수퍼 우먼 보다는 굴레에서 벗어난 여성상을 얻고 싶다. 좀 더 현실을 벗어난 가능성을 꿈꾸고 조금 덜 혼자 하려는 완벽 주의를 버린 여성상을 떠올린다. 죄책감 없이 순간의 즐거움을 누리고, 약해 보인다는 두려움 없이 도움을 요청할 줄 알고, 패배를 두려워 하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을 시도하는 여성상을 그려본다. 또 힐러리 클린튼과 사라 페일린의 선거 운동 동안 비록 공인이더라도 인격체인 한 사람을 너무 쉽게 비하하는 풍조를 보며, 나와 다른 모습의 생활을 사는 사람에 대한 관심과 이해, 나와 다른 가치관을 선택한 이들에 대한 존중이 넘쳐나는 커뮤니티도 꿈꾸어 본다. Copyright© Judy J. Chang, Esq. All rights reserved. 기사에 대한 의견은 글쓴이에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쥬디 장 변호사, J Global Law Group. T: 650-856-2500; www.jgloballaw.com)
2008-10-09 김동열 칼럼 / 최진실과 자살
지난 호 신문 편집이 마감시간보다 2시간 앞당겨 끝났다. 평상시 마감시간이 오후 5시였는데 전날 준비를 많이 한 탓인지 예정보다 빨리 끝났다. 직원들에게 고생했다면서 판을 접었는데 오후 4시가 넘어 중국인 인쇄소에서 한 직원으로부터 불길한 말을 들었다. 내일 아침에 인쇄하는 다른 한국신문에서 커버를 도로 가져갔는데 한국에 무슨 일이 일어 난 것 같다는 얘기다. 암살사건 같은 불길한 예감을 안고 인터넷을 보니 최진실 자살 사건으로 막 도배가 되기 시작했다. 최진실은 상당한 뉴스거리다. 물론 과거 대통령 암살사건에 비교할 수는 없다고 해도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는 연예인의 죽음이기 때문에 뉴스 비중은 그 만큼 크다. 모처럼 신문 편집이 일찍 끝나 그런대로 한숨을 돌리려는 순간에 찾아온 비보는 확실히 사람을 맥 빠지게 했다. 인쇄소에 커버를 바꿀 수 있느냐고 물으니 가능하지만 그 대가는 엄청났다. 이미 윤전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는데 그런 손해를 감수하겠냐는 물음에 선뜻 ‘다시 하자’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호사다마라고 할까? 매주 제 시간에 마감을 못해 인쇄소로부터 재촉을 받았는데 오늘 모처럼 마감시간을 앞당겼더니 그 결과는 큰 기사를 놓친 신문을 만든 것이다. 모든 인간지사가 그렇겠지만 자신의 노력만으로 세상일이 돌아갈 때도 있지만 불가항력적인 결과 앞에 사람의 노력은 너무나 별볼일 없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하게 했다. 너무 흔해진 자살 최진실의 자살이 있기 전 안재환이라는 젊은 연예인의 자살로 슬픔에 빠진 한국사회가 이제 겨우 안정을 찾는가 했는데 더 큰 슬픔에 빠지게 되었다. 자살의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안재환의 자살과 연관되 시달려온 사채설 악플에 분노해 음주 후 충동적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시나리오가 가장 유력하다. 세계 수준급인 한국형 인터넷 악플에 대한 시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기자도 4년 전 매주 한인 웹사이트에 글을 약 1년여 동안 올린 적이 있었다. 매주 새 글을 올리면 보통 20-30개 정도의 댓글이 따라 붙는다. 동감의 글에는 인색하고 나머지는 글과 관계없이 대부분 욕설이다. 글에 대한 정당한 비판은 찾을 수 없고 무명의 무차별 인신공격 악플로 가득하다. 댓글을 읽고 나면 마음의 평정심을 찾기가 매우 힘들다. 화가 나고, 자신에 대한 부정확한 오해나 곡해도 걱정거리가 된다. 주위에선 글을 올리지 말라고 했지만 기자는 악플에 상관치 않고 매주 글을 쓰면 꼭 올렸다. 이것은 그림자 뒤에 숨어 기생하는 어둠의 사람들과의 싸움이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런 DNA를 가진 사람들과의 다툼도 사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환자이기 때문이다. 하여튼 최진실은 자살은 너무나 진한 아쉬움을 남겼다. 기자는 최진실이 나오는 드라마를 특히 좋아했다. 그녀가 맡은 역할이 대부분 똑순이 같은 역을 할 경우가 많았다. 착한 남편과 아이들을 이끌고 나가는 억척 주부의 역을 너무나 실감 있게 잘 표현했다. 그래서 그녀가 나오는 드라마는 기다려지고 또 연기자에 대한 호감도 컸다.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가 되고 ‘evil’을 꺼꾸로 하면 ‘live’가 된다. 거꾸로 하면 뜻이 다른 것처럼 세상은 생각하기 나름이고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다. 자살이 자기의 표현하는 최후의 수단일 수도 있지만 세상을 등진 망자가 이제 무슨 결과를 들을 수 있겠나. 어느 누구라도 한번쯤은 산다는 의미도, 특별한 미련도 갖기 힘들 때가 있지만 창조주가 준 고귀한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무한한 책임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S씨의 죽음 지난달 초 우연히 S씨를 헤이워드식당 앞에서 만났다. 코가 깨진 차를 본 그는 보기 흉하니 걱정하지 말고 차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 나이도 있으니 깨끗한 옷차림처럼 깨끗한 차를 타고 다녀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의 말은 차에 무관심한 기자의 마음을 움직였다. 며칠 후 차를 가져갔다. 긴 머리에 가죽 모자가 눈에 거슬려 ‘좀 단정하게 하라’고 하니 웃으면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마침 차가 다 되었다는 전화를 받고 가니 깨끗이 면도도 하고 머리도 깔끔하게 잘랐다. 잘 했다면서 ‘다음에 점심이라도 하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그가 자신의 사무실을 보여 주면서 골동품을 수집한다고 했다. 시계도, 재봉틀도, 카메라도 보여 주며 나중에 큰 돈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좋은 취미를 가지고 있다는 말도 나누었다. 후일 골동품을 팔아 돈을 벌겠다며 생에 강한 애착심을 보였던 그가 자살을 했다니 정작 믿어지지 않는다. 왜들 죽음을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나. 자살보다 더한 추악한 자기모욕은 없다. 너무나 흔해진 자살 속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이 아닐까. 그가 마지막으로 매끄럽게 고쳐준 자동차를 다시 보니 새삼스럽게 그의 모습이 눈에 떠오른다. (dyk47@yahoo.com)
지난 호 신문 편집이 마감시간보다 2시간 앞당겨 끝났다. 평상시 마감시간이 오후 5시였는데 전날 준비를 많이 한 탓인지 예정보다 빨리 끝났다. 직원들에게 고생했다면서 판을 접었는데 오후 4시가 넘어 중국인 인쇄소에서 한 직원으로부터 불길한 말을 들었다. 내일 아침에 인쇄하는 다른 한국신문에서 커버를 도로 가져갔는데 한국에 무슨 일이 일어 난 것 같다는 얘기다. 암살사건 같은 불길한 예감을 안고 인터넷을 보니 최진실 자살 사건으로 막 도배가 되기 시작했다. 최진실은 상당한 뉴스거리다. 물론 과거 대통령 암살사건에 비교할 수는 없다고 해도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는 연예인의 죽음이기 때문에 뉴스 비중은 그 만큼 크다. 모처럼 신문 편집이 일찍 끝나 그런대로 한숨을 돌리려는 순간에 찾아온 비보는 확실히 사람을 맥 빠지게 했다. 인쇄소에 커버를 바꿀 수 있느냐고 물으니 가능하지만 그 대가는 엄청났다. 이미 윤전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는데 그런 손해를 감수하겠냐는 물음에 선뜻 ‘다시 하자’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호사다마라고 할까? 매주 제 시간에 마감을 못해 인쇄소로부터 재촉을 받았는데 오늘 모처럼 마감시간을 앞당겼더니 그 결과는 큰 기사를 놓친 신문을 만든 것이다. 모든 인간지사가 그렇겠지만 자신의 노력만으로 세상일이 돌아갈 때도 있지만 불가항력적인 결과 앞에 사람의 노력은 너무나 별볼일 없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하게 했다. 너무 흔해진 자살 최진실의 자살이 있기 전 안재환이라는 젊은 연예인의 자살로 슬픔에 빠진 한국사회가 이제 겨우 안정을 찾는가 했는데 더 큰 슬픔에 빠지게 되었다. 자살의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안재환의 자살과 연관되 시달려온 사채설 악플에 분노해 음주 후 충동적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시나리오가 가장 유력하다. 세계 수준급인 한국형 인터넷 악플에 대한 시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기자도 4년 전 매주 한인 웹사이트에 글을 약 1년여 동안 올린 적이 있었다. 매주 새 글을 올리면 보통 20-30개 정도의 댓글이 따라 붙는다. 동감의 글에는 인색하고 나머지는 글과 관계없이 대부분 욕설이다. 글에 대한 정당한 비판은 찾을 수 없고 무명의 무차별 인신공격 악플로 가득하다. 댓글을 읽고 나면 마음의 평정심을 찾기가 매우 힘들다. 화가 나고, 자신에 대한 부정확한 오해나 곡해도 걱정거리가 된다. 주위에선 글을 올리지 말라고 했지만 기자는 악플에 상관치 않고 매주 글을 쓰면 꼭 올렸다. 이것은 그림자 뒤에 숨어 기생하는 어둠의 사람들과의 싸움이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런 DNA를 가진 사람들과의 다툼도 사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환자이기 때문이다. 하여튼 최진실은 자살은 너무나 진한 아쉬움을 남겼다. 기자는 최진실이 나오는 드라마를 특히 좋아했다. 그녀가 맡은 역할이 대부분 똑순이 같은 역을 할 경우가 많았다. 착한 남편과 아이들을 이끌고 나가는 억척 주부의 역을 너무나 실감 있게 잘 표현했다. 그래서 그녀가 나오는 드라마는 기다려지고 또 연기자에 대한 호감도 컸다.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가 되고 ‘evil’을 꺼꾸로 하면 ‘live’가 된다. 거꾸로 하면 뜻이 다른 것처럼 세상은 생각하기 나름이고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다. 자살이 자기의 표현하는 최후의 수단일 수도 있지만 세상을 등진 망자가 이제 무슨 결과를 들을 수 있겠나. 어느 누구라도 한번쯤은 산다는 의미도, 특별한 미련도 갖기 힘들 때가 있지만 창조주가 준 고귀한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무한한 책임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S씨의 죽음 지난달 초 우연히 S씨를 헤이워드식당 앞에서 만났다. 코가 깨진 차를 본 그는 보기 흉하니 걱정하지 말고 차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 나이도 있으니 깨끗한 옷차림처럼 깨끗한 차를 타고 다녀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의 말은 차에 무관심한 기자의 마음을 움직였다. 며칠 후 차를 가져갔다. 긴 머리에 가죽 모자가 눈에 거슬려 ‘좀 단정하게 하라’고 하니 웃으면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마침 차가 다 되었다는 전화를 받고 가니 깨끗이 면도도 하고 머리도 깔끔하게 잘랐다. 잘 했다면서 ‘다음에 점심이라도 하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그가 자신의 사무실을 보여 주면서 골동품을 수집한다고 했다. 시계도, 재봉틀도, 카메라도 보여 주며 나중에 큰 돈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좋은 취미를 가지고 있다는 말도 나누었다. 후일 골동품을 팔아 돈을 벌겠다며 생에 강한 애착심을 보였던 그가 자살을 했다니 정작 믿어지지 않는다. 왜들 죽음을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나. 자살보다 더한 추악한 자기모욕은 없다. 너무나 흔해진 자살 속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이 아닐까. 그가 마지막으로 매끄럽게 고쳐준 자동차를 다시 보니 새삼스럽게 그의 모습이 눈에 떠오른다. (dyk47@yahoo.com)
2008-08-29 오늘의 양식
미국에서 흔히 보는 습관 중에 거슬리는 습관적 질문이 하나 있다. 사람을 만나면 지나치며 물어보는 의미 없는 ‘How are you?’ 라는 질문이다. 질문을 받은 사람은 습관적으로 ‘Fine’ 이라고 대답하고, 질문을 던진 사람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Good’ 이라고 하거나 아니면 대답할 여유도 없이 스쳐 지나쳐 간다. 학창시절 하루는 사람들이 얼마나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고 이 질문을 던질까 시험해 보려 ‘How are you?’ 라고 물어올 때 마다 ‘Bad’ 라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 열명중 한명 정도만 ‘Bad’ 라는 내 대답을 듣고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그이후 나는 상대방의 대답을 듣고 대화를 할 시간이 없으면 ‘How are you?’ 라는 인삿말 대신 ‘좋은 아침’을 말한다. 상대방이 듣던 말던 왠지 좋은 아침을 빌어주는 인삿말에 진심을 싣기가 더 쉬운것 같아서이다. 이와 달리 아주 작은 일이 울적한 기분을 바꾸어 주기도 한다. 지금은 운전을 하고 사무실에 갈때가 더 많지만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이나 맨하탄 미드타운에서 걸어서 사무실을 갈 때는 길가는 사람들을 통해 아침이 밝아지는 경험을 자주 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깨가 다을 것 처럼 바삐 걸어가다가도 이름 없는 얼굴들중 누군가는 눈에 미소를 담고 가고, 누군가는 아름답게 차리고 꽃을 들고 가고, 또 누군가는 커피샵 문을 열어 주는 친절을 베풀기도 할 때 무표정했던 내 얼굴에도 미소가 돌게 된다. 또 나도 다른 이들에게 같은 친절을 베풀어 혹시라도 침울했던 사람의 기분을 북돋울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세상에서 가장 긍정적인것 같은 사람에게도 힘이 빠지는 날이, 몸과 마음이 아픈 날이 있다. 그 기간이 하루가 아니라 한 달 또는 1년이 넘을 때도 있다. 하는 일마다 성공적인 것 같아 만인의 부러움을 사는 이들도 넘어질 때가 있다. 높이 올라갔을 수록 추락도 크게 아프게 한다. 내가 느꼈던 가장 큰 친절,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기 어려운 친절은 고가의 선물이나 보기 힘든 배려가 아니라 내가 가장 작게 느껴졌을때 걸려온 한 통의 안부 전화였고 마음의 짐때문에 무거운 어깨로 걸어갈때 지나치는 사람이 보여준 친절이었다. 그들은 작은 격려가 무거운 그날을 “세상은 살만한 날”로 바꾸어 주기도 했다. 이런 경험을 자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제삼자에게 친절을 베푸는 일도 드물고 특별히 가족들에게는 격려와 칭찬도 인색하다. 잘 움직이는 기계에도 기름칠을 해주어야 오래 잘 사용할 수 있는데,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힘이 빠지지 않도록 윤활유의 역할을 하는 것이 왜 이리 어려운지 모르겠다. 경제는 어렵고, 정치 소식은 혼란하고, 이민법은 향상되지 않을수록 주변을 둘러 보는 여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주변에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친절이 필요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영국 시인 존 단의 표현처럼 우리는 섬이 아니라 대륙의 일부이며, 대륙의 귀퉁이가 쓸려 내려갈 때 우리도 쓸려 내려간다. 우리 모두는 작은 친절과 격려를 먹고 산다. Copyright© Judy J. Chang, Esq. All rights reserved. 기사에 대한 의견은 글쓴이에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쥬디 장 변호사, J Global Law Group. T: 650-856-2500; www.jgloballaw.com)
미국에서 흔히 보는 습관 중에 거슬리는 습관적 질문이 하나 있다. 사람을 만나면 지나치며 물어보는 의미 없는 ‘How are you?’ 라는 질문이다. 질문을 받은 사람은 습관적으로 ‘Fine’ 이라고 대답하고, 질문을 던진 사람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Good’ 이라고 하거나 아니면 대답할 여유도 없이 스쳐 지나쳐 간다. 학창시절 하루는 사람들이 얼마나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고 이 질문을 던질까 시험해 보려 ‘How are you?’ 라고 물어올 때 마다 ‘Bad’ 라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 열명중 한명 정도만 ‘Bad’ 라는 내 대답을 듣고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그이후 나는 상대방의 대답을 듣고 대화를 할 시간이 없으면 ‘How are you?’ 라는 인삿말 대신 ‘좋은 아침’을 말한다. 상대방이 듣던 말던 왠지 좋은 아침을 빌어주는 인삿말에 진심을 싣기가 더 쉬운것 같아서이다. 이와 달리 아주 작은 일이 울적한 기분을 바꾸어 주기도 한다. 지금은 운전을 하고 사무실에 갈때가 더 많지만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이나 맨하탄 미드타운에서 걸어서 사무실을 갈 때는 길가는 사람들을 통해 아침이 밝아지는 경험을 자주 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깨가 다을 것 처럼 바삐 걸어가다가도 이름 없는 얼굴들중 누군가는 눈에 미소를 담고 가고, 누군가는 아름답게 차리고 꽃을 들고 가고, 또 누군가는 커피샵 문을 열어 주는 친절을 베풀기도 할 때 무표정했던 내 얼굴에도 미소가 돌게 된다. 또 나도 다른 이들에게 같은 친절을 베풀어 혹시라도 침울했던 사람의 기분을 북돋울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세상에서 가장 긍정적인것 같은 사람에게도 힘이 빠지는 날이, 몸과 마음이 아픈 날이 있다. 그 기간이 하루가 아니라 한 달 또는 1년이 넘을 때도 있다. 하는 일마다 성공적인 것 같아 만인의 부러움을 사는 이들도 넘어질 때가 있다. 높이 올라갔을 수록 추락도 크게 아프게 한다. 내가 느꼈던 가장 큰 친절,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기 어려운 친절은 고가의 선물이나 보기 힘든 배려가 아니라 내가 가장 작게 느껴졌을때 걸려온 한 통의 안부 전화였고 마음의 짐때문에 무거운 어깨로 걸어갈때 지나치는 사람이 보여준 친절이었다. 그들은 작은 격려가 무거운 그날을 “세상은 살만한 날”로 바꾸어 주기도 했다. 이런 경험을 자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제삼자에게 친절을 베푸는 일도 드물고 특별히 가족들에게는 격려와 칭찬도 인색하다. 잘 움직이는 기계에도 기름칠을 해주어야 오래 잘 사용할 수 있는데,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힘이 빠지지 않도록 윤활유의 역할을 하는 것이 왜 이리 어려운지 모르겠다. 경제는 어렵고, 정치 소식은 혼란하고, 이민법은 향상되지 않을수록 주변을 둘러 보는 여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주변에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친절이 필요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영국 시인 존 단의 표현처럼 우리는 섬이 아니라 대륙의 일부이며, 대륙의 귀퉁이가 쓸려 내려갈 때 우리도 쓸려 내려간다. 우리 모두는 작은 친절과 격려를 먹고 산다. Copyright© Judy J. Chang, Esq. All rights reserved. 기사에 대한 의견은 글쓴이에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쥬디 장 변호사, J Global Law Group. T: 650-856-2500; www.jgloballaw.com)
2008-03-15 처음처럼
지나가다 ‘처음처럼’ 이라는 글자를 보고 신선한 표현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다시 보니 소주 광고 였는데 여러가지 의미가 내포되었을 것 같다. 아마도 예전 맛에 대한 향수, 처음과 같은 자세로 열심히 만들겠다는 의지 내지는 깨끗하다는 뜻 등이 담겨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심지어 소주도 이런 자세로 만드는데, 우리 인생에 처음과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할 부분이 너무나 많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나에게는 role model 이 있는데, 중국에서 만났던 할머니 선생님이다. 내가 90년대에 중국의 소주대학에서 국제통상법을 가르칠때 내가 살던 외국인 선생들이 모여 사는 빌라 윗층에 사시던 플로리다 출신 미국인 선생님이 셨다. 교육학 박사로 교직에 계속 계시다 60세가 넘어서자 은퇴를 거부하고 중국에 와서 제2의 커리어를 쌓고 계시던 분이었다. 그당시 연세가 65세 가량 되셨었다. 어떻게 중국에 오실 결정을 하셨나고 여쭈어 보았더니 집안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부모님이 다 100살넘게 장수하셨고 고모도 100살이 넘게 건강하시다고 했는데, 교회 목사님이 고모를 찾아와 예배를 드리시는데 고모가 하셨다는 말씀이 걸작이다. “목사님, 내가 너무 장수해서 천국에 있는 내 친구들이 내가 천국에 못 온줄 알까 걱정이에요.” 라고 하셨단다. 이렇듯 장수하는 집안이다 보니 60세가 넘어 본인의 정년 퇴직이 임박해 오자 이제 내가 은퇴하면 40년은 더 살 텐데 뭘하고 살아야 하나 하고 두번째 커리어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셨고 그래서 결정한 것이 중국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일이라고 하셨다. 이 인상적인 할머니는 얼마나 정정하셨는지 20대인 내가 헉헉대고 오르다 만 황산 (Yellow Mountain) 을 정상까지 등반했고, 매일 저녁 학생들이 방문을 와도 지치지 않고 손님을 맞았었다. 그 분 이름은 참 걸맞게도 “작은 아씨들”의 용감한 둘째딸과 같은 조 (Jo) 였다. 평생 가르치는 직업을 해온 분인데 그분에게서는 마치 이제 처음 교편을 잡은 듯한 열정과 제자에 대한 사랑이 늘 감돌았다. 그 때문인지 문화와 나이를 초월해 만인이 따르고 존경하는 어른이기도 했다. 또한 내가 만난 사람들중 가장 행복해 보이는 분들중에 한명이기도 하다. 매년 지금까지 Valentine’s Day 에 이메일을 보내 주는 이 선생님을 기억하며, 내가 정년 퇴직의 나이를 넘었을때 내 일에 대한 열정과 고객에 대한 애정으로 행복한 할머니 변호사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얼마나 좋을까? 첫마음을 끝까지 유지한다는 것은 도닦는 것과 같은 일이 아닌가 싶다. 늘 염두에 두지 않으면 잊기 쉽고, 항상 노력하지 않으면 퇴색하기 싶다. 직장도 취미도 처음과 같은 열정을 계속 유지하기 힘들고 애정도 처음의 애틋한 감정을 끝까지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고들 하지않는가. 그동안 살아 오면서 처음처럼 꾸준하지 못했던 일들이 많다. 돌이켜 보면 잘한 일보다 못한 일이 더 많고 후회가 가득이다. 경험을 통해 배워야 하는데 되풀이한 실수도 셀 수 없다. 하지만 현재를 보고 미래를 꿈꾼다. 하나 둘씩 ‘처음처럼’ 자세를 가다듬고 열심을 내는 일들을 늘려 가다 보면 어느날 조 할머니 처럼 변치 않는 열정을 가진 멋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이제 보니 내가 써온 이민 법률 칼럼이 6년을 넘어서 7년이 다 되어 간다. 이렇게 길게 쓸지 모르고 시작한 일인데 이민법이 변화가 하도 많아서인지 아니면 매년 새로운 경험을 하기 때문인지 늘 독자분들에게 전할 만한 토픽이 있었고, 칼럼을 길게 못쓸만한 특별한 위기를 겪지 않고 지내온 것이 감사하다. 칼럼을 계속 쓰는 동안 처음과 같은 자세를 잊지 않고자 옷 매무새를 바로 잡아 본다. Copyrightã Judy J. Chang, Esq. All rights reserved. 기사에 대한 의견은 글쓴이에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쥬디 장 변호사, J Global Law Group. T: 650-856-2500; www.jgloballaw.com)
지나가다 ‘처음처럼’ 이라는 글자를 보고 신선한 표현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다시 보니 소주 광고 였는데 여러가지 의미가 내포되었을 것 같다. 아마도 예전 맛에 대한 향수, 처음과 같은 자세로 열심히 만들겠다는 의지 내지는 깨끗하다는 뜻 등이 담겨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심지어 소주도 이런 자세로 만드는데, 우리 인생에 처음과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할 부분이 너무나 많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나에게는 role model 이 있는데, 중국에서 만났던 할머니 선생님이다. 내가 90년대에 중국의 소주대학에서 국제통상법을 가르칠때 내가 살던 외국인 선생들이 모여 사는 빌라 윗층에 사시던 플로리다 출신 미국인 선생님이 셨다. 교육학 박사로 교직에 계속 계시다 60세가 넘어서자 은퇴를 거부하고 중국에 와서 제2의 커리어를 쌓고 계시던 분이었다. 그당시 연세가 65세 가량 되셨었다. 어떻게 중국에 오실 결정을 하셨나고 여쭈어 보았더니 집안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부모님이 다 100살넘게 장수하셨고 고모도 100살이 넘게 건강하시다고 했는데, 교회 목사님이 고모를 찾아와 예배를 드리시는데 고모가 하셨다는 말씀이 걸작이다. “목사님, 내가 너무 장수해서 천국에 있는 내 친구들이 내가 천국에 못 온줄 알까 걱정이에요.” 라고 하셨단다. 이렇듯 장수하는 집안이다 보니 60세가 넘어 본인의 정년 퇴직이 임박해 오자 이제 내가 은퇴하면 40년은 더 살 텐데 뭘하고 살아야 하나 하고 두번째 커리어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셨고 그래서 결정한 것이 중국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일이라고 하셨다. 이 인상적인 할머니는 얼마나 정정하셨는지 20대인 내가 헉헉대고 오르다 만 황산 (Yellow Mountain) 을 정상까지 등반했고, 매일 저녁 학생들이 방문을 와도 지치지 않고 손님을 맞았었다. 그 분 이름은 참 걸맞게도 “작은 아씨들”의 용감한 둘째딸과 같은 조 (Jo) 였다. 평생 가르치는 직업을 해온 분인데 그분에게서는 마치 이제 처음 교편을 잡은 듯한 열정과 제자에 대한 사랑이 늘 감돌았다. 그 때문인지 문화와 나이를 초월해 만인이 따르고 존경하는 어른이기도 했다. 또한 내가 만난 사람들중 가장 행복해 보이는 분들중에 한명이기도 하다. 매년 지금까지 Valentine’s Day 에 이메일을 보내 주는 이 선생님을 기억하며, 내가 정년 퇴직의 나이를 넘었을때 내 일에 대한 열정과 고객에 대한 애정으로 행복한 할머니 변호사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얼마나 좋을까? 첫마음을 끝까지 유지한다는 것은 도닦는 것과 같은 일이 아닌가 싶다. 늘 염두에 두지 않으면 잊기 쉽고, 항상 노력하지 않으면 퇴색하기 싶다. 직장도 취미도 처음과 같은 열정을 계속 유지하기 힘들고 애정도 처음의 애틋한 감정을 끝까지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고들 하지않는가. 그동안 살아 오면서 처음처럼 꾸준하지 못했던 일들이 많다. 돌이켜 보면 잘한 일보다 못한 일이 더 많고 후회가 가득이다. 경험을 통해 배워야 하는데 되풀이한 실수도 셀 수 없다. 하지만 현재를 보고 미래를 꿈꾼다. 하나 둘씩 ‘처음처럼’ 자세를 가다듬고 열심을 내는 일들을 늘려 가다 보면 어느날 조 할머니 처럼 변치 않는 열정을 가진 멋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이제 보니 내가 써온 이민 법률 칼럼이 6년을 넘어서 7년이 다 되어 간다. 이렇게 길게 쓸지 모르고 시작한 일인데 이민법이 변화가 하도 많아서인지 아니면 매년 새로운 경험을 하기 때문인지 늘 독자분들에게 전할 만한 토픽이 있었고, 칼럼을 길게 못쓸만한 특별한 위기를 겪지 않고 지내온 것이 감사하다. 칼럼을 계속 쓰는 동안 처음과 같은 자세를 잊지 않고자 옷 매무새를 바로 잡아 본다. Copyrightã Judy J. Chang, Esq. All rights reserved. 기사에 대한 의견은 글쓴이에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쥬디 장 변호사, J Global Law Group. T: 650-856-2500; www.jgloballaw.com)
2008-01-17 자기 희생이 봉사의 기본임을 제시하는 김기순 한미연합회
1세에서 2세로 넘어가는 과정이 그리 쉽지는 않은 모양이다. 요즘 한미연합회 (KAC)LA지부는 2세들의 운영에 문제점을 내포 하고 진통을 겪고 있다. 한미연합회설립과 한미장학재단의 주축 돌을 단단하게 놓았던 김기순 한미연합회(KAC)전국이사회 고문/한미장학재단(KASF)전국이사회 고문은 70세에 돌아본 미국생활50년 회고록을 내놓고 지난 시간을 회고 하고 있는 시간 이었는데, 그의 부친이 67세에 이민 와 사업을 시작한 전처를 발 듯이 분주해 지기 시작 했다. 2세들은 재정 마련에 1세들처럼 적극적이지 못 하다는 것과 1세와의 커뮤니티를 강화해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고 또한 이제는 어떻게 갈 것인가를 확실히 정하고 갈 길을 다시 고쳐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 하였다. 이러한 시점에 한미연합회가 어느 정도 기반을 잡고 실질적인 운영을 2세들에게 맡기고 너무 가까이 가면 간섭이라는 인상을 줄 것 같아 잘 흘러갈 수 있게 물고만 터주고 보아왔던 시간을 이제는 그 물결을 같이 타고 헤쳐나가야 하는 시점에 와 있는 김기순 고문을 만나 그가 지나온 역경의 시간들을 조명해보고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하여 알아 보았다. 13살 나이에 이북에서 탈출 그는 1948년에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당시13살 나이에 사선을 넘어 구사일생으로 남쪽으로 탈출 하였다. 그 과정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고 엄청난 일이었다고 말한다. 탈출 후 한국동란이 터지고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였는데 그 당시 조그만 나무상자를 만들어 목에 걸고 캔디, 껌, 초컬릿, 담배 같은 것들을 팔았다. 문전박대 또는 매를 맞거나 물건을 뺏기는 등 수난을 당하면서도 악착같이 이 일을 해야만이 살 수 있고 가족을 만날 수 있고 또한 부모님들을 찾지 못하면 혼자라도 살아야 한다는 정신력으로 견딘 것이 지금 그가 살아 가는데 한번 시작한 일은 참고 인내하며 끝마치는 정신력을 같게 된 것 같다고 말한다. 그 당시 김고문은 쌀10가마를 살수 있는 돈을 모았을 정도로 악착 같이 뛰었다. 그리고 학문의 줄 또한 놓지 않고 피난처에 있는 용산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러던 중 미국에 살고 있는 친구의 외삼촌을 피난처 집인 ‘하꼬방’에서 만나 미국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때 미국으로 가자는 계획을 세윘단다. ‘가자 희망의 나라로’라고 결심하고 1955년에 유학시험에 응시하여, 1956년에 유학을 떠나 그 해 2월28일에 LA에 도착하여 1년 동안 편지를 써서 재정보증인을 해준 헬렌 어머니 집에 기거하며 유학생활을 시작 하였다. 그는 피난 시절 부산에서 일했던 것 처럼 중국음식점에서 접시딱기 일을 시작했다. 온갖 수모를 겪으며 일한 그 중국집이 지금도 영업을 하고 있어 감회가 새롭다고 말한다. 캘폴리 포모나 주립대학에 입학 그는 학비가 안 드는 대학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들어간 것이 하버 커뮤니티 칼리지 1956년 9월부터 1년간 다닌 학교에서 국제문화의 밤도 개최하고 많은 활동을 하였다. 4년제 대학으로 가야겠다는 욕구는 공과대학 쪽으로 기울었고 또한 그 당시부터 공과대학에 많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 한때에 마침 캘폴리 포모나 주립대학에 전자 및 항공 등 첨단의 4~5개 전공과목이 있어 입학을 하게 된다. 대학생활 중 그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들이 있다. 그 당시800여명의 학생, 교수, 총장, 심지어 청소부까지 그의 퍼스트 네임으로 부르는 친숙한 사이가 되었고 ‘오 데니 보이’ 를 영어와 한국어로 불러 사람들이 오리엔탈보이가 아이리시 노래를 부른다는 조크를 하곤 하였고 그가 졸업할 때는 가장인기 있는 학생에게 주는 ‘폴리 퍼시낼리티’상을 받을 정도로 유명세를 치렀다. 또한 국제문화의 밤을 개최하였는데 2년 후배인 지종태씨가 태권도 유단자라 한국태권도를 선보였는데 그것이 미국땅에 최초로 태권도를 선보였던 것이다. NCR(national cash register)에서 일을 시작하다 졸업 후 시민권과 영주권이 없어 엔지니어로 취직하기가 힘들어 학교 교무처에서 일자리를 주어 5개월간 일하며 직장을 찾던 중 금전등록기를 만드는 NCR에서 연락이 왔다 군사용이 아닌 영업용 컴퓨터라 시민권 없는 사람도 괜찮다는 회사의 결정에 주니어 엔지니어로 입사 했었다. 그리고 사진과 편지로 사귀어온 지금의 아내와 교회, 유학생, 친구 등 하객이 200여명이 참석한 성대한 결혼식을 치렀다. 그의 부친 고 김명한옹은 LA 김방아 하면 이 지역 이민자들은 다들 안다. 1967년에 이민 보따리를 풀면서 비즈니스를 시작하였으니 남들은 은퇴하여 쉬는 것을 어떻게 할까 하는 시간에 그의 부친은 어떻게 하면 비즈니스와 한인들을 결집할까 하는 구상을 하였다. 2000년 3월 100수 잔치에는 800여명이 참석하였고 연방의회에서는 성조기를 보낼 정도로 부친의 유명세는 대단하였다. 또한 남용 재단을 설립하여 한인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였었다. 부친이 올림픽가 김방아 건물위에 붙인 ‘우리는 모범 시민이 되자’ 라는 글은 20년이 넘도록 붙어 있었다. 제록스와 삼성에서 근무 김기순 고문은 NCR이 샌디에이고로 이사하는 과정에서XDS(Xerox data systems)로 입사 하여 개발한 RAD 마그네틱 헤드바와 디스크 메모리 테스트가 성공을 거두어 인센티브도 받았다. 또한 1975년부터 1999년 까지 제록스 사 의 고속 프린트 품질 확보에 공헌하였고 제품에 높은 품질을 유지하는 프로세스에 대해서도 많이 연구하여 다구치(taguchi)신뢰성 확보 기법도 도입 하였다. 그가 제록스 사에서 배운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팀윅과 혁신을’ 꼽을 수 있다고 하겠다. NCR에서 7년과 제록스 사에서 31년을 근무하고 나이가 63세가 되어 1999년 6월30일에 11월 말로 은퇴하고 38년의 직장 생활을 끝낸다는 감회와 앞으로 할 일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던 중 삼성의 끈질긴 품질향상에 대한 집념에 1999년 12월1일부터 한국에 있는 삼성전자에서 상근고문으로 다시 직장생활을 시작하였다. 마지막으로 한국을 위해 봉사한다는 신념을 갖고 5년간 삼성에 근무하는 동안 품질향상과 고객만족서비스제공과정과 개발 및 생산과정을 가르치고, 시스템을 만들었고 E-PASS라는 품질관리 과정, 삼성전자제품이 세계적으로 일류가 되도록 소프트웨어를 포함한 품질과 서비스에 관한 교육과 프로세스, 기술, 기법, 기구들을 개발하여 발전토록 노력하였다. 삼성이 자기 브랜드를 가지고 세계수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고 사업이 번창하였을 때 힘차게 일하던 때를 생각하면 인생의 영광된 시간들 이었고 퇴임 하던 해에 사상 최고의 매출을 기록하여 한껏 흡족함을 느끼며 고국을 떠나 왔었다. 한인회관건립에 심혈을 기울이다 그는 한때 한인회관 건립에 전념하였었다. 문성옥, 김기순, 이화목씨를 발기인으로 한 건립위원회가 모든 기초작업을 하고 진행되고 있었다. 그 당시 건물 주인은 찰스E.로이드 변호사였는데 브래들리 시장이 LA시와 자매도시인 부산에 사절을 파견할 일이 있었는데 그 건물주인을 보내기 원했고 그 건물 주인은 그와 동행을 요구해와 흔쾌히 동행 했었다. 그리고 한국방문 시 힘이 닿는 데로 최고로 대접하였었다. 그 건물 주인은 생애처음 기억에 남는 좋은 여행이었다고 고마워 했고 건물가격에서 5만 달라나 더 깎아 주었다. 순전히 김기순 고문의 수고에 의한 가격의 다운이었다. 그리하여 1975년 우여곡절 끝에 11월22일에 지금의 한인회관이 개관 되었다. KAYF청소년 후원회와 KAC 한미청소년후원회는 1970년 한인회 사업 중 하나로 시작되었다. 1971년에는 한인회에서 독립해 한인청소년 서머 캠프로 호칭되다 1973년에 KAYF란 이름으로 연방 및 주정부에 비영리단체로 등록하고 2년에 걸친 모금운동 끝에 빅베어 러닝 스프링스시에 있는 캠프코니퍼(camp conifer)를 인수 하였다. 김기순 고문은 창립멤버 이었으나 한인회관 건립을 마무리 지은 다음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1980년에 회장 1982년부터 1984년 까지는 이사장을 맡았는데 여기서 리더십 컨퍼런스가 시작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KAC 같은 단체들이 생겨 났으니 청소년 후원회는 그의 커뮤니티 활동의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는 캠프 코니퍼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 당시 그가 회장을 할 때 신청자가 너무 많아 선착순으로 끊어 마감 했을 정도 이었고 또한 캠프참가자들은 만나기만 하면 뛰어가 얼싸안고 어깨동무하며 반가워했고 캠프장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릴 때에 부모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반갑게 만나 떠들 썩 하게 설레는 기분들 이었다. 대학생 리더십 컨퍼런스(KAC) 1970년부터 시작한 캠프가 시간이 흘러 캠프 참가자중 대학에 갔거나 갈 연령인 아이들이 많아지기 시작 하였다. 그래서 그는 1980년에 회장을 맡은 뒤 대학생을 위해 캠프보다 차원을 높인 리더십 컨퍼런스를 시작하자는 의견을 이사회에 내놓았는데 그것이 오늘날 KAC가 주관하는 대학생 리더십 컨퍼런스가 되었다. 그는 미국사회에서 코리언-어메리칸의 아이덴티티를 가진 유능한 지도자를 길러내고 그들이 장차 사회에 진출한 후에 그들을 적극적으로 뒷바침 해주려면 미국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유대관계가 잘 이루어 지도록 1세와 2세간의 다리역할이 중요하다고 느꼈고, 또한 한인 커뮤니티에서 일하며 느낀 것과 젊은 세대들에게 회의하는 법이나 남의 의견을 존중하는 자세부터 바로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대학생을 주인으로 미래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학생을 초청하기도 하였다. 그 당시 미국 내 한인1.5세, 2세, 유학생을 두루 포함시키고 남녀비율도 똑같이 하였었다. 강사들은 해당분야에서 10년 이상 경험을 갖고 있는 성공한 전문인으로 초청 하였었다. 1989년에 KAC가 인수하기전가지 캠프 코니퍼에서 일요일부터 금요일까지 5일간 컨퍼런스가 열렸었다. 이 리더십 컨퍼런스에서 그 당시 이슈에 대한 토론을 한 것이 모체가 되어 나중에 KAL기 추락사건이나 롤링스톤지에 한인을 왜곡하는 기사가 났을 때 항의 편지를 쓰는 등 주류사회나 언론에 한인 커뮤니티의 이해와 관련된 입장을 전달하는 움직임이 처음 생겼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후 이 컨퍼런스에 참가하였다가 카운슬러가 되고 디렉터가 됐던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1983년 설립 한 것이 지금의 한미연합회(KAC)다. 한미장학재단(KASF) 한미장학재단(Korean American scholarship foundation)은 1969년에 워싱턴DC에서 발족 되었고 김기순 고문에게는 1983년에 서부지역 대표이사직으로 임명되었다. 임명 당시 무일푼으로 시작한 서부지역은 1986년 테너 엄정행, 바이올린 이성주씨가 출연하는 모금음악회를 열고 중간휴식시간에 8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했었다. 그 후 이사들도 늘고 새로운 아이디어도 생겨나고 교포사회도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 되가는 때이라 모금만찬 등을 20년간 매년 개최하여 장학금을 모았고 이사장 직을 맡은 1991년에는 19명의 대학생들에게 각각1,000불씩, 13명의 고등학생들에게는100불식 줄 수 있었다. 2005년에 창립20주년을 맞이 하였을 때에는 기부자가 1,500여명, 수혜자는 930여명에 이르렀었다. 한인사회에도 사람이 있다는 것. 이렇듯 한인사회에서 2세들을 위해 그들이 잘 자라날수 있도록 도와주고 확실한 길을 갈수 있도록 인도하는 역할과 한인사회에 다시 그것을 환원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준 것과 한인들이 미 주류사회에 제목소리를 낼 수 없을 때 김기순고문이 정성 들여 키운 그들이 편지를 쓰고, 사회주요 요직에 올라선 그들이 항변 하였을 때 한인사회에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리게 된 것이다. 중고등학교, 대학교시절에 캠프 코니퍼에서 즐겁게 뛰어 놀던 그들이 이제는 40,50대가 되어 주류사회에서 언어장벽 없이 그들과 똑 같이 어깨를 겨누고 일하고 있다. 김기순 고문이 키운 그들을 볼 때 어느덧 그는 70이 넘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의 동안은 50을 보는 모습을 하고 있다. 세월만 갔지 부지런한 자 에게는 세월의 흔적을 남기지 않나 보다 처음 그가 사무실로 쓰던 집 2층의 서재에는 그 당시의 역사가 담긴 모든 것이 진열되어 있다. 1956년에 유학 와 한인사회와 2세들을 위해 많은 공을 들인 김기순 한미장학재단, 한미연합회 전국이사회고문, 이제는 김방아 4째 아들이 아닌 한인과 2세들을 위해 헌신한 김기순으로 불려지길 바란다. 그는 오늘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주지한다. 정직하게 살아라, 최선을 다하라, 인간관계를 항상 원만하게 가져라 라고 하면서 2세들을 위한 사업에 골몰 하고 있다. 재외동포신문. 한국건설경제신문사. UPI통신사. 한국화보 정승덕 지사장 기사제보 문의: 408-892-1188)
1세에서 2세로 넘어가는 과정이 그리 쉽지는 않은 모양이다. 요즘 한미연합회 (KAC)LA지부는 2세들의 운영에 문제점을 내포 하고 진통을 겪고 있다. 한미연합회설립과 한미장학재단의 주축 돌을 단단하게 놓았던 김기순 한미연합회(KAC)전국이사회 고문/한미장학재단(KASF)전국이사회 고문은 70세에 돌아본 미국생활50년 회고록을 내놓고 지난 시간을 회고 하고 있는 시간 이었는데, 그의 부친이 67세에 이민 와 사업을 시작한 전처를 발 듯이 분주해 지기 시작 했다. 2세들은 재정 마련에 1세들처럼 적극적이지 못 하다는 것과 1세와의 커뮤니티를 강화해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고 또한 이제는 어떻게 갈 것인가를 확실히 정하고 갈 길을 다시 고쳐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 하였다. 이러한 시점에 한미연합회가 어느 정도 기반을 잡고 실질적인 운영을 2세들에게 맡기고 너무 가까이 가면 간섭이라는 인상을 줄 것 같아 잘 흘러갈 수 있게 물고만 터주고 보아왔던 시간을 이제는 그 물결을 같이 타고 헤쳐나가야 하는 시점에 와 있는 김기순 고문을 만나 그가 지나온 역경의 시간들을 조명해보고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하여 알아 보았다. 13살 나이에 이북에서 탈출 그는 1948년에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당시13살 나이에 사선을 넘어 구사일생으로 남쪽으로 탈출 하였다. 그 과정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고 엄청난 일이었다고 말한다. 탈출 후 한국동란이 터지고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였는데 그 당시 조그만 나무상자를 만들어 목에 걸고 캔디, 껌, 초컬릿, 담배 같은 것들을 팔았다. 문전박대 또는 매를 맞거나 물건을 뺏기는 등 수난을 당하면서도 악착같이 이 일을 해야만이 살 수 있고 가족을 만날 수 있고 또한 부모님들을 찾지 못하면 혼자라도 살아야 한다는 정신력으로 견딘 것이 지금 그가 살아 가는데 한번 시작한 일은 참고 인내하며 끝마치는 정신력을 같게 된 것 같다고 말한다. 그 당시 김고문은 쌀10가마를 살수 있는 돈을 모았을 정도로 악착 같이 뛰었다. 그리고 학문의 줄 또한 놓지 않고 피난처에 있는 용산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러던 중 미국에 살고 있는 친구의 외삼촌을 피난처 집인 ‘하꼬방’에서 만나 미국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때 미국으로 가자는 계획을 세윘단다. ‘가자 희망의 나라로’라고 결심하고 1955년에 유학시험에 응시하여, 1956년에 유학을 떠나 그 해 2월28일에 LA에 도착하여 1년 동안 편지를 써서 재정보증인을 해준 헬렌 어머니 집에 기거하며 유학생활을 시작 하였다. 그는 피난 시절 부산에서 일했던 것 처럼 중국음식점에서 접시딱기 일을 시작했다. 온갖 수모를 겪으며 일한 그 중국집이 지금도 영업을 하고 있어 감회가 새롭다고 말한다. 캘폴리 포모나 주립대학에 입학 그는 학비가 안 드는 대학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들어간 것이 하버 커뮤니티 칼리지 1956년 9월부터 1년간 다닌 학교에서 국제문화의 밤도 개최하고 많은 활동을 하였다. 4년제 대학으로 가야겠다는 욕구는 공과대학 쪽으로 기울었고 또한 그 당시부터 공과대학에 많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 한때에 마침 캘폴리 포모나 주립대학에 전자 및 항공 등 첨단의 4~5개 전공과목이 있어 입학을 하게 된다. 대학생활 중 그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들이 있다. 그 당시800여명의 학생, 교수, 총장, 심지어 청소부까지 그의 퍼스트 네임으로 부르는 친숙한 사이가 되었고 ‘오 데니 보이’ 를 영어와 한국어로 불러 사람들이 오리엔탈보이가 아이리시 노래를 부른다는 조크를 하곤 하였고 그가 졸업할 때는 가장인기 있는 학생에게 주는 ‘폴리 퍼시낼리티’상을 받을 정도로 유명세를 치렀다. 또한 국제문화의 밤을 개최하였는데 2년 후배인 지종태씨가 태권도 유단자라 한국태권도를 선보였는데 그것이 미국땅에 최초로 태권도를 선보였던 것이다. NCR(national cash register)에서 일을 시작하다 졸업 후 시민권과 영주권이 없어 엔지니어로 취직하기가 힘들어 학교 교무처에서 일자리를 주어 5개월간 일하며 직장을 찾던 중 금전등록기를 만드는 NCR에서 연락이 왔다 군사용이 아닌 영업용 컴퓨터라 시민권 없는 사람도 괜찮다는 회사의 결정에 주니어 엔지니어로 입사 했었다. 그리고 사진과 편지로 사귀어온 지금의 아내와 교회, 유학생, 친구 등 하객이 200여명이 참석한 성대한 결혼식을 치렀다. 그의 부친 고 김명한옹은 LA 김방아 하면 이 지역 이민자들은 다들 안다. 1967년에 이민 보따리를 풀면서 비즈니스를 시작하였으니 남들은 은퇴하여 쉬는 것을 어떻게 할까 하는 시간에 그의 부친은 어떻게 하면 비즈니스와 한인들을 결집할까 하는 구상을 하였다. 2000년 3월 100수 잔치에는 800여명이 참석하였고 연방의회에서는 성조기를 보낼 정도로 부친의 유명세는 대단하였다. 또한 남용 재단을 설립하여 한인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였었다. 부친이 올림픽가 김방아 건물위에 붙인 ‘우리는 모범 시민이 되자’ 라는 글은 20년이 넘도록 붙어 있었다. 제록스와 삼성에서 근무 김기순 고문은 NCR이 샌디에이고로 이사하는 과정에서XDS(Xerox data systems)로 입사 하여 개발한 RAD 마그네틱 헤드바와 디스크 메모리 테스트가 성공을 거두어 인센티브도 받았다. 또한 1975년부터 1999년 까지 제록스 사 의 고속 프린트 품질 확보에 공헌하였고 제품에 높은 품질을 유지하는 프로세스에 대해서도 많이 연구하여 다구치(taguchi)신뢰성 확보 기법도 도입 하였다. 그가 제록스 사에서 배운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팀윅과 혁신을’ 꼽을 수 있다고 하겠다. NCR에서 7년과 제록스 사에서 31년을 근무하고 나이가 63세가 되어 1999년 6월30일에 11월 말로 은퇴하고 38년의 직장 생활을 끝낸다는 감회와 앞으로 할 일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던 중 삼성의 끈질긴 품질향상에 대한 집념에 1999년 12월1일부터 한국에 있는 삼성전자에서 상근고문으로 다시 직장생활을 시작하였다. 마지막으로 한국을 위해 봉사한다는 신념을 갖고 5년간 삼성에 근무하는 동안 품질향상과 고객만족서비스제공과정과 개발 및 생산과정을 가르치고, 시스템을 만들었고 E-PASS라는 품질관리 과정, 삼성전자제품이 세계적으로 일류가 되도록 소프트웨어를 포함한 품질과 서비스에 관한 교육과 프로세스, 기술, 기법, 기구들을 개발하여 발전토록 노력하였다. 삼성이 자기 브랜드를 가지고 세계수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고 사업이 번창하였을 때 힘차게 일하던 때를 생각하면 인생의 영광된 시간들 이었고 퇴임 하던 해에 사상 최고의 매출을 기록하여 한껏 흡족함을 느끼며 고국을 떠나 왔었다. 한인회관건립에 심혈을 기울이다 그는 한때 한인회관 건립에 전념하였었다. 문성옥, 김기순, 이화목씨를 발기인으로 한 건립위원회가 모든 기초작업을 하고 진행되고 있었다. 그 당시 건물 주인은 찰스E.로이드 변호사였는데 브래들리 시장이 LA시와 자매도시인 부산에 사절을 파견할 일이 있었는데 그 건물주인을 보내기 원했고 그 건물 주인은 그와 동행을 요구해와 흔쾌히 동행 했었다. 그리고 한국방문 시 힘이 닿는 데로 최고로 대접하였었다. 그 건물 주인은 생애처음 기억에 남는 좋은 여행이었다고 고마워 했고 건물가격에서 5만 달라나 더 깎아 주었다. 순전히 김기순 고문의 수고에 의한 가격의 다운이었다. 그리하여 1975년 우여곡절 끝에 11월22일에 지금의 한인회관이 개관 되었다. KAYF청소년 후원회와 KAC 한미청소년후원회는 1970년 한인회 사업 중 하나로 시작되었다. 1971년에는 한인회에서 독립해 한인청소년 서머 캠프로 호칭되다 1973년에 KAYF란 이름으로 연방 및 주정부에 비영리단체로 등록하고 2년에 걸친 모금운동 끝에 빅베어 러닝 스프링스시에 있는 캠프코니퍼(camp conifer)를 인수 하였다. 김기순 고문은 창립멤버 이었으나 한인회관 건립을 마무리 지은 다음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1980년에 회장 1982년부터 1984년 까지는 이사장을 맡았는데 여기서 리더십 컨퍼런스가 시작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KAC 같은 단체들이 생겨 났으니 청소년 후원회는 그의 커뮤니티 활동의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는 캠프 코니퍼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 당시 그가 회장을 할 때 신청자가 너무 많아 선착순으로 끊어 마감 했을 정도 이었고 또한 캠프참가자들은 만나기만 하면 뛰어가 얼싸안고 어깨동무하며 반가워했고 캠프장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릴 때에 부모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반갑게 만나 떠들 썩 하게 설레는 기분들 이었다. 대학생 리더십 컨퍼런스(KAC) 1970년부터 시작한 캠프가 시간이 흘러 캠프 참가자중 대학에 갔거나 갈 연령인 아이들이 많아지기 시작 하였다. 그래서 그는 1980년에 회장을 맡은 뒤 대학생을 위해 캠프보다 차원을 높인 리더십 컨퍼런스를 시작하자는 의견을 이사회에 내놓았는데 그것이 오늘날 KAC가 주관하는 대학생 리더십 컨퍼런스가 되었다. 그는 미국사회에서 코리언-어메리칸의 아이덴티티를 가진 유능한 지도자를 길러내고 그들이 장차 사회에 진출한 후에 그들을 적극적으로 뒷바침 해주려면 미국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유대관계가 잘 이루어 지도록 1세와 2세간의 다리역할이 중요하다고 느꼈고, 또한 한인 커뮤니티에서 일하며 느낀 것과 젊은 세대들에게 회의하는 법이나 남의 의견을 존중하는 자세부터 바로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대학생을 주인으로 미래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학생을 초청하기도 하였다. 그 당시 미국 내 한인1.5세, 2세, 유학생을 두루 포함시키고 남녀비율도 똑같이 하였었다. 강사들은 해당분야에서 10년 이상 경험을 갖고 있는 성공한 전문인으로 초청 하였었다. 1989년에 KAC가 인수하기전가지 캠프 코니퍼에서 일요일부터 금요일까지 5일간 컨퍼런스가 열렸었다. 이 리더십 컨퍼런스에서 그 당시 이슈에 대한 토론을 한 것이 모체가 되어 나중에 KAL기 추락사건이나 롤링스톤지에 한인을 왜곡하는 기사가 났을 때 항의 편지를 쓰는 등 주류사회나 언론에 한인 커뮤니티의 이해와 관련된 입장을 전달하는 움직임이 처음 생겼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후 이 컨퍼런스에 참가하였다가 카운슬러가 되고 디렉터가 됐던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1983년 설립 한 것이 지금의 한미연합회(KAC)다. 한미장학재단(KASF) 한미장학재단(Korean American scholarship foundation)은 1969년에 워싱턴DC에서 발족 되었고 김기순 고문에게는 1983년에 서부지역 대표이사직으로 임명되었다. 임명 당시 무일푼으로 시작한 서부지역은 1986년 테너 엄정행, 바이올린 이성주씨가 출연하는 모금음악회를 열고 중간휴식시간에 8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했었다. 그 후 이사들도 늘고 새로운 아이디어도 생겨나고 교포사회도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 되가는 때이라 모금만찬 등을 20년간 매년 개최하여 장학금을 모았고 이사장 직을 맡은 1991년에는 19명의 대학생들에게 각각1,000불씩, 13명의 고등학생들에게는100불식 줄 수 있었다. 2005년에 창립20주년을 맞이 하였을 때에는 기부자가 1,500여명, 수혜자는 930여명에 이르렀었다. 한인사회에도 사람이 있다는 것. 이렇듯 한인사회에서 2세들을 위해 그들이 잘 자라날수 있도록 도와주고 확실한 길을 갈수 있도록 인도하는 역할과 한인사회에 다시 그것을 환원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준 것과 한인들이 미 주류사회에 제목소리를 낼 수 없을 때 김기순고문이 정성 들여 키운 그들이 편지를 쓰고, 사회주요 요직에 올라선 그들이 항변 하였을 때 한인사회에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리게 된 것이다. 중고등학교, 대학교시절에 캠프 코니퍼에서 즐겁게 뛰어 놀던 그들이 이제는 40,50대가 되어 주류사회에서 언어장벽 없이 그들과 똑 같이 어깨를 겨누고 일하고 있다. 김기순 고문이 키운 그들을 볼 때 어느덧 그는 70이 넘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의 동안은 50을 보는 모습을 하고 있다. 세월만 갔지 부지런한 자 에게는 세월의 흔적을 남기지 않나 보다 처음 그가 사무실로 쓰던 집 2층의 서재에는 그 당시의 역사가 담긴 모든 것이 진열되어 있다. 1956년에 유학 와 한인사회와 2세들을 위해 많은 공을 들인 김기순 한미장학재단, 한미연합회 전국이사회고문, 이제는 김방아 4째 아들이 아닌 한인과 2세들을 위해 헌신한 김기순으로 불려지길 바란다. 그는 오늘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주지한다. 정직하게 살아라, 최선을 다하라, 인간관계를 항상 원만하게 가져라 라고 하면서 2세들을 위한 사업에 골몰 하고 있다. 재외동포신문. 한국건설경제신문사. UPI통신사. 한국화보 정승덕 지사장 기사제보 문의: 408-892-1188)
2007-10-25 <미국일기> 30년 만에 얻은 트레일
30년여 미국생활 가운데 해보고 싶은 것 중에 하나가 등산이었다. 미국에서 등산이라면 말 그대로 높은 산을 오르는 등산(rock climbing)이 있고 또 하나는 도보여행이라고 부르는 하이킹(hiking)이 있다. 하이킹은 공원이나 유원지에 피크닉을 갔다가 공간에서 흔히 즐기는 여가 운동으로 많은 사람이 즐겨 찾는다. 그런데 등산도 하이킹도 아닌 트레일(trails)이 미국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운동이다. 트레일은 높은 산을 오르는 등산도 아니고 공간을 한가하게 유유자적 걷는 운동도 또한 아니다. 트레일은 그야말로 울창한 숲 속 길을 따라 아령 같은 손 운동 기구를 흔들며 빠른 걸음으로 걷는 다소 격렬한 경보 운동을 말한다. 필자는 토요일 아침에 보통 때보다 일찍 일어나 하이킹 정도로 생각하고 간단히 점심 샌드위치와 물을 준비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동남쪽 40마일 캐스트로 밸리(Castro Valley)에 위치한 레이크 샤보트(Lake Chabot) 장소로 향해 떠났다. 레이크 샤보트는 호수 주위로 경치가 수려하고 피크닉과 바비큐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많아 이 지역 한인교회들이 여름 야외예배 장소로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약속 장소인 공원 파킹 장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중 한 등산복 차림의 한국인을 만나 그의 안내로 차를 파킹하고 모임 장소에서 일찍 도착한 일행을 만났다. 대부분 생소한 분들인데 두 손을 가볍게 합장하는 것을 보고 불자들 이라는 것을 직감 할 수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샌프란시스코와 베이지역 불자들이 한 달에 한번씩 산행모임을 갖는다는 설명이다. 북 가주 지역에는 지역에 따라 사찰들이 나누어 법회를 갖고 있다. 각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불자들이 한 달에 한번씩 만나 서로 안부도 묻고 법문과 정보도 교환한다고 한다. 불자들과 산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연인의 관계처럼 보였다. 뒤늦게 스님이 도착하여 기념 사진 한 장을 찍고 12,42마일(20km)의 출발점을 향했다. 2-3 시간 정도가 소요될 것이라는 선두 인솔자의 말을 듣고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평소에도 주말마다 동네에서 1시간 정도 걷고 있기 때문에 2-3 시간이라는 것이 그렇게 먼 거리감을 느낄 수 없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출발했지만 조금 지나자 인글로잉 네일(in growing nail)로 고생하던 엄지 발톱이 약간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피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등산화를 벗어 속을 들여다 보고 싶었지만 혹시 본의 아니게 일행들에게 부담을 주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강행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경보 중 한 일행은 베이비붐어(baby-boomer)들이 첫 미국연금을 수령하기 시작했다는 말과 함께 2040년이 되면 3명의 근로자가 1명의 노인을 먹여 살려야 하는 최악의 연금 고갈 사태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뒤늦게 시작한 한국은 이미 심각한 연금고갈에 시달리기 시작하여 똑같이 내고 덜 받기라는 일시적인 방법으로 현 위기를 모면하고 있다. 이 날 트레일 코스 경주 대회까지 열리어 좁은 산길은 트래픽이 있을 정도로 붐비었다. 샤보트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산길은 도토리 나무로 완전히 하늘을 가리고 있었으며 호수에는 천둥오리들이 한가한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물에 평화롭고 한가한 정적을 느끼게 한다. 세상은 쉴 수도 없이 돌아 가는데 자연은 좀 천천히 돌아 가라는 듯 가을 오후의 햇살이 머리 위를 지나간다. 성철 큰 스님이 한신 말씀 가운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한 구절이 기억 난다. 자연에 인접해서 떠오른 스님의 말씀에서 또 다른 진리를 느끼게 한다. 트레일 코스의 반쯤을 지나니 벌써 시간은 낮 12시를 지나고 있었다. 시장 끼가 몰려와 가져온 샌드위치를 혼자 먹을 수도 없던 중 경험 많은 일행으로부터 간단한 스낵을 받았다. 이런 코스를 한국에서 갔다면 곳곳마다 먹을 것을 파는 상인이 있어 쉽게 요기를 면할 수 있는데 미국 공원에서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생활의 편리함과 자연 보호의 두 마리 토기를 찾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후손에게 물려줄 자연이기에 지금의 편리함 보다 자연 훼손 예방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다. 3 시간 완주를 하고 나니 다리가 부어 오름을 더욱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스님이 주신 공양 점심을 맛있게 먹고 서둘러 집에 올 수 밖에 없었다. 발바닥의 통증이 장난이 아니다. 30년을 기다린 트레일 경보는 이런 고통을 치르고 힘들게 얻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김동열 dyk47@yahoo.com 사진: 레이크 샤보트 전경 캐스트로 밸리 캘리포니아
30년여 미국생활 가운데 해보고 싶은 것 중에 하나가 등산이었다. 미국에서 등산이라면 말 그대로 높은 산을 오르는 등산(rock climbing)이 있고 또 하나는 도보여행이라고 부르는 하이킹(hiking)이 있다. 하이킹은 공원이나 유원지에 피크닉을 갔다가 공간에서 흔히 즐기는 여가 운동으로 많은 사람이 즐겨 찾는다. 그런데 등산도 하이킹도 아닌 트레일(trails)이 미국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운동이다. 트레일은 높은 산을 오르는 등산도 아니고 공간을 한가하게 유유자적 걷는 운동도 또한 아니다. 트레일은 그야말로 울창한 숲 속 길을 따라 아령 같은 손 운동 기구를 흔들며 빠른 걸음으로 걷는 다소 격렬한 경보 운동을 말한다. 필자는 토요일 아침에 보통 때보다 일찍 일어나 하이킹 정도로 생각하고 간단히 점심 샌드위치와 물을 준비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동남쪽 40마일 캐스트로 밸리(Castro Valley)에 위치한 레이크 샤보트(Lake Chabot) 장소로 향해 떠났다. 레이크 샤보트는 호수 주위로 경치가 수려하고 피크닉과 바비큐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많아 이 지역 한인교회들이 여름 야외예배 장소로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약속 장소인 공원 파킹 장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중 한 등산복 차림의 한국인을 만나 그의 안내로 차를 파킹하고 모임 장소에서 일찍 도착한 일행을 만났다. 대부분 생소한 분들인데 두 손을 가볍게 합장하는 것을 보고 불자들 이라는 것을 직감 할 수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샌프란시스코와 베이지역 불자들이 한 달에 한번씩 산행모임을 갖는다는 설명이다. 북 가주 지역에는 지역에 따라 사찰들이 나누어 법회를 갖고 있다. 각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불자들이 한 달에 한번씩 만나 서로 안부도 묻고 법문과 정보도 교환한다고 한다. 불자들과 산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연인의 관계처럼 보였다. 뒤늦게 스님이 도착하여 기념 사진 한 장을 찍고 12,42마일(20km)의 출발점을 향했다. 2-3 시간 정도가 소요될 것이라는 선두 인솔자의 말을 듣고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평소에도 주말마다 동네에서 1시간 정도 걷고 있기 때문에 2-3 시간이라는 것이 그렇게 먼 거리감을 느낄 수 없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출발했지만 조금 지나자 인글로잉 네일(in growing nail)로 고생하던 엄지 발톱이 약간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피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등산화를 벗어 속을 들여다 보고 싶었지만 혹시 본의 아니게 일행들에게 부담을 주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강행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경보 중 한 일행은 베이비붐어(baby-boomer)들이 첫 미국연금을 수령하기 시작했다는 말과 함께 2040년이 되면 3명의 근로자가 1명의 노인을 먹여 살려야 하는 최악의 연금 고갈 사태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뒤늦게 시작한 한국은 이미 심각한 연금고갈에 시달리기 시작하여 똑같이 내고 덜 받기라는 일시적인 방법으로 현 위기를 모면하고 있다. 이 날 트레일 코스 경주 대회까지 열리어 좁은 산길은 트래픽이 있을 정도로 붐비었다. 샤보트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산길은 도토리 나무로 완전히 하늘을 가리고 있었으며 호수에는 천둥오리들이 한가한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물에 평화롭고 한가한 정적을 느끼게 한다. 세상은 쉴 수도 없이 돌아 가는데 자연은 좀 천천히 돌아 가라는 듯 가을 오후의 햇살이 머리 위를 지나간다. 성철 큰 스님이 한신 말씀 가운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한 구절이 기억 난다. 자연에 인접해서 떠오른 스님의 말씀에서 또 다른 진리를 느끼게 한다. 트레일 코스의 반쯤을 지나니 벌써 시간은 낮 12시를 지나고 있었다. 시장 끼가 몰려와 가져온 샌드위치를 혼자 먹을 수도 없던 중 경험 많은 일행으로부터 간단한 스낵을 받았다. 이런 코스를 한국에서 갔다면 곳곳마다 먹을 것을 파는 상인이 있어 쉽게 요기를 면할 수 있는데 미국 공원에서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생활의 편리함과 자연 보호의 두 마리 토기를 찾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후손에게 물려줄 자연이기에 지금의 편리함 보다 자연 훼손 예방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다. 3 시간 완주를 하고 나니 다리가 부어 오름을 더욱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스님이 주신 공양 점심을 맛있게 먹고 서둘러 집에 올 수 밖에 없었다. 발바닥의 통증이 장난이 아니다. 30년을 기다린 트레일 경보는 이런 고통을 치르고 힘들게 얻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김동열 dyk47@yahoo.com 사진: 레이크 샤보트 전경 캐스트로 밸리 캘리포니아
2007-10-15 <미국일기> 월드시리즈를 기다리며
지난 1년 5개월 한국 생활을 마치고 미국에 돌아와서 가장 먼저 느낀 점은 미 프로야구(MLB) 시즌이 끝나 간다는 아쉬움과 박진감 넘치는 내셔날 풋볼리그(NFL)가 다시 TV화면에 돌아온 것을 보니 날씨가 추워지고 있다는 계절의 변화이다. 야구가 13세기 영국에서 처음 탄생한 운동 경기지만 꽃을 활짝 핀 곳은 미국이다. 미국인이 야구 좋아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게으름 속에서 즐길 수 있는 유일무이한 경기 때문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경기 진행 중에 잠시 자리를 떠나도 큰 변화를 찾기가 힘든 것이 바로 야구이다. 물론 절체절명의 순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농구와는 달리 매우 느린 템포로 진행 되는 경기에다가 끝날 때까지 2-3 시간 이상은 충분히 잡아 먹는 경기이다. 그러다 보니 TV를 켜 놓고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면서 즐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미국 어린이들이 초등 학교 입학을 전후로 가장 먼저 시작하는 운동도 바로 야구이다. 야구를 통하여 규칙 준수와 협동심을 배우고 단체생활 적응 훈련을 하게 된다. 어린이들에게 야구장은 가장 먼저 기본적인 사회 활동을 연수하는 수련장 같은 곳이다. 어린이들이 하는 야구를 리틀리그(Little League)라고 부르는데 오래 전에 월드 리틀리그(World Little League)가 결성돼 이제는 세계 곳곳에서 어린이들이 즐기는 운동으로 크게 발전되고 있다. 야구가 아직까지 축구만큼 세계 스포츠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미국을 포함한 미주대륙 및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에서는 뜨거운 인기 구기종목으로 흥행이 대단하다. 미국 메이저리그가 10월 중에 펼치는 결승전 월드 시리즈는 전 세계로 중계돼 큰 돈을 버는 것은 물론 라스베가스 도박꾼들까지 애를 태우는 머니 메이커(Money Maker)로 오래 전에 등장했다. 미국 야구가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크게 확산 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시원스럽게 스윙을 한다는 강한 인상과 다른 나라의 야구에 비해 홈런이 많아 관중을 매료 시킨다는 점이다. 특히 야구와 관련된 마케팅은 유태인의 상술을 뺨칠 정도로 발달 되어 어린이와 어른들의 주머니를 깊이 깊이 파고 들고 있다. 더욱 특이한 사항은 세계인들로부터 미국 메이저 리그 흥행이 뉴욕 양키스(New York Yangkees)가 월드시리즈에 진출하느냐 여부에 따라 크게 좌우 된다는 사실이다. 미국인들은 미 프로 야구팀 중 가장 부자인 뉴욕 양키스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비싼 선수들을 모두 싹쓸이 해가는 바람에 다른 팀보다 항상 좋은 성적을 낼 수 밖에 없는 점에 분노한다. 결국 가난한 지역의 팀들은 어린 선수들을 잘 훈련시켜 키우면 양키스가 모두 돈으로 유혹하기 때문에 좋은 선수를 유지할 수도, 좋은 성적을 낼 수도 없다. 결국 미 프로야구도 한국사회의 가장 고질적인 사회문제로 등장하고 있는 양극화 현상을 똑같이 겪고 있다. 초호화군단 양키스가 결승리그 초반에 탈락하면 미국인들은 그렇게 기분이 좋다고 한다. 결국 부자 구단 양키스가 패하면 자신이 부자를 이긴 것 같은 대리 만족을 느끼기 때문이다. 올해 양키스의 탈락은 미 프로 야구 감독 중 최고액 연봉을 받고 있는 조 토리 감독의 퇴출로 까지 이어져 대 수술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경제적인 관점에서 아메리칸 팀으로 불리는 양키스의 탈락은 세계인들로부터 흥행의 재앙을 불러 올 수 있다. 양키스가 빠진 월드시리즈는 흥행 참패를 불러 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의 애증의 대상인 양키스가 올해도 작년처럼 결승리그 1차전에서 클리브랜드 팀에 의해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으면서 흥행에 빨간 불이 켜졌다. 빌리언 달러(Billion Dollars) 비즈니스로 성장한 미 프로야구 팀의 올해 수지가 좋지 않다고 하는데 월드시리즈에서 마저 부진하면 내년 적자는 눈덩이처럼 커질 가능성이 더욱 높다고 한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뉴욕 양키스가 빠진 미 프로야구 결승리그를 구원할 수 있는 또 다른 인기 팀인 보스턴 레드삭스(Boston Redsox)가 아직 결승리그 진출에 남이 있기 때문에 수입에 변화는 적을 것으로 기대된다. 미 프로야구를 사랑하는 야구팬은 월드시리즈에 어느 팀이 남느냐에 따라 결국 미 프로야구 전체가 얼마나 건강하게 유지되느냐와 직결 되기 때문에 관심이 높다.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 월드 시리즈 경기 중에 발생한 1989년 이후 한번도 월드 시리즈 경기를 개최하지 못한 이곳 자이언트 팬들에게는 올해도 또 다시 내년을 기약해야 하는 아쉬움이 남는 해이기도 하다. 새 봄과 함께 시작한 야구가 긴 긴 뜨거운 여름을 넘어 서고 찬 바람이 감도는 늦 가을에 열리는 월드 시리즈를 기다린다는 말은 또 올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세월의 모퉁이에 있다는 것도 의미한다. 사진설명: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시리즈에서 탈락한 조 토리 감독((67•뉴욕 양키스) Koglo 미국 샌프란시스코 특파원 김동열 dyk47@yahoo.com
지난 1년 5개월 한국 생활을 마치고 미국에 돌아와서 가장 먼저 느낀 점은 미 프로야구(MLB) 시즌이 끝나 간다는 아쉬움과 박진감 넘치는 내셔날 풋볼리그(NFL)가 다시 TV화면에 돌아온 것을 보니 날씨가 추워지고 있다는 계절의 변화이다. 야구가 13세기 영국에서 처음 탄생한 운동 경기지만 꽃을 활짝 핀 곳은 미국이다. 미국인이 야구 좋아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게으름 속에서 즐길 수 있는 유일무이한 경기 때문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경기 진행 중에 잠시 자리를 떠나도 큰 변화를 찾기가 힘든 것이 바로 야구이다. 물론 절체절명의 순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농구와는 달리 매우 느린 템포로 진행 되는 경기에다가 끝날 때까지 2-3 시간 이상은 충분히 잡아 먹는 경기이다. 그러다 보니 TV를 켜 놓고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면서 즐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미국 어린이들이 초등 학교 입학을 전후로 가장 먼저 시작하는 운동도 바로 야구이다. 야구를 통하여 규칙 준수와 협동심을 배우고 단체생활 적응 훈련을 하게 된다. 어린이들에게 야구장은 가장 먼저 기본적인 사회 활동을 연수하는 수련장 같은 곳이다. 어린이들이 하는 야구를 리틀리그(Little League)라고 부르는데 오래 전에 월드 리틀리그(World Little League)가 결성돼 이제는 세계 곳곳에서 어린이들이 즐기는 운동으로 크게 발전되고 있다. 야구가 아직까지 축구만큼 세계 스포츠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미국을 포함한 미주대륙 및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에서는 뜨거운 인기 구기종목으로 흥행이 대단하다. 미국 메이저리그가 10월 중에 펼치는 결승전 월드 시리즈는 전 세계로 중계돼 큰 돈을 버는 것은 물론 라스베가스 도박꾼들까지 애를 태우는 머니 메이커(Money Maker)로 오래 전에 등장했다. 미국 야구가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크게 확산 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시원스럽게 스윙을 한다는 강한 인상과 다른 나라의 야구에 비해 홈런이 많아 관중을 매료 시킨다는 점이다. 특히 야구와 관련된 마케팅은 유태인의 상술을 뺨칠 정도로 발달 되어 어린이와 어른들의 주머니를 깊이 깊이 파고 들고 있다. 더욱 특이한 사항은 세계인들로부터 미국 메이저 리그 흥행이 뉴욕 양키스(New York Yangkees)가 월드시리즈에 진출하느냐 여부에 따라 크게 좌우 된다는 사실이다. 미국인들은 미 프로 야구팀 중 가장 부자인 뉴욕 양키스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비싼 선수들을 모두 싹쓸이 해가는 바람에 다른 팀보다 항상 좋은 성적을 낼 수 밖에 없는 점에 분노한다. 결국 가난한 지역의 팀들은 어린 선수들을 잘 훈련시켜 키우면 양키스가 모두 돈으로 유혹하기 때문에 좋은 선수를 유지할 수도, 좋은 성적을 낼 수도 없다. 결국 미 프로야구도 한국사회의 가장 고질적인 사회문제로 등장하고 있는 양극화 현상을 똑같이 겪고 있다. 초호화군단 양키스가 결승리그 초반에 탈락하면 미국인들은 그렇게 기분이 좋다고 한다. 결국 부자 구단 양키스가 패하면 자신이 부자를 이긴 것 같은 대리 만족을 느끼기 때문이다. 올해 양키스의 탈락은 미 프로 야구 감독 중 최고액 연봉을 받고 있는 조 토리 감독의 퇴출로 까지 이어져 대 수술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경제적인 관점에서 아메리칸 팀으로 불리는 양키스의 탈락은 세계인들로부터 흥행의 재앙을 불러 올 수 있다. 양키스가 빠진 월드시리즈는 흥행 참패를 불러 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의 애증의 대상인 양키스가 올해도 작년처럼 결승리그 1차전에서 클리브랜드 팀에 의해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으면서 흥행에 빨간 불이 켜졌다. 빌리언 달러(Billion Dollars) 비즈니스로 성장한 미 프로야구 팀의 올해 수지가 좋지 않다고 하는데 월드시리즈에서 마저 부진하면 내년 적자는 눈덩이처럼 커질 가능성이 더욱 높다고 한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뉴욕 양키스가 빠진 미 프로야구 결승리그를 구원할 수 있는 또 다른 인기 팀인 보스턴 레드삭스(Boston Redsox)가 아직 결승리그 진출에 남이 있기 때문에 수입에 변화는 적을 것으로 기대된다. 미 프로야구를 사랑하는 야구팬은 월드시리즈에 어느 팀이 남느냐에 따라 결국 미 프로야구 전체가 얼마나 건강하게 유지되느냐와 직결 되기 때문에 관심이 높다.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 월드 시리즈 경기 중에 발생한 1989년 이후 한번도 월드 시리즈 경기를 개최하지 못한 이곳 자이언트 팬들에게는 올해도 또 다시 내년을 기약해야 하는 아쉬움이 남는 해이기도 하다. 새 봄과 함께 시작한 야구가 긴 긴 뜨거운 여름을 넘어 서고 찬 바람이 감도는 늦 가을에 열리는 월드 시리즈를 기다린다는 말은 또 올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세월의 모퉁이에 있다는 것도 의미한다. 사진설명: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시리즈에서 탈락한 조 토리 감독((67•뉴욕 양키스) Koglo 미국 샌프란시스코 특파원 김동열 dyk47@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