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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01 그네
갑자기 추석 어느 날 산에 올라가 그네를 탔던 기억이 난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8살이나 9살 쯤이었든 거 같다. 작은 바닷가 동네에서 자랐고 서울에서 피난 오신 아버지셔서 가까운 친척도 오가지를 않아, 그날 하루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체 온종일 식구들과 TV 속 흘러간 영화를 보았다. 점심을 먹고 긴 낮잠을 잔 후, 용돈을 챙겨 슬며시 초등학교 뒤편의 낮은 산으로 올라간 것이다. 기억으로는 많은 사람이 줄을 서 기다리고 있었고 내 차례가 되어 커다란 나무에 새끼줄로 단단히 묶어놓은 그네에 올랐다. 누군가가 어리다고 위험하다는 소리도 기억난다. 그래서 안아 올려준 두발을 나무 판 위에다 얹고 꼭 붙잡으라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밀어주면, 스스로 무릎과 배로 힘을 주어 더 높게 바람 속으로 날아간다. 순간, 발아래 살고있는 동네가 보이고 하늘을 난다는 자유와 통쾌함과 함께 강한 바람에 가슴이 벅차고 뭔지 모르는 짜릿함을, 지금도 그 느낌에 휩쓸린다. 아무도 모르는 은밀함과 하늘을 나는 심장이 움찔거리는 순간을 잊지 못해, 몇 년 동안을 그렇게 몰래 명절날이면 비밀스럽게 다녔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또 언제 그만 가게 되었는지도 모른 채, 몇십 년을 기억 속 설합 속에 묵혀 있었던 것이 툭 하며 튀어나온 것이다. 지금도 그때 그 시절의 친구들을 만난다. 몇 년의 한번 겨우이지만, 오랫동안 가장 많이 깊게 연결되고 있는 친한 친구의 엄마가 아주 편찮으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이런 기억이 낫을 것이다. 삶과 죽음의 순간에 마주쳐 떠나는 순간을 기다리는 마음은 말하지 않아도 참 슬프다. 나도 몇 년 전, 봄 중에 가장 추운 . 눈 내리는 3월의 병실에서 엄마를 보낼 준비를 하며 힘들어했었다. 엄마보다 아버지를 더 사랑했고 살가운 엄마가 아니었기에 늘 서운한 마음으로 살았는데, 그 엄마를 오롯이 혼자 삶에서 떠나보내는 준비를 한 것이다. 세상은 흘러 흘러 또 앞으로 나아간다. 비록 어릴 적 추억에 젖지만 나 또한 어느 날은 그렇게 작별하며 떠날 것이다. 아름다운 기억들이 감싸고 또 작별하며 그네를 타듯 훨훨 날개를 달고 더 높은 곳에 오를 거라는 상상으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며 무릎 꿇는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1-11-01 결실
늘 이맘때면 올 한해는 무슨 결실을 보고 어떤 열매를 거두었는지 되돌아보며, 다시 새로운 결심과 단단한 목표를 만들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후회하고 반성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를 칭찬하며 다독거려주고 용기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 커다랗게 벽에 붙여놓을 생각이다. 이만큼이라도 "잘했다, 괜찮다." 하며 살아도 크게 나무라는 이 없었을 터인데 왜 그리도 인색하게 굴었는지, 미안하다. 많은 것이 변하고 낯선 달라진 세상에 대한 두려움도 크지만, 큰 탈 없이 늘상 하고있는 그대로 - 힘든 상황과 혼란의 새로운 급격한 변화에도 잘 지키며 살고 있다. 식구들을 위해 시장에 가고 음식을 만들고 집 청소하며 마당에 물주고 또 대추 따서 말리고 점점 주홍색으로 익어가는 감을 거두어, 좋아하는 이들과 나눌 생각으로 나름 행복하다. 올해는 정말 많은 종류의 요리를 열심히 만들었고 배웠다. 곁의 모두가 그대로 있기를 소원하는 절실함이 배여 있었고, 만드는 과정 안에서 더욱 소중한 가족의 의미를 새로이 찾았고, 감사했다. 훌륭하지는 않지만, 사랑이 더해진 음식의 종류와 숫자만큼 서로에게 가까워 졌으며 의지하고 신뢰하게 되었다. 더이상의 외로움을 버리고, 서로에게 기대며 눈 맞추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는 순간이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지,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하며 글썽인다. 사는 것에 휘둘러 모르고 지나왔든 시간도 있지만, 지나가 버린 것은 그대로 흘려 보내고, 지금 바로 앞의 모든 것을 즐기며 사랑하려 한다. 잊고 있었든 오래된 사랑을 확인하고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며 지금까지 지내온 세월을 소중히 간직하는 새로운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지독히 나쁜 상황이 꼭 그렇게 다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다시금 배웠다. 무엇을 하였고 또 어떻게 살았냐고 굳이 되묻지 않아도, 크게 잘한거 없이 무언가를 이루지 않았어도, 꿋꿋이 살아있다는 큰 결실을 보았다. 이렇게 한해의 마지막 가까이에 무사히 와있고, 지금은 더욱 더 가까운 이들과 속마음을 전하고 서로를 응원하며 잘했다고 칭찬해주는 11월이 되기를 준비하면서, 올해의 결실은 더없이 단단하다고 말하련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1-10-02 유쾌한 5인방
계획에 없던 종합검진을 받았다. 달포 전 왼쪽 새끼발가락을 부딪친 이후 통증이 잦아들지 않아 병원을 찾은 것이 계기였다. 1년 반만에 마주한 주치의는 친절하게도 이참에 총체적 건강검진을 받을 것을 권유했고 나는 이에 따랐다. 검진 결과는 놀라울 정도로 양호했다. 오장육부는 물론 신체의 어떤 작은 질병조차 없으나 단 한가지 비타민 D가 조금 부족할 뿐이라고 한다. 아니, 햇볕 좋은 이곳 캘리포니아에 살면서 비타민 D가 모자라다니 납득이 되지 않는 얘기다. 그래서 그까짓거쯤이야 라고 무시하면서 사람들과의 대화중에는 은근슬쩍 나의 건재함을 꺼내어 자랑을 일삼았다. 몸을 위해 특별히 건강식을 챙겨 먹은 것도 아니며 운동이라고는 고작 숨쉬기운동이 전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신나게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은 나 스스로 생각해도 자랑할 만했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몰랐던 자부심 높은 콧대는 몇 날이 못되어 납짝코가 되고 말았다. 내 나이때에 접종받아야 하는 Shingles(대상포진) 주사를 맞고는 말 그대로 뻗어버렸다. 두 주가 다 되도록 바늘로 찌르는듯한 괴로움은 도대체 가실 줄을 모른다. 몸의 통증만큼 더 아프것은 마음이다. 새로운 인생의 2막을 계획해 놓고 한국행 항공기 티켓을 사놓았건만 보류해야 했기 때문이다. 평소 한국을 그리워 하던 중 TV프로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 를 애청하게 되었는데, 마침내 나는 학창시절의 청바지와 통기타로 우정을 다지던 그때의 친구들을 어렵사리 찾게 되었고 이후 우린 속내를 털어놓는 깊은 소통으로 그리움을 쌓아갔다. 우리 다섯명의 주무대는 춘천의 강변로였고 모였다하면 새벽 이슬에 옷이 촉촉히 젖을 때까지 밤하늘의 별들을 세면서 기타 반주에 가요를 부르곤 했다. 인생 통털어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음은 우리 모두의 고백이다. 수 년이 흐른 지금 그들은 한국에 나는 미국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마음과 뜻은 하나요 생각과 정신도 일치함을 확인하면서 나이들어 가면 우리 모두 함께 살자는 제안에 만장일치로 합의를 했다. 그러니까 새롭게 뭉쳐진 '시니어 5인방'이 된 셈이다. 그동안 열심히 살았고 자식 잘 키워냈으니 홀로 남아 쓸쓸해질 노후를 서로 돌보아 주면서 유괘하게 살자는 다짐이다. 오르기보다는 내려가기를 생각해야 할 나이에 접어 들면서 나는 생각한다. 오늘 밤 평안히 잠자리에 들었다가 내일 아침에도 어제처럼 다시 심장이 뛸수 있다는 것은 전적인 하늘이 주신 은혜라는 것을. 예방 접종조차 이겨내지도 못하고 자리에 누워 있는 나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한지붕 5인방 친구들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들과의 합류를 떠올리면 설렘과 기대와 낭만으로 가슴이 콩당거린다. 에스더 최(수필가) KTVN TV Reporter 역임 중앙일보 Reporter 역임 현 버클리문학회원
2021-10-02 지붕위의 가을
가을은 소리로 제일 먼저 다가온다. 여전히 낮이 뜨거워 꼭꼭 닫아 두었던 창문을 열고 어둠이 내리는 저녁의 선선한 바람을 맞으려 나서면, 귀뚜라미의 귀뚤귀뚤 하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아직도 간간이 덥고 따가운 햇살을 온종일 받은 작은 꽃들과 나무들은 목말라 하지만, 가을은 어김없이 올 것이며 곧 차가워질 것이다. 봄은 왠지 모르게 서두르고 여름은 기운 넘치게 달려가며, 가을은 다독이며 조금이지만 이제는 여유를 부려도 된다고 넌지시 말해준다. 비록 겨울의 차가운 멈춤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 7년 전 오랫동안 꿈꾸던 나만의 화실을 가지게 되었다. 몇 년을 주인없이 비워두었던 집인데, 축복처럼 와주었다. 제일 끝에 위치한 널찍한 침실 바로 위 지붕에는 옆집에서 넘어온 아주 오래되고 커다란 도토리나무가 걸려있다. 가을이 오고 도토리와 다람쥐들은 그들만의 축제를, 소리로 시작한다. 낮의 길이는 짧아지고 대신 길어진 밤이 일찍 찾아와 어둠이 내리면, 열매를 떨어트려 세상에 퍼트려야 살아남는 도토리와 그 열매로 긴 겨울을 지내야 하는 다람쥐들이 연출하는 열렬한 생존의 치열한 무대가 펼쳐진다. 또르르 떨어지는 소리와 그것을 잡으려 달리는 다람쥐들은, 매일밤 지붕 위에서 가을 영화 한 편을 찍고 있다. 비가 오고 바람 부는 날이면 잠시 비를 피해 주인공 다람쥐는 쉬고 있지만, 바람의 흔들림으로 또 다른 주인공 도토리는 더 세차게 힘껏 소리 내 떨어지고, 빗소리에 잠 못 드는 나도 하얗게 더불어 밤을 새우고 있다. 가을은 예전처럼 오지 않을 것 같았지만 어느새 곁에 와있고, 삶은 무슨 일이 있어도 멈추지 않고 정직하게 달려간다. 그러므로 모두가 살고 있고 또 살아야 한다. 갇혀진 듯한 세월 속에서 계절 이름들이 . 봄, 여름, 가을, 겨울, 봄, 여름, 가을 하며 - 7번을 다르게 불리고 바뀌어 간다. 여전히 아름다운 날들을 떠올리며, 자책보다는 더 찬란한 희망으로 꼭 다시 올 거라 마음 서두른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1-09-01 바람 자욱
바람이 불고 있는지 아니면 없는 듯 그냥 스쳐 지나가는지 몰라, 마당에 걸어둔 기다랗고 가날픈 조개껍질 풍경 소리로 알아챈다. 작고 여린 소리이지만 "나 지금 여기 지나가고 있어" 하며 살랑살랑 들려주는 소리가 참 좋다. 바람에 색이 있다면 아마 푸른색일 거라 상상해본다. 살면서, 누군가는 있는지 없는지 소리 내지 않은 채 조용히 자신의 몫을 살다 어느 날 먼 길을 떠나고, 또 어떤 이는 지나가는 자욱 하나씩 표현하며 살다 떠나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차이 나는 다름도 모두 귀한, 소중한 인생일 것이다. 아침에 열어본 이메일 속 부고에 생소한 이름이 보였다. 전혀 모르는, 다만 가까운 동네의 주소라 어떤 분일까 하며 지나쳤다. 그런데 다름 아닌 바로 30년 넘게 알고 지낸 - 그렇지만 남편의 성으로 바뀌고 또 영어 이름으로 불린 -그녀였다. 마지막 순간에 본래의 이름으로 먼발치의 내게 이별 소식을 전했다. 그녀는 참으로 많은 일에 열정적이었다. 그림 그리고 도자기를 하며 고전무용을 하고 기타를 치며 다른 이들을 위한 봉사도 열심으로 . 정말 지나가는 소리 알려주며 살았었다. 가끔은 그러지 못하는 내게 재촉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마주치면 슬며시 다른 쪽으로 돌아가곤 했지만, 늘 사람들과 어울리며 활동적인 건강한 모습을 부러워했다.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다른 이를 위해 기꺼이 그리했을 터인데, 고마운 마음과 서운함이 함께 온다. 누군가는 자신이 생각하고 알고있는 것을 표현하는 게 서툴러, 미처 말하지 못한 채 하루를 일주일을 한 달을,,,, 그렇게 자기 자리 지키며 무심한 듯 지나간다. 또 누군가는 무엇이라도 지나가는 흔적을 남기고 싶어, 숨겨진 재능을 찾아 소리 내며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며 애쓴다. 무엇이든 어떠하든 모두가 시리도록 아름답다. 바람 자욱따라 들려주는 각각의 소리가 듣기 좋아 매달아 놓은 풍경 줄들이, 며칠 전 심한 바람에 헝클러진 채 뭉쳐있는 걸 하나씩 풀면서, 열정으로 살다 떠난 그녀에게 오늘 아침 안녕이라고 작별 인사를 하며, 오랜만에 올려다본 하늘이 거기에 있었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1-09-01 임의 침묵
시계를본다. 한시간 10분 남았다. 은근슬쩍 퇴근 준비를 서두른다. 하지만 종종 변수가 생기는 날이 많아 마음이 초조해진다. 어느덧 분침은 20분을 남겨두고 있다. 이 상태로라면 오늘은 칼퇴근을 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든다. 드디어 오버타임에 걸리지 않고 회사의 정문을 빠져 나오는데 성공한다. 나는 야호 쾌재를 부른다. 주차장까지 한 걸음에 도착하는 동안에도 백도를 웃도는 뜨거운 열기가 훅 하고 온 몸을 휘감는다. 덩달아 내 심장의 온도도 상승함을 감지한다. 후끈 달아 오른 몸과 마음을 재빨리 자동차의 에어컨디션으로 식혀 보려하지만 그 뜨거움은 꺼질줄을 모른다. 그것은 오직 나만을 기다리고 있을 사랑하는 그에게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픈 열정일게다. 처음 만났을 당시 그의 모습을 떠올린다. 지적인 짙은 눈썹과 총명하고 선한 눈빛 , 반듯한 이마와 높은 콧날, 그리고 왼쪽 입가의 까만 점과 부드러운 까만 머리결은 여심을 사로잡고도 남았다. 게다가 우람하고 단단한 체격과 중저음인 목소리는 세상의 어떤 시름도 다 잊게 만드는 매력 투성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잘 생겼다는 얘긴데 그러나 웬지 나는 그런 그에게 냉냉하리만큼 덤덤했다. 이후 우리의 동거는 강산이 두번이나 바뀔 만큼 세월을 함께 보냈다. 그의 비단결 같은 머릿결은 고슴도치처럼 뻣뻣하게 변했고 건강하고 매끄럽던 몸 곳곳엔 피부병이 퍼져있다. 귀도 안들리고 눈도 멀었으며 한 걸음도 못 걸어 2년 여가까이 기저귀를 착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고통가운데 있는 그가 그나마 유일하게 즐거워하는 것은 베드에 누워서라도 나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다. 최대한 코를 벌름거려서라도 나의 내음을 저장하려는 듯 애를 쓰기도 한다. 나는 이런 그와 늦깍이 사랑에 빠져버렸다. 볏집처럼 허물어지고 구겨져 버린 그의 처참한 모양새는 그 어떤 모습보다 더 아름답고 귀하기만 하다. 하루에도 수차례 목욕을 시켜보지만 가시지 않는 꼴꼴한 냄새조차 지극히 자연스럽다. 나의 연인 '버리'는 이제 서서히 침묵속으로 빠져든다.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내게 꼬리를 흔든다. "엄마 사랑해요. 행복했어요. 그리고 고마웠어요 .굿바이.." 담당 수의사는 말한다. "이 땅에서 24년 6개월을 살았던 최버리는 오늘 24일 오전 6시 32분에 하늘에 계신 그분의 부르심으로 무지개다리를 건넜음을 가족과 친지 앞에서 공표합니다." 에스더 최(수필가) KTVN TV Reporter 역임 중앙일보 Reporter 역임 현 버클리문학회원
2021-08-01 시간
시간이라는 삶의 비밀을 갖고 있다. 누구나 어디에 어떤 상황에 있든, 숨겨둔 꿈이 있고 무엇이 되고 싶은 열망이 있으며 또 적당히 모자라는 열등감과 하기 싫다는 게으름도 가지고 있다. 결혼 후 밥하고 살림하며 살다 세상 밖으로 나와보니, 넘치는 재능과 열정 그리고 예술적인 감각을 지닌 멋진 사람들이 너무도 많아 놀랐고 또 부러웠다. 잘 자라고 있는 땅에서 새로운 땅으로 옮겨 심은 나무는 죽지 않고 뿌리 내려 열매 맺기 위해, 진즉에 품고 있던 모든 잎은 다 떨군 체 가만히 자신을 낮추며 시간으로 버텨가다, 끝끝내 살아남는다. 나도 멀리 이사 온 나라에서의 적응이 힘들고, 원하는 것을 지켜갈 능력도 미처 갖추지 못한 채 경제적인 어려움마저 겹쳐 많이 힘들어했었다. 그러면서 결국 혼자라는 덫에 걸려, 팔과 다리를 뺄 수도 몸을 움직이며 밖으로 나올 수도 없는 상황으로 변해갔다. 온종일 잠만 자고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도 없고 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았었다. 스스로 바꿀 수도 고칠 수도 없는 문제 앞에 서면, 제일 먼저 분노하다 그다음은 어떻게 하든 스스로 할 수 있을 거라는 가능성을 찾다, 결국에는 받아들인다. 겨우 얼굴을 씻고 머리를 빗으면 한 움큼씩 빠지는 머리카락과 더없이 변해버린 얼굴을 보면서 서서히 깨달아 갔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 변해야만 한다 - 굳이 잘하지 않아도, 꼭 지금이 아니어도, 누군가에게 칭찬받지 않아도 된다고 타이르며, 침대 밖으로 나와 밥도 먹고 세상 밖으로 걸어 나왔다. 스스로가 가진 외로움을 껴안고 가듯 부족함도 껴안으며 살아도 괜찮은 것이었다. 무엇을 하든, 자랑스러운 것은 나의 삶이다. 살아가며 부딪치는 폭풍과 우박 그리고 쏟아지는 비를 만나더라도, 부딪혀 살아남은 오늘이다. 무덤덤한 거보다 무엇이든 부딪혀야만 동기를 가지게 될 것이며 또 그렇게 모두 살아간다. 최선은 다하면서 느긋하게, 시간이라는 비밀의 끈기와 무모함에 턱 하니 나머지 삶을 걸쳐 놓고서, 이제는 그 강렬한 힘을 믿는다. 몰래 감추어둔 비밀을 풀면서, 세상의 모든 것이 오랜 시간 끈기있게 지켜나가는 버팀으로, 어느 날 든든한 뿌리가 내려져 열매 맺고 다시 땅에 떨어져 새로운 뿌리 내리며 숲을 이루어 가리라 소망한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1-07-01 Sausalito(소살리토)
작은 버드나무라는 소박한 뜻을 가진 - 잔잔한 바다가 바라보이는 높은 언덕 위 이쁜 집들과 많은 화가와 작가들 그리고 오래된 화랑과 식당들이 아기자기 모여있는 아름다운 동네이다. 태어나 자랐든 그렇지만 이제는 추억으로만 남아있는 고향의 앞바다처럼 푸근해, 마음이 헝클어지는 날에는 위로받고 싶어 한밤중에도 달려간다. 늘 마음 속 평화를 기도하지만, 어느 날 문득 깨닫는 한계를 마주치거나 그것이 아픔으로 휘몰아쳐 올 때는, 바다를 바라보며 위로를 받고 속내를 털어놓으며 울기도 한다. 담담하고, 주저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나 지금 힘들어" 하며 자신을 열어 놓을 뭔가가 필요하다. "숨기지 마라, 드러내면 강해진다"라고 하지만 모자람과 수치심 그리고 분노를 차마 꺼내어 고백하지 못해, 나만의 비밀 장소를 찾아가 어둠 안에 앉아 온전히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깜깜한 아무도 없는 빈 바다 앞에서, 혼자 중얼거리며 스스로 만든 화를 가라앉힌 후 한 번쯤 크게 소리 내어 울고 나면, 마음속 바다에 단단하게 묶어 두었던 감정의 밧줄을 천천히 풀고서 보낼 준비를 한다. 꽉 쥐고 있는 손을 열고 풀어 놓아버리고, 빈손의 여유를 가지련다.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보내는 것이라 미련 두지 않고 작별을 한다. 그렇게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새 후련해져, 늘 그대로인 나만의 구석 자리로 되돌아간다. 편안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되돌아오는 101길 건너편에는 어스름한 불빛의 샌프란시스코 공항이 보인다. 누군가는 한밤중에도 떠나고 또 떠나는 거는 작별하고, 비워진 자리는 새로운 것으로 다가오고 난 또 늘 하던 대로 잘 살고 있다. 평안하고 잔잔해진 바다의 아름다운 동네 Sausalito를, 먼 고향 앞바다에서 변함없이 살고있는 옛친구들이 나를 만나러 오는 날, 다시 그 바다 앞에 서서 고맙다고 그러나 그것은 너와 나 둘만의 비밀이라고 넌지시 일러줄거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1-05-31 균형
얼마 전 의자 하나를 그리며 적어도 열 번은 더 지우고 고치고 하며 제대로 균형 잡고 서 있기를 바랬다. 실제가 아닌 그림 속 의자 하나가 제대로 서 있는 것도 힘이 든다는 걸 그때 알아차렸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에 하얀 뭉게구름이 둥둥 떠가는 걸 보면서, 도대체 난 여기서 뭐하고 있는 것일까 또 무엇을 위해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이 올라온다. 실제 이런 질문들은 근원적이라 결국 아무런 답도 얻지 못하면서 우울감에 젖는다. 혼자 시작하는 많은 생각들을 실제 사람들과의 만남과 공감으로 어쩌면 가볍게 풀어갈 수 있는 것을, 오히려 그안에 파묻히기 시작하면 점점 더 늪에 빠지며 허우적거리게 된다. 생각의 균형이 필요한 것이다. 오랜만에, 긴 시간을 함께 책을 읽고 나누는 세월로 비슷하게 나이 들어가며 서로의 자리와 공간을 지키며 살아가는 인생의 친구들을 만났다. 늘 적당한 거리의 마음으로 균형을 맞추면서 각자의 보폭으로 어깨동무하며, 삶의 반환점을 돌아 결승점으로 가고 있다. 모두가 그 결승점이 어디인지 알고 있어 덤으로 겸손도 알고 있다. 오늘은 바깥으로 나와 맛있는 음식과 더없는 반가움과 정겨운 웃음으로 허물없는 시간을 보내며, 바로 이것이 사는 것이고 또 이런 것들이 사람과 사람으로 연결되는 것이라 느꼈다. 결국 우리는 타인들과의 접촉 없이는 그리고 함께 공유하는 것 없이는 다 헛마음질이였던 것이다. 관계에도 균형이 필요한 것이다. 이제 더는 포장하며 살기에는 나도 세상도 변했다. 무엇으로 붙들고 지키며 다른 사람들의 생각보다 나의 의지와 깊이로 살아야 할지는, 문득 하늘의 구름을 보며 솟아나는 질문만큼 제대로 된 답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여전히 길을 헤매고 또 엉뚱한 길 한 가운데에 뜬금없이 있더라도, 반환점을 돌아온 원래 왔던 길을 기억해야 한다. 작은 의자 하나도 제대로 균형 잡으며 서 있으려고 애쓰는데, 난 하나의 사람임을 알고 제대로 가야 하는 것이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1-05-03 또 다른 어머니날이 오면
가끔, 사람들이 북적이는 오래된 시장 안 온갖 좌판들이 즐비한 곳에서 한가득 김밥 떡볶이 등등 주문해 놓고선, 마냥 우두커니 앉아있는 꿈을 꾼다. 깨고 나면 참 많이 서운하다. 배 고픔이 아니라 마음이 고파서 그런가 싶다. 5월의 어머니날이 또 가까워졌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의 빈자리가 참으로 넓어 여전히 서성인다. 늘 단단하고 커다란 모습으로, 다정하고 살가운 엄마가 아니라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고 무엇을 하며 나이가 들어야 하는지 일러주시며, 모자란 딸을 나무라셨다. 또 사랑에 빠져 있을 때도 세상은 결코 여자와 남자 둘로만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고 애써 알려 주셨다. 요즘 이상한 병 때문에 모두가 밖으로 나오지 않은 체 움직이질 않으니 어느 날은 토끼가 마당에 나타나 느긋이 놀고 있다. 회색빛의 자그마한 모습인데 별 두려움 없이 한번 흘깃 보더니, 나무 아래로 유유히 사라진다. 그렇게 누군가가 힘을 잃으니 그동안 숨어 살고 있는 다른 누군가가 나타난 것이다. 원래 채워져 있던 자리가 비면 또 다른 무언가가 그 자리를 메꾸며 그렇게 살아지는 것인가 보다. 몇 년째 어머니날이 오면 전화기를 손에 들고서는 없어져 버린 옛집의 번호를 돌린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받으면 끊어버리지만, 마음 속에 쏴한 바람이 일어난다. 제대로 일러주신 걸 미처 깨닫지도 못하고 혼자 마음대로 하던 지난날들이 부끄러워 더 억지 부리고 짜증 내며 과장했었는데, 이제는 그 허세가 딱 그만큼 내게로 들어와 버려 마음이 허기진 것이다. 뒷마당의 빈자리에 나타난 토끼처럼, 다른 무언가가 다시 채워지고 그것을 대신할 것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또 다른 어머니날이 오면서 배운다. 삶이라는 것이 - 풍족하고 완벽하며 전혀 불편하지 않고 사는 거보다 - 채워지지 않고 목마르고 고픈것이 있음으로 더 애쓰고 아파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엄마가 일러 주신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1-04-01 함께 성장하며
오랜 시간을 꿈꾸며 이루고 싶었던 욕망이 있었다. 작고 모자라지만 계속하다 보면, 분명 꼭 이루게 될 거라 믿었고 그 믿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면서, 하나하나의 끝맺음이 마치 허물을 벗고 세상 밖으로 조금씩 걸음마를 배우고 나아가는 아이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나라는 이기주의를 벗고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세상을 배워가는 한 개체로서의 성장이라 믿으며, 부끄럽지만 훌훌 껍데기를 벗어버린다. 결혼 후 5년이 되도록 아기가 없어 한참을 기다리고 애태우다 겨우 첫 아기를 갖고서도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제왕절개로 수술대 위에 올랐었다. 몸이 약해 전신마취는 할 수가 없어, 수술의 반은 깨어 있으면서 수술 도중 아기가 나오는 순간과 수술실 안의 웅성거림과 분주함을 다 느끼고 알았다. 갑자기 뭔가 훅하며 나의 몸에서 꺼내지는 느낌과 뿌연 뭔가에 싸인 아기를 본 기억이 난다. 순식간에 몸을 닦으며 처음 나에게 보여질 때의 아기 모습이 얼마나 신비롭고 감동이었는지, 알 수 없는 눈물이 솟아오르며 한참을 흐느꼈다. 의사 선생님이 눈물을 훔쳐주며 이젠 잠을 자도 괜찮으며 수고하였다고 칭찬 해주는 그 순간도 기억한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자라나는 순간순간마다 기쁨이며 자랑이고 대견함이었지만, 가끔의 절망과 실망 그리고 안타까움과 함께 깊은 책임감도 배우게 되었다. 성장이라는 과정의 아픔을 서로 보고 겪으며, 긴 세월 미움도 사랑도 당연함으로 받아 들이고 함께 신뢰하며 지나온 세월이 대견하고 고맙다. 그렇게 기다리던 글과 그림을 둘 다 하고 싶다는 욕망이 처음 세상밖으로 나온 그 날도, 뿌연 막을 덮은 미숙하고 낯설지만 대견한 마음과 부끄러움에 한참을 울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자라며 나아가는 모습이 기쁨이고 자랑이지만 가끔은 모자란 능력에 좌절하고 또 절망하곤 한다. 함께 성장하며, 영원히 사랑하고 정성을 다하며 사랑과 노력으로 키워온 아들이 이제는 기대라며 한쪽 어깨를 내어주듯, 오랫동안 꿈꾸며 욕망하던 글과 그림을 지키며 계속할 거라 다짐한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1-03-02 이름 값
살아가는 도중에 만나는 큰 모퉁이 돌아서면 새로운 다른 길을 만나고, 그 변화와 함께 불리는 이름도 달라진다. 대부분의 여자는 결혼하면 부인으로, 아기를 낳으면 아이의 엄마로 또 세월이 많이 흐르면 어느새 할머니가 되어 그 상황에 붙여진 이름으로 살아간다. 아침에 일어나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신문을 편다. 지금 바로 이 순간이 제일 평화롭고 행복한 시간이다. 늘상 하는 대로 색바랜 낡은 가죽 의자에 파묻혀, 네모진 창 건너편에 보이는 아늑한 풍경과는 전혀 다른 세상 곳곳 돌아가는 이야기 읽는 맛 또한 색다르다. 순간 전화벨 소리에 놀라 받아보니 누군가가 "폴 엄마야? " 한다. 얼른 그 이름으로 살던 때로 되돌아가 보지만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아 "누구세요? " 하며 되묻자 환하게 웃으며 자신도 아이들 이름으로 불리던 그때의 이름을 알려준다. 반가운 마음과 기억해준 고마움이 더하여 저절로 이쁜 미소가 떠오른다. 갑자기 궁금하고 생각이 나 전화한다며 안부를 묻고 언제 다시 꼭 좋은 날 만나자며 전화를 끊었다. 그땐 나의 인생이 온통 아들로 채워진 채 살았던 시절이었나 보다. 첫 대학 입학 후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서 학교 때 은사님 댁으로 인사를 드리러 갔었다. 큰절 올리며 무릎을 꿇는데 물으셨다. "혹시 너 이름 속에 바다가 들어 있느냐? 너의 아버지가 늘 바닷가 근처 어딘가에 딸 하나 기르며 살고 싶다고 했었는데 " 하시기에 "저의 이름은 바다제비(海燕)입니다"라고 말씀드렸다. 나의 이름 속에는 아버지의 꿈과 소망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음이다. 갓 태어난 딸의 이름을 지으며 그 안에 당신이 소원하는 모든 것을 담아둔 체, 하루하루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고 계셨던 것이다. 그때는 온전히 또 사랑하는 딸로서의 삶을 살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그 시간에 맞추어져 불리는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은 의미와 무게와 값을 지니고 있다. 이제는 내가 만드는나 자신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려 새롭게 길을 나선다. 그때 불렸던 이름들에 나름의 값어치가 담겨있듯, 남아있는 시간 동안에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에 걸맞은 의미가 담기게 될 것이다. 어떤 이름이 어떻게 나를 표현하며 만들어질지 모르겠지만 제대로 이름 값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숙제를, 받았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1-02-01 동백꽃
아직 차가운 2월의 날씨이다. 붉은색과 하얀색 동백꽃이 서로 친구하며 어우러진 동그란 모습으로, 미처 새로운 잎을 띄우지 못한 채 봄을 기다리고 있는 앙상한 가지의 다른 나무들을 다독이며 위로하듯 환하게 피어있다. 꽃말이 진실한 사랑이란다. 수더분하고 청아하며 마치 세상의 복들이 겹겹의 꽃잎 하나하나에 다 붙어 있을 것 같은 둥근 모습으로, 유난히 초록빛이 반짝이는 이파리와 함께 서로 다정히 기대며 잘 자라고 있다. 시간이 지나 대개의 꽃은 꽃잎 하나하나 떨어져 지는 것과 달리 동백꽃은 꽃잎이 전부 붙은 채 한 송이 그대로 떨어져, 바라보는 마음이 짠하다. 아주 옛날, 결혼식을 끝내고 떠난 신혼여행이 거제도 해금강이었다. 주민등록증을 잃어버려 비행기를 탈 수 없었고 차가운 눈이 오는 초봄의 꽃샘추위와 몇 시간을 터덜거리는 시골 버스를 타고 도착한 바닷가 절벽 위의 낡은 호텔로 밤늦게 지쳐 들어선 순간, 갑자기 터진 왠지 모를 서러움으로 밤새 울고 뒤척이다, 아주 늦은 아침을 맞았다. 호텔의 투숙객은 단지 우리뿐이었고 어젯밤의 지독한 바람과 추위와 눈발은 완전히 사라진, 부드러운 바람과 따뜻한 날씨와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이 환한, 아름다운 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커피 한잔을 들고 내려온 호텔 앞마당과 주변에 피어있는 붉고 하얀 동백꽃들은 경이로웠고 축복이었으며 감탄이었다. 정말 어젯밤까지 픔었든 모든 불평과 불만 그리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뭔가를 작별한 막연한 서러움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어쩌면 이 결혼은 정말 멋질 거라는 예감과 그것을 믿었다. 온종일 섬을 돌아다니며 동백꽃을 따다 실을 꿰어 목걸이를 만들고, 매 식사때마다 호텔 식구들과 웃고 떠들며 지낸 삼박사일의 짧은 신혼여행은 끝났고, 어느날 문득 커다란 비행기를 보상이라도 하듯 반나절을 지겹게 타고서는 먼 나라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유독 추운 겨울에만, 다른 나무들은 아직 따뜻한 봄을 기다리는 동안, 서둘러 꿋꿋히 크고 복스럽고 단단한 꽃을 피우며 여전히 동백나무와 나는 잘 자라고 있다. 향기가 아름답고 화려하고 귀하며 우아한 다른 어떤 꽃들보다 더 씩씩하게 자신에게 순응하며 함께 어우러져 피어있는 동백꽃을 바라보며, 후회와 원망의 지나가버린 과거보다 현재의 여전히 진행 중인 긴 결혼생활을 뒤돌아보며 그때의 예감과 축복을 떠올린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1-01-02 달리기
삶이 마치 달리기 같다고 생각을 하곤 한다. 짧은 거리를 온 힘을 다해 달려 순간의 속도로 승부를 좌우하는 단거리 뛰기가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속도를 유지하며 오랫동안 달려가는 마라톤 같은 것이라 여기며 조심하고 산다. 처음부터 너무 기운을 써버리면 나중엔 정말 결승점 앞에 가보지도 못하는 허약한 체질인 걸 알고 있어, 의식적으로 무엇이든 천천히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안에서 해야 한다고 다독거린다. 그렇지만 더 빠른 속도로 멋지고 힘차게 달려, 느린 걸음에도 숨이 가쁜 내 곁을 지나쳐 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끔은 분수 넘치는 욕심을 부려보고 싶을 때도 있다. 요즘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빠져있어 그의 책들을 읽고 있다. 책 속에서, 그는 마라톤 선수처럼 매일 쉬지 않고 뛰면서 자신을 단련하며 생각을 단순화하고 강한 정신력과 체력을 기른다고 한다. 길 위에서 철저한 혼자로서의 외로움과 고통과 극한을 넘기면서, 스쳐 가는 풍경과 자신과의 타협으로 그는 글쓰기를 다시 배우고 소설을 구상하며, 오늘도 어느 길 위를 쉬지 않고 달리고 있을 것이다. 혼자 노는 것을 좋아한다. 아니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한 거처럼 혼자 있는 것을 고통스럽게 여기지 않는 성격이다. 경쟁과 다툼으로 가끔 머리를 부딪치며 살지만, 사람의 기본적인 성격은 그다지 급격하게 변하지 않는 것이기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서로의 삶을 살아간다. 먼 길을 걷다 넘어져 무릎에서 흐르는 피가 무서워 울고 있을 때, 누군가가 빨간 약으로 상처를 소독하며 호~ 하며 쓰린 곳에 불어주는 입김을 기억한다. 비가 갑자기 쏟아져 우두커니 서 있을 때 – 비록 우산은 작지만, 서로의 어깨 하나가 비에 젖더라도 – 함께 같이 가자고 팔짱 끼며 웃든 모습도 떠오른다. 긴 마라톤의 결승점은 멀고 그만하고 싶고 힘들지만, 늘 어딘가에서 이렇게 상처 난 곳에 빨간 약도 발라주고 또 세찬 비가 쏟아져 젖더라도 함께 같이 가자고 해주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다. 오늘 하루도 용기 내고 기운 돋으며, 먼 길 도중에 만나는 작은 감동의 순간들로도 삶을 살아갈 이유도 목적도 한가득하다. 힘들고 지친 해가 넘어가고 새롭고 건강하며 희망을 품어도 되는 새로운 해가 솟았다. 모두 함께 멋진 삶의 달리기를 계속하길 기원한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0-12-04 강한 사람
강한 사람 - 강한 여자를 꿈꾼다. 죽는 순간까지 여자이면서 끝없이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내 마침내 원하는 것을 이루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그렇게 되려면 제일 먼저 튼튼한 육체와 경제적인 독립과 그리고 정신적인 강인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건강이 좋지 않아 다른 이들에게 작은 일상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거나, 경제적으로 힘들어 누군가에게 기대게 되거나, 늘 다른 이들의 사랑과 관심을 원한다면 어쩔 수 없이 하나의 독립된 사람 - 여자로 살아가기 힘들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뉴스를 본다. 요즘처럼 생활반경이 한없이 작아져 소통이 멀어져 있을 때는, 더더욱 세상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또 살고있는 나라의 혼란은 언제까지이며 무엇이 어떻게 밤사이에 달라져 있는지를 알아야만, 하루를 시작하며 그나마 준비한다. 오늘 아침은 미국 최초의 여자 부통령으로 출발과 전진을 의미하는 하얀색 정장을 입은 카말라 해리스(Kamala Harris)가 첫 연설을 하고 있다. 그녀의 멋지고 당당하며 더 없는 승리의 기쁨을 숨기지 않는 자신감과 진심으로 마음을 열고 대화하듯 "내가 부통령직을 수행하는 첫 여성이지만 결코 마지막은 아닐 것이다"라는 말에 알 수 없는 뭉클함과 짜릿함에 가슴이 두근거리며 눈물이 솟는다. 편견에 지쳐있는 이들에게 꿈을 꾸며 확신을 가지라며 "다른 사람들이 단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라"고 그녀는 말한다. 꿈을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본 적 없는 아니 보여준 적이 없는 나의 참모습을 찾으려 오늘도 주문을 외운다 - 스스로를 가장 빛나게 만드는 것은 자신이라고. 세상은 변하고 있고 그 변화의 물결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까이에, 환한 미래로 와있을 거라 믿고 기다린다. 기다림이 헛되지 않도록, 정신적인 단단함을 챙겨 두발 땅에 딛고 숨한번 크게 들어 내쉰 후 고개 들어 먼 하늘 올려다보며, 다시 오늘 내게 주어진 책상 가득한 일들을 마주한다. 그리고 건강하며 강한 사람이 되기 위해 운동화 끈 단단히 조이며 달리는 길 위에 성큼 올라선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0-11-06 밥상너머
오늘도 쌀을 씻어 밥을 하고 콩나물을 다듬어 국을 끓이며 반찬을 만든다. 다른 의식들과 생각들은 환경과 교육에 의해 달라지며 세월 따라 변해가지만, 오래전 부모에 의해 길들여지고 만들어진 입맛과 혀의 기억은 날이 갈수록 더욱더 진해지고 생생해진다. 스스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음식을 만들기 시작하며 솜씨도 늘고 또 시간과 삶의 방식도 훨씬 더 좋은 방향으로 변했겠지만, 여전히 밥솥에 손을 넣어 물을 가늠하고 좋아하는 밥을 맞춘다. 작은 일인 거 같지만 내 몸을 빌려 태어난 나의 아이도 그 정성으로 생존을 위한 진한 영양소와 사랑으로 뿌리내리며, 먼 타국에서 세대를 넘어 살아갈 것이다. 오래전 막냇동생이 살고있는 중국 베이징을 갔었다. 이른 아침 공원에 많은 사람이 모여 운동하는 모습을 보며 들른 오래되고 낡은 동네 시장 안에서, 수없이 많은 종류의 김치를 팔고 있는 조선인들을 보고선 깜짝 놀랐다. 여태껏 본 적 없는 수십 가지의 김치와 반찬 종류들 그리고 세월은 따로 많이 지나갔지만, 그 맛과 모양이 똑같은 것에 알 수 없는 감동으로 돌아왔었다. 이제 그들의 부모는 세상을 떠났고 떠나온 조국은 비록 기억나지 않더라도, 부모가 먹여주며 키워주었던 음식들은 여전히 함께하고 있었든 것이다. 그리고 수 없는 추억 속의 맛을 떠올리고 만들면서 다시 전통과 세대를 이어가고 있었다. 밥 한 그릇과 반찬 하나가 얼마나 질기고 소중한 것인지 새삼스럽고, 그 어떤 약속도 맹세도 혀가 느꼈든 기억과 추억을 담은 음식만큼 질기게 본성을 이어갈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가끔 예전 엄마가 해주셨든 고춧가루 듬뿍 넣은 빨간 소고기 무우국을 그리움과 함께 끓인다. 먼 훗날, 많은 것들은 잊혀질 것이고 또 사라질 것이다. 그렇지만 영원히 기억하는 엄마가 만들어 주며 키워주었든 음식들의 그리움은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이다. 오늘도 저녁 시간 식구들과 함께 밥상에 앉아 밥을 먹는다. 그 안에는 차마 부끄러워다 말하지 못한 사랑과 미안하다 하지 못한 부족함과 세상 더없이 소중합니다라는 마음 한가득 담아, 밥상 너머의 미래를 바라본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0-10-02 잠길에서
하나가 좋지 않으면 또 다른 하나는 그와 다르게 좋아지는 것도 있나보다. 눈이 많이 나빠 잘 보이지 않아서인지 상상력은 더 다양해지고 어릴 적 행복한 꿈도 많이 꾼다. 이유 모르게 망막이 오랫동안 온통 찢어져 있어 시력은 망가져 있었고 백내장도 심하여 한동안 치료를 받고 수술까지 하였다. 수술 후 돌아와 내 집 내 침대에 누웠는데 천천히 잠이 들어오는 소리와 함께 예전의 한여름 낮 - 뜨거운 아스팔트가 녹으며 아른거리듯, 나도 잠길에서 아른거린다. 문득 멀리서 뭔가를 사라고 외치는 소리와 개구쟁이 남동생들이 서로 장난치는 소리도 들린다. 칙칙폭폭 하며 달리는 기차와 먼 곳으로 이사간 작은 옥희도 보이고 늘 분주한 옥현이와 함께 웃고 있는 아주 어린 내 모습도 보인다. 지금 나지막한 바람에 흔들리는 얇은 풍경 소리와 옛날 나의 웃음소리가 뒤섞여 같이 어우러진다. 그렇게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꿈 안에 잠겨있다 깨어나니, 해가 떠 있는 저녁 시간이 마치 늦은 아침인가 싶어 서둘러 책가방 챙겨 얼른 학교에 가야 할 것 같아 두리번거린다. 잊고있던 예전의 기억들이 아지랑이처럼 떠오르며 가슴 속 깊은 따뜻함과 그리움도 있지만, 또 지나가 버린 것들에 대한 후회도 많다. 어려서는 늘 강해야 하며 자신을 잃지 않고 살아야 하고, 화가 나도 슬퍼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된다는 강박감 같은 것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조금씩 나빠지고 고장이 나며 어딘가는 아프지만, 강하지 않아도 괜찮고 더는 착한 척하지 않아도 되며 슬프면 슬프다고 엉엉 울어도 되는 지금의 오늘이, 그 어느 때보다 진짜 나 자신이며 행복하다. 때론 젊고 파랗고 싱싱한 것을 잃어가는 아쉬움과 쓸쓸함과 미련도 있지만, 다른 사람의 기대와 칭찬 없이도 충분히 괜찮으며, 그런 모자란 속에서 되려 안도한다. 좋지 않은 것들은 또 다른 의미의 좋은 것으로 되돌아오는 순환과 이치를 보며, 품고 있는 마지막 자만을 푼다. 이렇게 삶은 새로움으로 대신하여 잃어가는 자리를 메꾸며 채울 것이고, 포기할 줄 알고 부족한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응으로, 어느덧 깊어지고 그윽해지며 더 따뜻해질 것이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0-09-01 시간은 지나간다
하고있는 일이 없어도 시간은 지나가고 새로운 달도 시작한다. 그냥 저냥 살고 있지만, 사실은 알지 못하는 사이 너무도 변해버린 세상에 대한 걱정과 또 무엇인가는 해야 한다는 조바심의 양다리를 걸친 채 허둥거리고 있다. 아주 오래전 디즈니랜드에 놀러 갔다 기다리는 줄이 유난히 짧은, 우주의 그림이 그려진 놀이기구를 무심코 신나하며 탄 적이 있다. 롤러코스터와 비슷한 기구였고 우주여행을 경험하는 것이라 단단하게 안전벨트를 매도록 한 후 천천히 조금씩 굴 안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며, 그 안의 모두가 환호했다. 천장 위 얇은 빛의 별도 달도 다 사라지고 갑작스레 깜깜해진 어두움 속에서 속도를 올리기 시작하면서 바람이 내는 차가운 소리도 들렸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도무지 어디로 움직이며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고 또 그 움직임에 미리 준비하는 작은 몸짓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두려웠고,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더 심한 공포와 무조건 여기서 나가야만 한다는 생각만으로 울며 소리 지르다, 결국 온통 눈물 범벅으로 마지막 환한 세상 밖으로 나온 후 안도하고 또 크게 웃으며 울었던 기억이 난다. 왜 그때 생각이 자꾸 나는지 우습지만, 바로 요즘이 무엇인지 대상을 모르는 채 느끼는 두려움과 어떠하든 환한 곳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다. 삶의 과장되고 부풀어진 어깨의 넓이가 좁아져 낯설지만, 오히려 예전과 달리 작고 소소한 일에 기쁨과 행복을 찾고 알게 된다. 그냥 밑동만 잘라 심어둔 파들이 물만 주는데도 아주 파랗게 올라오는 걸 보며 신기해하고, 보고 싶은 친구와의 긴 전화 통화가 마냥 즐겁고, 끝내지 않은 채 오랫동안 구석자리에 있던 그림들을 마무리한 후 뿌듯해한다. 그리고 늘 곁에 언제라도 있을 거라 무심했던 가족들의 단단한 묶음과 결국 지금 이 자리가 인생의 마지막 아늑함이라는 걸 다시금 배운다. 그렇게 그렇게 시간은 지나간다. 비록 지금은 세상의 파도 속에서 하나의 섬처럼 떠 있는 우리들이지만 - 다시 또 서로에게 함께 가자고 다독거리고 보듬고서, 더없이 환한 공존의 세상이 새롭게 돌아오길 간절히 기다리며, 길어진 오늘 하루를 마무리한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0-07-31 변화의 시간
우리 곁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의 형상과 본래의 성질이 달라지는 것을 변화라고 한다. 그것으로 인해, 나름의 특징이 강해지거나 약해질 수도 있으며 또 새로워지는 것도 있고 사라져 없어지는 것도 있다. 천천히 자신의 의지로 노력하여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강한 커다란 힘으로 갑작스레 변해야만 하는 시간 앞에는, 어쩔 수 없는 저항이 따르고 또 새로운 용기가 필요하다. 늘상 오랫동안 하고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몸과 머리가 기억하고 있는 익숙한 경험과 습관을 깨뜨려야 하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주저 없이 변하는 세상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몇 달을, 갑작스레 그 어느 때보다 넘치는 시간을 어쩌지 못해 어느 하루는 읽지 않은 채 던져두었던 먼지 쌓인 책들을 다 끝내버릴 듯 눈 아프게 읽었고, 또 어떤 날은 한동안 보지 못했던 밀린 연속극들을 지겹게도 보았다. 그리고 가족을 위한 온갖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기 위해 뜨거운 불 앞에서 비지땀도 흘렸고 오래된 옷장 속의 부질없이 쌓여있는 옷들을 한심해하며 한가득 쓰레기통 속에 버렸다. 그러면서 작고 의미 없는 것들에 매혹되었다는 후회와 낭비 그리고 예전에 만나야만 했든 사람들과의 관계도 진정 뒤돌아보았다. 더없이 소중하다고 여겼던 많은 것들의 있고 없음은 실제 살아가는 이유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과 결국 그것은 근본적인 행복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그렇게 남아있는 가득한 시간을 정리하고 버리고 빚어보며 떠오른 것이 적정한 삶, 나 자신의 존재였다. 살아남아야 하고 또 달라져야 한다면 늦지 않게 서둘러야 한다. 오늘을 이겨내어, 달라진 미래를 위한 굳굳한 자존감과 솔직한 용기와 부끄럼 없는 진실함이 더더욱 필요할 거다. 행복의 척도가 달라진 세상의 변화를 받아들이며, 무엇이 진정으로 나를 위한 것이며 또 무엇으로 힘을 얻고 위로받으며 적정한 자신을 지키고 살아갈 것인지, 애쓰며 배워가는 중이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0-07-01 삶의 골목길에서
골목길은 사람이 많이 다니는 화려하고 큰 길이 아니라 작고 구부러지고 울퉁불퉁하지만 익숙한 길이다. 오랫동안 그 동네를 잘 알고 있지 않으면 목적지를 제대로 찾아갈 수 없다. 어릴 때 남동생들과 같이 가는 것이 너무나도 싫었든 공중목욕탕이 있는 길을 따라, 골목 오른쪽 길 한가득 꽃들과 화환들을 쌓아둔 집을 지나면, 끝을 넘어 엄마가 오랫동안 혼자 살고 있는 집이 먼 불빛으로 등그러니 기다리고 있었다. 방학이라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시내 큰 번화한 곳에서 놀다 시간이 늦으면 택시를 타는 거보다 이 골목을 가로질러 가면 훨씬 더 빠르다는 걸 알고, 깜깜한 밤길이지만 무서워하지 않고 잘도 다녔다. 엄마는 불빛이 환한 큰길로 다니지 않는다고 밤늦은 시간에도 늘 나무라셨다. 세월이 한참을 더 지나, 골목 끝을 지나면 있던 엄마의 집은 없어지고 한밤중의 꾸중 들을 일도 없으며, 더이상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갈 일도 없다. 그래서 다시는 예전의 익숙한 골목 근처를 절대로 가지 않으려 한다. 마치 내가 그 골목을 더는 일부러라도 떠올리지 않으면 예전처럼 그냥 끝길에 혼자 계신 엄마가 그대로 살고있는 거처럼 믿어 버리고 싶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길 위에 우두커니 방향을 잃고 서 있을 때가 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고 기대고 싶어 하지만 섣부른 판단으로 받는 상처가 오히려 더 힘들어, 어차피 자신의 몫이라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애쓴다. 추억도 이름을 바꾸어 일상이라고 하고, 굳이 아픔과 슬픔과 외로움을 헤집어 놓지 않으려 하며 산다. 그렇게 또 다른 어머니날도 지나가고 엄마가 멀리 그냥 그대로 있는 거처럼 시침 뚝 떼며 모른 척 지나갔다. 작고 구부러졌지만, 오랫동안 함께 한 익숙함과 구석진 거 하나하나를 기억하며, 낯설지 않은 따뜻한 세월을 지나온 사람이 그립다. 이름과 모습과 마음이 딱 하나로 연결되어 - 문득 잊고 있다 떠오르는 오래된 골목길처럼, 나중 다시 어디서 만나더라도 환하게 웃으며 반갑다고 인사하는 사람을 그린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