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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2 시간과 어른
안중근 의사는 단 나이 37살에 나라를 생각하고 목숨을 걸고서 일본대사를 죽이려 했다 한다. 그때의 나는 단지 나 하나 먼 나라에서 뿌리내려 사는 것이 힘들어, 가끔은 밤에 잠을 자다 아침이 되면 일어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나이였었다. 어렸을 적에는 시간이 빨리 지나가서 얼른 어른이 되고 싶었다. 초등학교 때에는 성당의 큰 미사 수건을 머리에 얹고 결혼식장 신부의 베일처럼 올렸다 내렸다 하며 놀았다. 사춘기 때에는 엄마 옷장에서 몰래 멋진 옷을 꺼내입고 숨어서 영화도 보고 그러다 선생님께 들켜 아주 많이 혼이 났든 적도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고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공부보다는 세상 밖에서 사는 법을 배우며 깊은 생각 없이 당연한듯 살았다. 그러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막상 어른이 되어보니 모든 것이 신나고 재미있고 좋은 일만 가득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스스로가 해야 하는 결정이 두려워지고 원하는 것을 가지고 싶다면 무언가는 포기하고 비워야 한다는 것을 배워가며 나이를 늘려갔다. 결혼 후 혼자서 몇 년을 지낸 시간이 있었다. 둘이었다 다시 하나가 되어보니 더없이 외로웠고, 결혼 전처럼 친구들과 명동의 밤거리를 헤매고 다닌 적도 많았다. 남편의 부탁으로 제일 친한 친구는 주말이면 남편 대신 저녁도 사주며 조금만 지나면 다 좋아질 거고, 괜찮다고 위로하며 챙겨 주었다. 그렇게 기특하고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오랜 세월을 지켜봐 주었는데 갑자기 세상 밖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많이 울었다. 철없고 세상일을 잘 못할 줄 알았는데 잘하고 있고 기특하다는 칭찬을 얼마 전에도 해주던, 나의 편 한 사람이 또 줄어든 것이다. 점점 곁에는 마음으로 살펴주고 바라봐주는 이들이 줄어든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누군가를 보살피고 돌보며 용기 주고 칭찬하며 - 같은 편으로 해주어야 하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밖 먼 곳으로 떠난 삶의 나의 편들을 붙잡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참 많이 빈자리가 넓고 그립다. 37살의 안중근 의사의 나이가 떠오르면 부끄럽고 미안하다. 여전히 나 하나 제대로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아 그런저런 이유로 지금 이 자리에 이만큼으로 와 있다. 언제부터인지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것이 싫다. 그리고 어른이 된다는 것도 싫어 조금이라도 미루면서, 세상살이 잘 모르는 거처럼 어리광도 부리고 실없는 짓도 하며 억지 부려본다 .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3-01-31 사랑 그 소중함
사랑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뽀송한 털이 여전히 부슬거리는 아기 강아지 같은 사랑이라도 낯선 여행지에서의 수많은 사람 속 잠시 스쳐 지나가는 눈빛의 사랑이라도, 미워하고 싫어하고 원망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 왠지 모르게 점점 다른 사람을 향한 마음을 따뜻함 대신, 감정의 솟구침을 감추지 않은 채 그대로 분출되는 분노의 무서운 이야기들이 늘어가는 아침 뉴스에 눈을 감는다. 언제나 더 좋은 행복한 날이 기다리고 있는 내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고 있고 또 믿고싶다. 해가 짧은 겨울 하루를 끝내고 다리에 둔 힘 내려놓고서 사랑하는 연인들이 나오는 - 부드럽고 아름다우면서 간지럽고 유치하지만, 저절로 입가의 미소가 생겨지는 드라마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잔잔한 그러면서 미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으면서 시간으로 견디며 이루어가는 사랑 이야기를 제일 좋아하고 또 즐겨본다. 비밀스럽고 위태로운 삼각관계도 아니고 오래 준비한 무서운 복수도 없고 또 지독한 원망의 과거도 없는, 특별히 유명하고 이쁘고 잘생긴 주인공이 아닌 담담한 두 사람이 만나 서로 바라보며 헤어지는 줄거리로 내 마음은 담겨진다. 가슴 속에 품고 있는 마음을 유난히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 특별한 무언가로 놀라게 감동을 주어야 하고, 만난 날을 기억하여 지나가는 숫자의 날짜로 확인하는 사랑보다, 그냥 견디며 지나온 시간으로 다듬으면서 이어가는 사랑이 진심이라 믿는다. 스스로 오랫동안 지키고 가져온 수많은 것 중에 나의 오래된 사랑도 함께 있다. 20살도 되기 전에 만나 지금까지 여전히 같은 곳을 바라보며 서로 아픈 무릎을 다독이면서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내가 품은 마음은 다른 색상으로 더 이상 번지지도 바래지도 않을 것이고, 오로지 - 사랑 그 소중함으로 나를 빛나게 할 것이다. 매년 2월이면 유난히 붉은 장미가 많이 보인다. 100만 송이 장미의 향기가 한꺼번에 번져 나가는 사랑의 달이다. 싸우고 미워하고 원망하는 것보다 - 견뎌내고 버티면서 지켜온 오랜 시간도 대견하지만, 비록 짧은 하루만의 풋사랑이라도 사랑하는 것이 더없이 좋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3-01-01 그리움
그립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나 시간 혹은 사물을 보고 싶거나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다. 그렇게 2년 넘도록 가지 못한 서울을, 억지로 막아놓았다는 이유로 더 많이 그리웠고 꼭 가야만 한다는 이상한 욕심으로 혼자 떠났다. 사실 몇 번을 연기하고 벌금까지 낸 비행기표와 호텔을 핑계 삼아, 말리는 식구들을 모르는 척하고서는, 서둘러 가방을 챙겨 떠난 것이다. 도착한 비행기 안에서, 해가 지는 인천공항의 활주로에서 바라본 노을은 더없이 붉었고 왠지 모르는 설렘에 가슴도 마음도 흔들렸다. 강남의 작은 호텔에 들어서자 벌써 깜깜해져 있었고, 이곳에서는 아는 사람이 없다는 용기로 혼자 당당하게 불고기 백반에 맥주 하나를 시켜 늦은 저녁을 먹었다. 불과 하루 전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의 또 다른 나를 생각하며 웃고 또 웃었다. 그렇게 시작한 서울에서, 제일 보고 싶은 친구를 만나자마자 가고 싶은 곳과 먹고 싶은 음식들의 이름들을 순서대로 나열하면서, 마음껏 즐길 준비를 하고 들떠있었다. 동대문 시장으로 시작한 여정은 3일째 되는 날부터 이상하게 온몸이 움직이지 못하게 아프기 시작하였고 또 높은 열로 인해 결국 병원을 찾았다. 오해할만한 심각한 병은 아니지만 심한 몸살과 과로와 시차로 인한 병이라 무조건 쉬어야 한다는 경고와 정말 한 꾸러미의 약을 처방받아, 드디어 호텔 방에서 아프기 시작했다. 함께 20일 동안 놀아 주기로 한 친구는 종류도 다양한 죽을 들고 나타나서는 웃음을 참지 못하였고, 어쩔 수 없이 모든 계획은 다 사라져버렸다. 죽과 물만 먹으며 일주일을 넘겨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아 배달하여 먹은 막국수는 독이 되었고, 결국 그날 밤 119를 불러 응급실에 실려 가는 이상한 사건도 생겼다. 병원에서는 의료보험이 없는 외국인이 되었고, 그렇게 아픈 통증은 한밤의 응급실에서 기다리는 2시간 동안 사라졌고, 배시시 멀쩡하게 침대에서 일어나 괜찮다고 하고선 택시를 타고 유유히 호텔로 돌아왔다. 무조건 일정을 앞당겨 살고있는 미국으로 돌아가면 아픈 것도 다 사라질 것 같아 서둘러 떠났고, 지금은 건강을 회복하고 잘 지낸다. 그러나 살던 곳을 떠나 먼 곳에 살고있는, 가슴 밑바닥 아래 숨겨놓은 그리움 ? 보고 싶다는 간절함은 돌아가 살지 않는 한 없어지지 않을 거라는 것 잘 알고 있다. 다시금 건강이 좋아지고 일상으로 돌아와 2023년의 새 달력을 펼치면서, 막연한 한가득의 그리움으로 남아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 또 서두른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2-12-01 언어의 온도
책을 읽으며 걸어가는 하루하루의 삶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질 것이고 또 지혜가 생길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책을 선택할 때이면 되도록이면 예술적이며 어려운 것을 읽으려 하고 제대로 의미를 느끼려 한다. 요즘 읽었던 이기주라는 작가의 책 제목이 "언어의 온도"이다. 내용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단번에 알아챌 수 있다. 책 속의 작가는 나이를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굳이 어른 흉내를 내려고도 하지 않는다. 넘치는 지식의 홍수 속에서도 자신을 똑똑한 사람으로 자랑하지 않는다. 그만큼 그는 다른 어떤 것으로 스스로를 표현하고 덧붙이지 않아도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다치고 아파하면서 살아보니 진짜는 과거의 경력과 학벌과 나이가 아닌, 바로 실력이라는 것을 벌써 알아차린 것 같다. 또 그는 불타는 남녀 간의 사랑과 본능적인 엄마의 사랑을 구별하지 않는다. 사랑은 그냥 사랑인 것이다. "흔히들 말한다. 상대가 원하는 걸 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허지만 그건 작은 사랑인지도 모른다. 상대가 싫어하는 걸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큰 사랑이 아닐까"라는 문장에는 더 이상 평가하고 따질 이유가 없다. 작고 사소하고 평범한 것에 의미를 두는 걸 좋아하고 그런 것을 표현하면서 살아야 한다. 가끔 누군가의 신뢰와 기대와 칭찬의 말에 가슴 설레며 기뻐했던 날들이 있고 또 누군가의 말이라는 화살을 맞고 오랫동안 그 상처를 위해 노력했던 날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말과 글에는 나름의 따뜻함과 차가움이 있다."고 한다. 이젠 뒤돌아보며 정리해야 하는 한해의 마지막 거리쯤에 와있다. 그렇다고 서두르거나 앞서면서 재촉하지 않아도 괜찮다. 서로에게 가슴으로 번지는 따뜻한 온도의 말로 채워줘야만 그 기억과 믿음으로 그나마 선선히 걸어갈 것이다. 언어에는 뜨겁고 차갑다는 온도만 있는 것이 아니라 품위도 있고 인격도 있다. 여전한 실수와 미안함으로 미처 제대로 어른이 되지 못한 중간의 자리에 머무르고 있지만, 아직도 책 속에 길이 있다고 믿고 그렇게 간간이 책을 읽으며 살 것이다. 현명한 그리고 지나온 삶의 진한 자국들을 남긴 고전을 읽으며 다시금 오늘을 다듬으면서 살겠지만, 가끔은 어깨에 올려져 있는 가식도 포장도 내려놓고, 평범한 그러나 나의 이야기 같은 책을 읽으며 사는날도 참 좋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2-11-02 가을에 전하는 안부
옛날을 돌아보며 후회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그것을 싫어한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굳이 마음 땅속 깊은 곳에 묻혀있는 것을 꺼내어 다시 고치고 부수는 일들이 부질없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지금도 좋은 사람들과의 관계는, 세월이 많이 흐르고 더없이 멀리 떨어져 있어 자주 만나지 못하여도, 예전을 되돌아보며 그리워하고 미소 지으며 행복해한다. 오랫동안 무소식이 희소식이겠지 하며 먼 곳에 살고 있는 그녀가, 몇년 만에 소식을 묻는 문자를 꽤 늦은 토요일 밤에 보내왔다.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이 그녀는 지금 무척 외롭고 누군가가 많이 그립다는 것이었다. 나와는 비즈니스로 만나 서로를 알아보며 가까워졌고 또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다정함은 잊지 않고 있으며, 무엇보다 내게 달려와 준 것이 신기하고 고마웠다. 반가운 마음과 설레임으로 열어 보니, 다른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잘 지내?"라는 짧은 안부가 괜스레 아프고 연민이 가는 것이, 아마 토요일이라는 느슨함과 까만 밤이 주는 묘한 뉘앙스 때문일 것이다. 그녀에게 정호승 시인의 "사람은 다 외롭다. 외로우니깐 사람인 것이다." 라 보냈더니 그녀는 "사랑하다 죽어버려라…"고 답을 했다. 갑작스러운 다른 사람의 외로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달래며 잠들게 해야 할지 모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좋은 글이에요…견뎌야죠" 하면서 잘 자라는 인사와 함께 느닷없이 왔든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며칠 동안 내내 그녀 생각을 하며 지냈다. 다시 햇살 밝은 날에 전화를 할까 망설이다, 무얼 하려는 것보다는 그냥 지나가는 옛날로 만들어지는 것이 제일 나은 거라 생각했다. 이렇게 하나의 관계는 설명 하나 없이도 길게 이어간다. 나와 그녀의 기억 속에 한동안 머무르다, 또 다른 가을 늦은 밤 문득 서럽게 외로워지면 서로를 찾아내어 지나가듯 짧게 마음을 열어 놓을 것이다. 내어놓지 못하고 덮어놓은 무거운 장독간의 뚜껑처럼, 한 번쯤은 그것을 열어 진한 햇빛으로 말려주어야만 밑에 있는 무언가는 더없이 잘 익어갈 것이며 깊어질 거라 믿어본다. 이제 다시 시(詩)가 고픈 가을이다. 내 마음도 잘 모르면서 다른 이의 깊은 마음의 진한 시를 이해한다고는 하지 않는다. 다만 전해온 잊지 않는 마음을 받아들이면서, 다 늦은 가을의 외로운 이들에게 안부를 묻는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2-10-01 흐르는 강물처럼
늘 조심하며 산다. 사실 무언가를 알게되면 더 많이 생각하게 되고 그것으로 염려하고 걱정하면서, 새로운 변화보다는 지금의 항상 곁에 있는 익숙한 모든 것에 안심한다. 오래전부터 함께 책을 읽으며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있다. 책을 읽는다는 목적보다 책 속에서 만나는 다른 사람들의 살아가는 지혜와 길을 찾아, 조금은 더 행복해지고 현명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만난다. 읽고 있는 책의 깊은 곳에 숨어있는 - 분명 글쓴이가 진정으로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의미를 찾아, 각자의 인생도 돌아보며 서로 다른 무늬의 결로 살아가는 삶을 나누는 만남이다. 알지 못하는 사이의 세월이 쌓여가면서, 책의 두께만큼 나눈 마음들은 귀한 보물이며 소중한 인연이다. 이제는 책을 읽는다는 것이 더 이상 지식을 넓히는 것이 아닌, 지나온 세월과 세상의 울퉁불퉁한 길을 받아 들이는 귀한 시간으로 바뀌었다. 알면 알수록 겸손해지며 머리를 숙이게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종이 위의 단순한 활자 앞에 겸손하게 눈을 맞추며 집중하는 순간, 가슴을 열고 한장씩 전해주는 글들을 읽으면서 흐름을 따라 걸어간다. 굳이 말하지는 않지만, 모두의 가슴 속에는 꺼내어서, 쓰고 말하고 싶은 마치 10권이 넘을 자신의 긴 소설을 품고 있지만, 다른 이가 쓴 책을 읽고 위로받으며 차곡차곡 풀어가며 살아간다. 서로의 어깨를 기대고 어깨를 나누는 마음으로 더 많이 오래 같이 갈 거라고 믿는다. 어느덧 세상을 알게 되고 그러면서 더 조심하는 염려의 나이가 되어간다. 고집부려 거스르지 않고, 지금 있는 그대로 안도하며, 오래전에 일어난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은 어차피 그리될 일이라고 편안해하며, 흐르는 강물처럼 선선히 흘러 더없이 넓고 큰 바다로 다다를 것이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2-08-01 고유의 색상
세상의 모든 것은 고유의 색을 지니고 있다. 눈으로 보여지는 똑같은 검정색 하나하나도 채도가 다르고 명도가 다르다. 어느덧 2년 반을 넘겨버린 시간을 스스로의 의지와 목적이 아닌, 강하고 이상한 억지의 떠밀림으로 - 다른 곳은 바라보지 못한 채 오로지 생존만 지키고서 사는 상황 안에서 버티고 있다. 오랜 세월 만들어온 살가운 인간적인 연결과는 동떨어져 마치 무인도에 남겨진 사람처럼, 혼자만의 장소와 시야와 마음으로, 바로 우물 안의 개구리가 돼버렸다. 다른 풍경도 보고 새로운 사람들도 만나고 무언가를 부딪쳐야만 반사적으로 튕겨져 나오는 파닥거리는 생생한 본능도 살아날 것인데, 그냥 지나가는 시간 따라 무덤덤한 모양으로 남겨져있는 것이다. 어느 하루 그림을 그리려 텅 빈 하얗고 네모진 캔버스를 앞에 놓고 앉으면, 막막하면서 두렵고 순간 무섭다. 무엇을 그리며 무슨 색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모르는 체, 사각의 나무로 만든 판 위에 던지듯 나를 내려놓는다. 감정의 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은 막막함으로, 잘해야 한다는 조바심과 제법 괜찮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욕망도 끄집어 놓는다. 세상 밖으로 나가 각 생물체의 부딪힘으로 보여지는 생명의 불꽃 송이도 바라보고 또 내 안에 숨어있는 감성과 열정을 밖으로 내보내야 할 것 같은데도, 감정은 미끄러지고 의욕은 힘이 빠지고 생각은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우두커니 앉아 있다. 그러나 문득 이것은 여전히 나만의 색상을 찾으려 애쓰는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일요일 성당 안 미사 중에 떠올랐다. 겸손의 무릎을 꿇고 원하고 소원하는 마음에 고스란히 집중하면서 같은 공간에서 깊은 마음 하나로 기대고 올리는 하나하나의 기도가, 바로 각자 본연의 색상인 채도와 명도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심하고 여전히 잘못하고 자주 화를 내며, 모자라는 모든 것들을 부러워한다. 그러나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무력함보다는, 자유로운 마음으로 편안함으로 적응하며 지켜가는 넉넉한 삶의 방식을 배워가는 사람이기를 또 희망한다. 무엇으로 어떻게 밀쳐지고 어느 방향으로 전환점을 돌아가게 되더라도, 포기하지 않은 채 내가 지닌 나만의 고유 색상을 지키며 그려지는 괜찮은 작품이었으면 한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2-06-30 사는 냄새
언제부터인지 가끔 어떤 사람을 만나면, 문득 예전 어느 기억 속에서의 아늑하고 향긋한 냄새를 떠오르게 하는 순간이 있다. “아~ 그게 무엇이었지?” 하면서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그냥 흘러가는 따뜻한 기억 속의 냄새이다. 그렇지, 사람에게는 저마다 인생의 스쳐 가는 골목길 풍경이 다르듯, 서로 다름의 향으로 풍겨 나오는 것이다. 정말 환한 햇살만 넘칠 것 같았던 눈부신 젊음이었을 때는 사는 냄새를 한 번도 맡아보지 못했었는데, 어느 날부터 돋보기안경을 써야만 편하게 책과 신문을 읽을 수 있고, 해가 짧은 겨울밤에 하는 운전이 왠지 망설여지고, 소소한 작은 일들을 잘 잊어버려 부엌에 걸어놓은 기다란 달력에다 큼지막하게 써놓게 되면서부터 예민해진 거 같다. 살다보면 좋지않은 것도 오지만 좋은 일도 덤으로 함께 오는 것이라 믿으며 산다. 그렇게 세월 따라 오래 사용한 것에 대한 고장으로 오는 거라면, 순순히 저항하지 않고 백기 들어 항복하고서 받아들인다. 한때 영롱한 청춘으로 열렬히 연애하느라 학교 수업도 간간이 빼먹으면서, 결혼 전 남편이랑 명동 어느 구석진 술집에서 매운 안주 맛을 배우던 시절이 있었다. 미국행을 결심한 남편은 모든 청춘이 그러하듯 가난했었고 새로운 삶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투명한 초록색 병의 소주를 마시곤 했다.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든 때라 마냥 곁에서 고민하는 모습조차도 좋아 어디든 따라다녔지만, 남편은 미국으로 떠났고 오롯이 혼자 남겨진 것이 싫어 늘 늦은 시간까지 친구네 화실에서 지내다 텅 빈 버스를 타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비가 오는 날, 갑자기 버스 안에서 낯익은 냄새가 느껴져 놀랍고 반가운 마음에 뒤돌아보니 어떤 술 취한 아저씨의 냄새였던 것이다. 어쩌다 가끔 떠올려보면 방황하는 젊음의 시간 냄새가 겨우 술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우습지만, 그래도 그때의 유치함과 진지함이 또 다른 상처의 냄새였다고 변명하며, 내게 왔든 그날들 모두가 아름다운 삶의 조각들이며 소중하다. 여전히 정작 스스로의 냄새는 맡지 못하지만 - 오랜 시간 속에서 배운 본능적인 감각과 느긋함으로 - 속도 조절 없이 오는 세월의 모든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살고 있다. 어울리지 않는 욕심도 이제는 소용없고 의미도 없다. 다만 멀리서 눈빛으로 마주쳐도 닮고 싶고, 길게 말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존경의 머리가 숙어지며, 지니고 있는 손때 묻은 작은 손수건 한 장이라도 갖고 싶어지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사는 냄새의 제대로 된 진한 흉내라도 내보련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2-06-02 마음속에 있는 지도 한장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제일 먼저 어디로 갈까 하며 목적지를 결정한다. 그러면서 가고자 하는 곳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가면 빠르게 갈 수 있을지 궁금한 마음에, 서둘러 지도를 챙겨본다. 결국 산다는 것도 마음속에 있는 지도 한 장 가지고서 떠나는 긴 여행 같다는 생각이다. 잠시 떠나는 것이 아닌, 삶이라는 여정의 지도를 따라 세상의 숱한 여러 갈래의 길 위에서 나만의 선택을 하고 또 가끔은 길을 잃고 막막한 무서움에 있을 때도 있지만, 뜻하지 않은 산들바람을 맞으며 숨차게 올라온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안도감에 서있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 잘 알고 있다. 다만 모르는 척 아니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영원할 거라 착각하며 살지만, 모두가 같은 목적지의 같은 길의 끝이다. 모르는 거 투성이의 미국 생활에서 운전보다 먼저 배운 것이 지도를 보고 길을 찾는 법이었다. 넓디넓은 땅에서 처음 가보는 길을 가는 유일한 방법이, 지도를 보며 하나씩 길 이름을 읽고 더듬거리며 골목을 돌아 집 번호를 확인하면서 찾아가는 것이었다. 목적지를 찾느라 복잡한 길 위에서 조금 서성거려도 뒤를 따르는 차들도 이해해주면서 기다려 주던 시절이다. 작은 글씨의 동네 이름과 큰길이 만나는 교차로를 노란색 형광펜으로 길게 그으면서, 한번 왔든 길의 기억을 떠올리며, 잘도 돌아다녔다. 그러든 어느 날 짧은 여행으로 떠났든 남쪽 1번 도로가 심한 비바람으로 끊어져 있어 급히 지도를 보고 찾은 길에서, 너무 일찍 모퉁이를 돌아버려 황망한 산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체, 해는 저물고 이른 점심 탓에 배도 고프고 또한 자동차의 연료 표시도 거의 바닥으로 깜깜한 어둠 속에 갇힌 적이 있다. 막막함과 두려움으로 한참을 헤매다 어쩌다 올라선 산 귀퉁이를 돌자마자 갑자기 환해진 불빛의 길 위 주유소를 만나는 신비한 놀라움에 깊은숨을 내쉬며 큰 울음을 터트렸었다. 물론 삶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도, 서두르지 않고 그나마 길을 잃지 않고 가려고 마음속 지도를 몇 번이나 보며 모퉁이를 확인하고 가지만, 가끔은 막다른 골목길과 짙은 먹색의 어둠 속에서 헤매이다 뜻하지 않은 경이로운 환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던 적도 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이젠 색도 바래졌고 접어둔 네 모퉁이가 닳고 해어져 잘 보이지 않는 종이 지도와, 철들면서 챙겨본 마음속에 펼쳐져 있는 얼룩투성이의 낡은 지도 . 그 둘을 함께 품은 체, 기다란 미국에서의 삶을 여전히 살아간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2-06-02 자연인
까똑까똑….5분도 채 되지 않아 또 카톡음이 울린다. 이번에는 샛노랑색 서핑보드를 들고 서 있는 사진을 보내왔다. 하얗게 부서지고 있는 파도와 야자수를 배경으로 온통 검게 그을려 있는 모습은 원래부터 그곳 원주민인가 싶을 정도다. 모래사장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다른 한장의 사진속에는 코코넛 워터와 바나나 꾸러미가 보인다. 그리고 사진 밑에 써 있는 한 줄의 메시지에 나는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넘 행복합니다. 나는 여기서 뼈를 묻을겁니다" 한 달 전쯤 한국에서 날아온 그의 갑작스런 통보에 나는 좌불안석이었다. 이곳에서 대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 대기업에서 승승장구 잘 나가더니 다시 미국으로 이주를 하겠다는 거였다. 십 년이상 성실하게 일한 댓가로 직급도 높아졌고 월급도 만족해 하더니 웬일인가 싶어 걱정이 앞섰다. 경제가 어려운 이곳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할 그의 앞길이 심히 염려 됐으나 우려했던 내 생각과 달리 그는 속전속결로 하와이에 짐을 풀었다. 도착 즉시 구두와 넥타이를 집어 던지고 현란한 꽃무늬 셔츠와 줄무늬 샌들을 신은 섬나라 하와이언으로 탈바꿈을 했다. 게다가 비타민 D 섭취를 위해 자동차를 구입하지도 않고 매일 10마일 이상을 걸어 다닌다는 이야기에 한국에서의 화이트칼라 샐러리맨 생활이 지겹도록 고단했음이 느껴져 안쓰러웠다. 오늘도 통화중에 나는 잔소리를 퍼부어댄다. "얘야, 해수면 상승으로 상어가 떼거지로 몰려 든다는 뉴스가 떴어. 제발 파도 깊이 들어가지마라." "에구 걱정마셔, 아직은 물이 차가워서 낮은 물가에서만 놀아요" "너울성 파도도 조심해야 혀" "엄마. 내가 애냐구. 제발 걱정은 그만해" "근데 아들아 너 수영은 할 줄 아니?" "아직은… 개구리헤엄 만 칠 줄 알지 머" "바다에 나갈때는 꼭 빨강 노랑으로 눈에 잘 띄는 수영복을 입으렴" "엄마. 진짜 왜그래? 짜증나…" 전화가 일방적으로 툭 끊긴다. "띵~~~" 나는 가 본 적도 없는 마이우섬의 검푸른 바다가 분명히 하늘을 닮은 평화로운 파란색 일거라고 믿어 버린다. 답이 없는 수화기 너머에 대고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얘야. 물고기를 좋아하더니 드디어 바다 자연인이 됐구나. 엄마는 산나물을 좋아하니까 훗날 산으로 올라가야겠다" 에스더 최(수필가) 버클리문학협회 회원
2022-05-02 집은 그 사람이다
누군가의 초대로 집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눈으로 냄새로 또 순간적인 느낌으로 모든 것이 보여지고 느껴진다. 말하지 않아도 설명하지 않아도, 그 안에 자리 잡은 채 보듬고 있는 모든 것 스스로가 낯선 사람에게 속삭이며 표현해준다. 다른 이들을 위한 넓이와 높이가 아니라 나를 위한, 선물 상자의 화려한 포장지를 벗겨내려는 조바심처럼 바깥의 나를 벗고 온전한 속살을 꺼내놓는 곳이다. 벗어버리는 시원함으로 무겁게 치장한 무게를 내려놓으면서 아무도 모르는 안도의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집이라는 공간이다. 맨 처음 모르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입고 있는 옷과 모습으로 처음 마음이 시작한다. 조금씩 시간이 흘러가고 서로를 알아보면서 마음을 열고 편안해지는 어느 날, 자신이 사는 곳으로 초대하여 속내를 보여준다. 집이라는 건 이쁜 옷을 입고 진한 화장을 하고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하여 한순간에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지나온 시간과 함께 동화되어 본인도 모르는 사이 삶의 눅눅한 자국들과 정성이 남아있는 곳이다. 몇십년 전 겨울 아주 많이 힘든 시기를 겨우 넘긴 후, 잃어버렸든 집이 그리워 다른 이들의 집을 놀러 다닌 적이 있다. 이쁘게 가꾸며 사는 모습이 부러웠고 언젠가 다시 집이 생기면 나도 그러리라 꿈꾸고 희망하였다. 시간이 흐른 후 결국 나만의 집을 갖게 되었고, 원하는 그림을 마음껏 벽에 걸고 오래된 골동품들을 꺼내 놓으며 숨겨둔 욕심을 아주 기다랗게 펼쳐 놓았다. 화려하지 않아도 크지 않아도 비싸지 않아도 아무 상관 없다. 다만 무엇을 품고 어떻게 견뎌내고 있으며 그동안 걸어온 긴 걸음들을 편히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가끔 한밤중 선잠에 깨어, 지금 있는 곳이 어딘가 싶어 구겨진 긴 잠옷 차림으로 온 집안을 휘휘거리며 돌아다니곤 한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잘 있는지 또 스스로 지니고 있는 지나온 흔적들은 괜찮은 모습인지 확인하고 싶어서이다. . 이제는 채우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살고있는 공간 . 집이 바로 자신이 살아온 세월과 자욱들을 그대로 드러내는 거처럼, 더는 감추고 싶지도 포장하고 싶지도 않다. 아직도 여전히 큰 묶음으로 남아있는 시간을 나누며 살아갈 준비에, 설렌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2-05-01 피타 브레드
금요일 오후, 장바구니를 들고 마켓을 간다. 우선 매장을 한바퀴 둘러 보고 난 뒤 종이에 적어온 필요한 품목의 리스트를 보며 물건을 카트에 담기 시작한다. 아침식사용으로 계란과 라이스 밀크, 아몬드 밀크를 구입하고 블루베리와 아보카도를 이리저리 살핀다. 그러나 정육코너 앞에선 몇 주 전과 다른 가격표에 망설임을 반복하다가 슬며시 손에 잡았던 것을 내려 놓기로 한다. 나는 다시 냉동코너를 들여다 보다가 한동안 품절이었던 한국산 파전과 비빔밥을 발견하자 절로 미소가 번진다. 미국 마켓에 당당하게 진열되어 있는 우리나라 상품이 무척 자랑스럽다. 쇼핑을 끝낼무렵 빵 코너로 들어선다. 맛있게 만들어진 빵들이 고소함을 뽐내며 내 손을 기다린다. 하지만 나는 주저없이 모양도 없고 냄새도 없는 그 빵을 선택하기로 한다. 그리고 혼잣말로 속삭인다. "내 사랑은 바로 너뿐이야." 집으로 돌아온뒤 나는 서둘러 그것부터 꺼내어 오븐에 올린다. 오븐 틈새로 살며시 퍼지는 구수함이 저 먼 중동의 모래바람을 실어 나를 그리스까지 안내한다. 어느새 부엌은 찬란한 황금 밀밭으로 넘실거린다. 어렸을 적 엄마가 가마솥 밥위에 쪄주던 쑥개떡 모양을 닮은 넓적한 이 빵의 반전은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한 매력에 푹 빠져들게 된다. 언제부터였을까? 한조각 빵을 입에 넣고 씹을 때마다 이스트를 넣지 않은 피터 브래드처럼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입안에서 맴돌던 밀 반죽이 마침내 침샘에 녹여져 목구멍을 타고 흘러 내려갈 즈음 인생길 굽이굽이 돌아 여기까지 살아내는 동안 걸어온 삶의 대부분은 부풀어 오른 빵을 포장하고 있었다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이스트를 넣지 않은 삶은 무엇일까? 고민하던 중 한 여인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학벌과 지위와 인물, 배경까지도 자랑하고도 남을 K의 스펙은 그녀를 아는 모든 이들의 부러움이다. 그러나 K는 언제 어디서나 결코 나대는 일이 없다. 원래 타고난 성품이려니 생각했으나 그녀의 고백으로는 중단없는 '내려놓음'의 연습이라고 귓띔을 한다. 대중앞에 서기라도 하면 때를 만난듯 자화자찬으로 흥분해 하는 나와는 사뭇 다른 그녀, 습관처럼 거품을 집어 넣었던 나의 일상생활의 흔적을 지우개로 말끔히 청소하기로 작정한 오늘, 이미 그녀를 닮고 있는 것 같아 즐겁다. 에스더 최(수필가) 버클리문학협회 회원
2022-04-01 눈 길
아침 내내 오락가락하던 빗방울이 오후 들어서는 시원하게 쏟아질 것처럼 하늘이 잔뜩 찌푸려 있다. 밖을 내다보며 가뭄에 단비를 기대 했으나 스산한 날씨는 일찌기 하루를 마감하려는 듯 어둠을 끌어 당기고 있다. 다소 실망한 마음으로 곧 어두워질 거리를 응시한다. '이 맘때 쯤이면 병원 모퉁이를 돌아 왼쪽 샛길로 들어 설 시간인데…..' 날씨 탓인지 오늘은 유난히 그녀의 걱정이 앞선다. 기다리다 못한 나는 손전등을 손에 들고 현관문을 나서기로 했다. 그 때 저 멀리 벚나무 옆으로 애완견 루시와 함께 조심조심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휴~' 나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몰아쉰다. 이웃집에 사는 로즈 할머니는 늘 나의 관심안에 있다. 구십이 가까운 나이에도 매일 새벽 4시 30분을 시작으로 하루에 세 차례나 걷기 운동을 하신다. 위태로운 걸음 걸이로 좁은 도로를 지나 건널목을 통과하고 병원 앞을 지나 마트까지 오가는 규칙에는 날씨에 상관없이 변동이 없다. 오래전 혼자가 되신 로즈 할머니가 걷다가 행여 넘어질까 봐 조바심으로 지켜봐야 하는 나는 그녀의 출입시간을 꼼꼼히 체크해야 한다. 아직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의지 강한 로즈가 눈치채지 않도록 무언의 파파라치가 된 세월도 어느새 10년이다. 로즈 할머니를 항상 내 마음에 담고 있는 것처럼 나는 요즘 또 다른 노인의 모습이 눈에 밟혀 마음이 시리다. 러시아가 무차별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지 4주째, 그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우크라이나 백발의 할머니가 비닐 봉지를 손에 들고 다리를 심하게 절룩이며 필사적으로 탈출하고 있는 장면이다. 그 모습은 일제 침략으로 인해 우리 어르신들이 겪었을 뼈아픈 고통으로 내게 전달되어 온다. 권력과 탐욕으로 21세기 바벨탑을 쌓고 있는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무모한 행보와 달리 군사적 무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손에 손을 맞잡고 뭉친 용맹한 우크라이나인들의 모습에서 다윗과 골리앗의 역설적인 역사가 떠 오른다. 감히 정치계의 비하인드 내막을 알 수 없는 나로서는 그저 선한 사람들이 반드시 승리하길 간절히 소망한다. 포화 속에서 어린 러시아 병사의 겁먹은 눈망울과 다른 한편에서 울음을 터트리고 있는 고아들의 절망적인 눈빛의 교차점에서 나는 다시 푸틴의 시선을 따라가 본다. 이기심과 욕심에 끌려 세상을 향해서만 돌진하고 있는 푸틴은 두 개의 눈을 가졌으나 실상은 애꾸눈이였음을 재차 발견한다. 그러나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실상은 내면에 들통나지 않은 이기심과 오만으로 나 역시 때때로 외눈박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눈 길은 오직 나약하고 억울한 일에 눈물 짓고 있는 이웃을 향해 돌린다. 에스더 최(수필가) 버클리문학협회 회원
2022-04-01 음악
온종일 집안에 음악을 켜놓고 있다. 언젠가 들었던 것 같은 그러나 제목이 무엇인지 작곡가가 누구인지 이 곡을 만들어진 때가 언제인지도 모르는 체, 흘러나오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또 흘려보낸다. 구속이 아닌 그윽함으로 감싸 안으며 무엇을 하든 편안하고 보호받는 평화스러운 느낌이다. 어쩌다 마음이 좋지 않은 날은, 일부러 천천히 길게 오래 느껴 헝클어진 마음을 다른 곳으로 비껴가게 하려 다시 붙잡는다. 사실 어릴 적 우리 집에서는 유행가를 들을 수가 없었다. 절대적인 엄마에게 심하게 야단맞는 일이었으며 심지어 아버지께서도 좋아하는 배호의 노래를 들을 수가 없었다. 온종일 아픈 환자들을 치료하며 받은 피로를 - 차마 집에서는 엄마의 성화 때문에 듣지 못하시고 - 늦은 여름 해가 넘어가는 시간, 홀로 남은 병원에서 배호의 노래를 듣고 계시든 아버지가 떠오른다. 서쪽 황혼이 지는 오렌지빛의 노을을 한가득 얼굴에 담고서 "돌아가는 삼각지"를 들으며 먼 곳을 바라보고 계시든 중년의 아버지에게는, 바로 그 순간이 진정한 위로이었을 것이다. 남자의 어깨 위에 올려진 삶의 무게를 잠시 잊고 나 하나로서 그 자리에 계셨던 것 같다. 음악이 그처럼 위로가 되고 안식이 되는 순간들도 있지만, 엄마는 늘 유행가는 가만히 있는 사람을 흔들어 놓으며 오직여자와 남자의 사랑만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거처럼 만든다고 하시며, 사춘기의 나와 동생들에게는 큰 금지사항 중 하나였었다. 그렇지만 학교 가는 버스 안에서 잠깐 들은 유행가를 순식간에 외우고서는 혼자 몰래 곧잘 불렀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픈 게 사람 마음이니까. 그때 엄마 모르게 듣고 외운 유행가들이 지금은 제일 잘 부르는 노래가 되었고, 그 안에는 또 다른 잊을 수 없는 추억들이 담겨있다. 이제는 음악을 듣는 방법도 내가 느끼는 감정도 세상을 사는 모습도 세월을 따라 참으로 많이 변했다. 그리고 어느덧 나도 그때의 엄마 모습으로 나이 들고 또 같은 소리를 하며 잔소리를 한다. 결국은 돌고 돌아 제자리에서 반복하며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인가 싶다. 온종일 집안에 켜놓은 음악이 주는 위로와 추억과 편안함으로 삶을 다독이며, 무릎 꿇어 마루를 닦고 묻어있는 찌꺼기의 설거지를 하고 뽀얀 쌀을 씻어 윤기 나는 밥을 하며, 오늘 하루의 평범함으로 걸어간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2-03-02 신데렐라
어릴 때 누구나 신데렐라를 꿈꾼 적이 있을 것이다. 못된 계모 아래에서 힘들게 살고 있든 그녀가, 하나뿐인 유리구두의 주인을 찾으러온 멋지고 잘생긴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나, 아름다운 궁전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동화 속 이야기이다. 그것은 더 나은 미래와 행복을 위해 지금보다 높은 곳으로의 신분 상승을 바라는 희망을 그린 것이다. 결혼한 후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하는 대화의 모든 것이 자신이 아닌 새로운 인연의 소중한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부모님 밑에서 보살핌을 받았던 곳에서 떠나 이젠 스스로 보살피며 지켜야 하는 무언가가 생기면서, 최선을 다하고 욕심도 부리며 어느덧 자신만의 자리를 만들어간다. 아내에서 지나와 엄마로 살다 또 시간이 지나 손자 손녀들의 할머니로 신분 상승을 하며, 그동안 받은 모든 것에 감사하면서 지나온 삶에 관대해진다. 평범한 거 같지만 지금 여기까지 지켜오는 동안, 세상 무엇도 쉬운 거 없었으며 애쓰지 않고 소중하지 않은 것 하나없는 대단한 것이다. 나 자신도 그렇게 남들처럼 순서를 따라 변해가며 살아가고 있고 또 그 자리에 맞게 익숙해져 간다. 그러나 다시 새로운 꿈을 꾼다.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며 또 할머니가 되는 자연스러운 삶의 순환 속에서, 하나 더 욕심을 부려 지금보다 나은 - 썩 괜찮은 어른이 되는 희망을 품으려는 것이다. 나만이 할 수 있는, 꼭 내가 해야하는 것으로 내가 나의 신분을 상승해주고 싶다는 욕구이다. 무엇으로 어떤 것으로 다시 가슴 뛰게 만들며 시간가는 것을 잊고 몰두할 것인지 찾아야 한다. 그렇지만 새로운 것을 위한 도전과 꿈을 스스로 억누르는 바보스러운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가는 익숙함과 편안함을 변명하는 거 보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유리 구두의 주인공인 신데렐라를 꿈꾸며, 아름다운 궁전의 백마 탄 왕자님도 그려본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2-02-03 로또 당첨
금수저로 태어나지 않은 나는 은근히 대박을 사모한다. 그 증세는 특별히 연말이나 연초에 표출되곤 하는데 2022년을 맞이한 1월에도 그 습관을 물리치지는 못했다. 그래봤자 1년에 한 번씩 집 부근 동네의 세븐일레븐에서 자동식 로또 번호를 뽑는게 전부다. 특별히 간밤에 희한한 꿈이라도 꾸었다면야 시험지에 모범답을 작성하듯 쓱쓱 용지번호에 동그라미를 치는 식의 방법을 선택하겠지만 나에겐 그런 일도 없다. 이런 나를 잘 알고 계시는 가까운 지인부부께서 새해 아침에 떡국을 나눈 뒤 선물로 로또를 사주신다고 하셨다. 뭔가 잘 될 것같은 암시를 받은 나는 확실하게 다짐받아야 할 것 같아서 몇대몇으로 당첨금을 나눌지를 먼저 여쭤보았다. "당첨금은 몽땅 자네 것일세. 난 돈이 필요 없어요" "그래도 미안하니까 7:3으로 할께요. 내가 7이고 선생님은 3" "후후후 걱정 말고 다 가지세요" "그렇다면 절대로 마음 변하지 마세요" 나는 구 십도로 정중히 인사를 드린 후 회심의 미소를 띄우며 즉시 핸드폰에 증언을 남겨 두었고 로또를 사기 위해 빠른 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가게입구의 전광판에는 엄청나게 불어난 파워볼의 당첨금숫자가 눈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드디어 선물해 준 만큼의 액수 모두를 게임에 투자한 용지를 손에 들고는 붕 뜬 마음으로 주차해둔 자동차에 도착했다. 아~~ 얼마나 흥분을 했는지, 방금 뽑은 번호를 들여다 보면서 자동차 문을 열다가 그만 뒤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파킹해 놓은 좁은 두 자동차 사이에 낀 나는 겨울 잠바를 입은 터라 아무리 용을 써도 일어날 수가 없는 곰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그때 마침 옆에 세워둔 자동차 주인이 다가왔다. 눈 앞이 캄캄했다. 왜냐하면 자동차 문을 열면서 넘어진 터라 옆에 주차해 있던 그 비싼 럭셔리카 조수석 문을 들이 받았기 때문이다. 엎어진채로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는 내게 남자가 말한다. "Are you alright? Can I help you?" 넘어진채 그를 올려다 보며 내가 답했다. "Oh… I think I am okay. But I think I accidentally scratched your car..." "That's okay. Don't worry" 키가 큰 미국인 그 남자는 확인도 하지 않은채 빙그레 웃으며 가게 안으로 성큼 성큼 들어갔다. 한 겨울 매서운 바람이 열어 놓은 자동차 문으로 내 얼굴을 때린다. 그러나 긴장이 가시지 않은 탓인지 이마와 코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와우, 이런 것이 대박이구나... 그 멋지고 쿨한 남자의 뒷모습이 아른 거리며 살아오는 매 순간이 얼마나 큰 로또에 당첨 됐었는지를 나는 정말 깨닫지 못했다. 오늘도 심장이 정상으로 펌프질하고, 내 발로 걷고 또 내 손으로 일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도 목숨을 위협하는 델타와 오미크론 바이러스를 요리조리 비껴간 걸음 걸음은 오징어 게임의 승자보다 더 큰 당첨자가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말이다. 에스더 최(수필가)
2022-02-03 진심
진심은 손끝의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충분히 느껴진다. 그 마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묻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며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시간이 오래 지나도 변하지 않으며, 가슴 속 깊이 간직된다. 오래전부터 몇 달에 한 번씩 목에다 가느다란 바늘을 꽂고 검사를 한다. 목 한가운데 있는 갑상선에 결절이 생겨 그것이 나쁜 것인지 좋은 것인지 알아내는 것이어서, 혹이 있는 곳을 찾아 정확하게 찔려야 하는 쉽지 않은 검사이다. 어떤 때는 파랗게 멍이 들고 또 어떤 때는 피가 흐르기도 한다. 한번이 아니라 큰 결절이 있는 곳마다 바늘을 꽂는 행동이지만, 조심하고 살피면서 되도록 목의 통증을 줄이려 배려하는 의사를 보며, 애써 아픔을 참는다. 그러면서 진심과 정성은 이런 것이구나 하며 감사한다. 진료 침대에 누운 체 아주 가까이에서 접촉해야 하는 검사라 일부러라도 살짝 향수를 뿌리며 예의를 지키려 애쓴다. 한동안 나의 목과 씨름하며 혹 안의 세포를 잘 뽑고 제대로 끝나면 밝은 미소로 의사는 늘 그렇게 말한다. "무슨 향기가 이렇게 아름다우냐, 덕분에 아주 잘 끝냈다." 하며 자신의 수고와 노력보다 나를 먼저 위로해준다. 아픔과 두려움의 순간을, 진심으로 문지르며 살빛 반창고 몇 개를 붙여주고선 행운을 빌어주며 진료실을 떠난다. 우습지만 왜 그렇게 그 반창고가 기특한지 병원을 나오면서 몇 번을 만져본다. 또 어느 날은 얇은 칸막이 하나로 구분해 놓은 옆방에서 의사를 기다리면서, 다른 환자와 나누는 대화를 엿듣고 있는 날도 있다. 부인과의 관계를 힘들어하며 어렵게 꺼낸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으로, 그 남자는 다시 행복해질 것이고 내 병도 나을 거라 믿는다. 상대방을 대하는 진심이 아픔도 넘어서며 치유가 될 거라는 확신이다. 2년 남짓, 전혀 다른 세상 속에서 살면서 진심이 아닌 관계를 되돌아 보며 정리하는 시간이 억지로 주어졌다. 그 시간 속에서 배운 것 중에는 불필요한 관계를 정리할 수 있는 용기를 가졌다는 것도 포함된다. 몸과 마음은 따로가 아니라 하나이다.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깊은 진심인 마음으로 서로 기대며 살아가는 - 아직은 이르지만, 더없이 환하고 아름다운 봄의 새싹이 영롱한 초록빛으로 움트는 날을 희망한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1-12-31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꽃이 예쁘다고 느끼는 것은 마음이 이미 꽃밭이라는 얘기처럼, 보고싶은 이가 있다는 것은 온통 그의 그리움으로 물이 든 마음이라는 것 일게 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한국행 아시아나항공에 몸을 실었다. 만남에 대한 간절함은 무서운 코로나의 공포를 뛰어 넘어 까다로운 입국절차도 넉넉한 인내심으로 통과하게 했다. 안전에 몰두해서 마스크를 두개나 겹쳐 사용한 비행시간 내내 고른 숨을 쉴 수 없었지만, 도착한 인천공항 그 특유의 시린 겨울공기는 고단한 긴장감을 깨끗이 날아가게 했다. 아~ 얼마나 그리웠던 나의 조국이던가. 오랜 고심 끝에 교통이 편리한 장소로 머물 곳을 정했다. 평상시 같으면 형제 집에 기거하면서 계획해 놓은 일정을 진행했겠지만 서로 간의 안전을 위해 익숙하지 않은 이 방법을 실행해보니 나름대로 여유가 있어 마음이 편했다. 가장 신이 난 것은 매끼마다 앱을 통해 맛있는 음식을 배달해 주고 있는 친척과 친구들의 관심과 사랑이었다. 드디어 나를 한국에 초대해준 특별한 날을 맞이했다. 이순의 나이로 입문하는 축하카드와 함께 꽃바구니와 선물 상자가 속속 도착했다. 한번에 모두를 만날 수 없는 시국이라 몇몇이 짝을 나눠 호사스러운 이벤트를 베풀어 주는 그들의 지혜와 배려에 감격이 넘쳐서 눈물까지 난다. '금쪽 같은 내 새끼들~ 정말 잘 컸네...' 지난 일들이 어제 찍은 영화처럼 눈 앞에 선명하게 펼쳐지기 시작한다. 성우가 엄청 좋아하는 빗 방울이 하나 둘 뿌리기 시작한다. 어느새 빗줄기가 점점 거세진다. 창밖을 응시하고 있던 성우는 참다못해 차가운 빗속으로 달려나간다. 음악을 전공하는 성우는 특별히 빗소리를 들으며 창조적인 악보를 그려낸다. 나는 이미 그에게 먹일 감기약을 손에 들고 있다. 며칠 동안 먹일 가족들 음식으로 불고기와 갖가지 밑반찬을 준비해 놓았는데 냉장고가 깔끔히 비워져 있다. 또 철이 짓이다. 혼자서 자취하는 친구가 안쓰럽다며 대식구의 양식을 통째로 들고 튀었다. 양심도 없는 놈...나는 볼멘 소리를 하며 저녁 메뉴로 부대찌개를 준비한다. 오늘도 기복이 눈이 시뻘겋다. 눈동자에 초점이 없다. 걸음걸이도 술취한 듯 비틀거린다. 밥맛이 없는지 국그릇만 휘젓고 있다. 어제도 날밤 새운 게 분명하다. "이그 정신 차려라" 등짝을 한대 후려친다. 그래도 감각이 없다. 나는 다시 머리통을 세게 쥐어박는다.그래도 멍때린다. 야동에 영혼이 뺏긴 녀석을 위해 컴퓨터 차단막을 설치해 달라며 나는 전문가에게 부탁 전화를 돌리고 있다. 우리집의 유일한 모범생 혁재가 방학기간 동안 동부로 여행을 간다며 일주일 동안의 밥값을 빼달라고 한다. 그는 공부만 잘할뿐이지 사랑의 방정식엔 무식한 낙제생인 것 같다. 이제부터 혁재가 가장 좋아하는 해물탕 식단은 완전 빼버릴 테다. 여행하는 그를 위해 두둑한 용돈을 준비 둔 걸 사회성이 없는 녀석이 알 턱이 없다. 세월이 꽤 흘렀다. 그들이 유학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군복무 후 결혼을 해서 하나 둘 아이들까지 낳아 행복하게 산다는 소식에 마음이 훈훈하다. 더구나 먼 타국 땅에서도 캘리포니아 주 우리집에서 만나 쌓은 서로 간의 돈독한 우정과 나를 향한 효심에 감격이 더해진다. 평소 존경하는 나태주 시인의 글이 떠오른다. 사랑에 답함 예쁘지 않은 것을 예쁘게 보아주는 것이 사랑이다 좋지 않은 것을 좋게 생각해 주는 것이 사랑이다 싫은 것도 잘 참아주면서 처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중까지 아주 나중까지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시간에 도돌이표가 주어진다면 나는 다시 밥집 엄마가 되고 싶다. 구수한 된장찌개에 잘 익은 김치 한가닥을 따끈한 밥 위에 올려주고, 입안에서 살살 녹는 굴비살을 발라 입안에 넣어주면 엄지척을 들어 올렸던 그들이 있어서 나는 행복했다. 그리고 지금도 행복하고 앞으로도 행복하다. 그런데 이 한마디는 살짝 귀뜸하고 싶다. '사랑 참 힘들더라' 에스더 최(수필가)
2021-12-31 나의 몫
언제나 나쁜 일이 있거나 힘든 일이 생기면 어쩔 수 없는 나의 몫이라 먼저 생각한다. 그렇게 시작하고 풀어나가면 조금이라도 덜 상처받고 힘들어하지 않을 것 같아 미리 주문을 걸어 놓는 것이다. 저마다 살아가는 방법과 주위의 환경과 품고 있는 생각이 다르듯, 같은 문제를 앞에 놓고 그것에 적응하며 지나가는 길이도 순서도 모두 제각각이다. 품고 있는 문제들과 힘든 마음을 마치 없었던 거처럼 숨겨 놓지만, 결국은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다시 같은 문제 앞에 서게 되고, 후회하게 된다. 마치 꼭 읽어야 하는 두껍고 어려운 책을 끝낸 후 마지막 책장을 덮는 후련함처럼, 삶의 숙제를 끝내고 덮어야 하는 것이다. 어릴 적 노는 것에 팔려 방학 일기 숙제를 제날짜에 맞춰 쓰지 않고 있다, 방학이 끝나가는 마지막 주일이면 한꺼번에 몰아 쓰곤 하였다. 오늘의 날씨는 흐림과 맑음과 비를 마음대로 만들었고 그날에 했던 일들도 뒤죽박죽이었다. 그러나 마치 소설을 쓰듯 하루하루 지어낸 이야기를 만들어 일기장 한 권을 끝낸 후의 후련하고 우스꽝스러운 당당함을 기억한다. 꼭 해야만 하는 것이었는데 미루고 억지로라도 생각하지 않으려 밀쳐 두었기에, 애꿎은 마음만 한동안 불편하게 보냈던 것이다. 살면서 스스로 풀 수 없는 일이 생기거나 사람과의 관계에 휘둘리거나 진심이 통하지 않는 막막함에 휩싸이면 또 생각한다. 이것은 내가 해야 하는 몫이고 끝내야 하는 숙제라고. 늘 평안하기를 그리고 넓은 마음의 평화를 기원하면서 또 다른 언덕을 넘어간다. 그렇게 소소하니 다독이며 지나와 지금 여기 살고 있다. 이제 다시 새로운 해의 시작이라고 1부터 되돌아간다. 12 숫자가 마지막이지만 언제나 맨 앞에는 1이 함께 앞서며 걸어간다. 처음 시작하면서 먹었든 마음을 잊지 말라고 하는 것 같다. 작년 한 해 다가온 좋지 않은 것들을 바람에 펼쳐놓은 이불의 먼지를 세차게 두드려 날려 보내듯 툴툴 털어 버리련다. 그리고 살면서 부딪히는 좋은 일과 나쁜 일 모두 순순한 나의 몫으로 받아들이며, 처음 먹은 마음으로 새롭게 시작한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1-12-01 태클을 걸지 마
내가 좋아하는 그녀는 단 한가지만 빼고는 팔방미인이다. 말 그대로 공부도 일등, 운동도 일등이다.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그림조차 붓 가는 대로 그렸을지언정 작품은 없어서 못판다. 인물로 치자면 요즘시대에 각광받는 조각 얼굴은 아니지만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고혹적인 한국적 분위기에 매료가 된다. 게다가 쭉쭉 빵빵 잘 뻗은 신체는 좋은 DNA만 골라서 물려 받은 듯싶다. 그런데 이런 그녀가 걸어온 삼십 사 년의 인생을 들여 다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다른 이들이 땅 짚고 헤엄쳐서 가는 쉬운 강도 그녀의 삶에 있어서는 자유형 평영 접영까지 총동원해야 통과되는 사연으로 가득하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과의 만남도 어쩌면 그렇게 순탄하지 않은 지 툭하면 불이익을 당한다. 똑똑하고 야무져 보이는 그녀의 인상과는 달리 늘 손해를 자처하며 사는 그녀의 모습에서 매번 내려 놓음의 극치를 본다. 살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엔 심오한 뜻이 있다며 해석하는 그녀를 향해 구차한 변명은 접어두라고 항변하고 싶을 정도다. 더욱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그녀는 항상 가난하다는 사실이다. 그녀에겐 1년 365일이 Thanksgiving 이요 Christmas다. 가까운 지역의 배고픈 이웃들을 시작으로 한국의 고아원, 멕시코, 아프리카 등 먼 나라의 오지까지 기차처럼 달려가는 그녀의 마음엔 브레이크가 없다. 통장의 액수에 따라 맑음과 흐림으로 판가름 되는 내 기분과는 완전 거리가 멀다. 드디어 그녀가 죽을 힘을 다해 모든 공부를 마친 뒤 투명한 사명감을 가지고 의료인으로 일하게 됐다. 얼마나 반가운지 손바닥이 아플 정도로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웬일인가. 화려한 꽃 길이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뜻밖에 찾아온 사고로 인해 그녀는 다시 추락을 하고 만다. 세상 말로 재수가 되게 없다. 그러나 그녀는 차원이 다르다. 허리를 다쳐 침상에 누워있으면서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계속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노래 실력은 거꾸로 일등자리를 석권하니 들어야 하는 내 귀는 참으로 곤욕스럽지만 그녀로부터 전염된 행복바이러스는 내 어깨를 절로 들썩이게 한다. 노래를 뒤로 하며 부스터 샷을 접종하러 문밖을 나서는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그녀가 보유하고 있는 영적 백신을 나 또한 필히 접종해야 함을 말이다. 인생에서 tackle이 걸렸을 때 되받아 치는 건 flex 항체 라는 것을 숙고한다. 에스더 최(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