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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29 이탈리아
사랑하는 나라의 너무나도 슬픈 소식에 마음이 아프다. 작은 농담에도 커다랗게 웃고 떠들며 넘치는 친절과 그토록 오래된 박물관의 수없는 예술가의 그림과 조각들 그리고 덧없이 멋진 이탈리아 남자의 휘파람 소리에 마음이 설레었는데, 그 명랑함과 넘치는 웃음과 친절은 사라져 버린 체, 텅 비어 있는 넓은 광장 모퉁이 빈 자전거 하나 서있는 사진 한 장으로 눈물이 왈칵 난다. 나쁜 전염병으로 인하여 삶도 예술도 생명의 가치도 다 변해버리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바로 몇년전 이탈리아 남부 작은 마을에서의, 봄날 - 아름답고 화창한 날씨와 짙고 푸르다 못해 아리기까지 한 지중해 바다와 작고 아기자기한 넘치는 선물로 가득한 가게들과 초저녁 무렵의 촛불 켜진 멋진 식당들로 이어진 골목들을 기억한다. 바닷가 성벽 위의 가파른 언덕에서의 아찔함과 같이 떠난 좋은 이들과 나눈 생일 축하 와인 몇 잔의 나른함으로, 진한 소금내나는 바닷바람 때문에 헝클어진 머리칼로 골목골목 헤매이든 그날도 떠오른다. 머잖은 날, 두렵고 무서운 이 모든 것들이 말끔히 지나가고 전염병 없이 살았던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모든 것들이 달라지고 이상하게 변한 세상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잘못이라고 인정하고 용서를 빌면 끝날 수 있을까? 더없이 너그러워져 다 이해해가며 진정 더 나은 사람으로 변하게 된다면, 그냥 악몽을 꾼 거처럼 아침이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그대로일 수 있을까? 제발 그렇게 정말 이 모든 것들이 지나간다면 비록 작지만, 더없이 내가 가진 온갖 인내를 다하여 가장 절실하게 용서를 구하며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감사할 수 있을 거라 맹세한다. 이탈리아의 여전히 높은 성에 갇힌 동화 속 사랑을 기억하고 있고 작은 마을 포지타노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들었던 앙드레 보첼리의 산타루치아를 그리워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기도하고 또 용서를 빌며 자비를 구원한다. 한없이 밝은 미소와 활력으로 다시 힘차게 일어나 세상의 모두가 깨끗이 건강해진 다음, 여지껏 품었던 허세와 가식과 자만을 내려놓은 가벼운 한 몸으로 훨훨 찾아가련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0-04-01 희망
꺽인 나뭇가지는 반드시 또 다른 방향으로 자라난다. 알지 못하는 이상한 병에 대한 두려움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잠겨 있지만, 그보다 더 힘든 건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아무 곳에도 나갈 수 없다는 갑갑함과 그리움, 그렇지만 더없이 아름다운 봄밤에 내리는 세찬 빗소리와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꽃향기가 크게 나무란다. "얘, 니가 할 수없는 일에 너무 매달리지 마. 세상은 힘들겠지만 지나가며 또 살아남는 것이란다." 벌떡 침대에서 일어나 “비발디의 사계”를 커다랗게 켜고 땀에 절은 잠옷을 벗고선 향기 좋은 샴푸로 머리를 감은 후 제일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어두움을 여는 불을 켜고 맨발로 나선 차가운 밤이지만, 봄은 벌써 와있었고 여러꽃들은 화려하게 피어 자태와 향기로 유혹하며 자신들을 바라봐 달란다. 비에 젖은 나무들의 파릇한 새싹들은 보석같이 영롱하게 반짝이며 아름다웠다. 문득 작년 겨울 강한 바람에 부러진 나무가 궁금하여 찾아보니, 꺽인 나뭇가지는 새로운 잎으로 강한 생명력을 지닌 체 다시금 씩씩하게 더 잘 자라나고 있었다. 삶이란 이런 것일거다. 어쩔 수 없이 잠시 방향을 바꾸어야할 때도 있지만, 이런 날을 위해 남겨둔 힘으로 버텨야 하고 또 언젠가는 이 모든 것들을 한때의 추억과 경험으로 이야기할 날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정신이 번쩍든다. 지금은 알수 없는 이상한 병의 회호리 바람에 삶이 휩쓸리고 있지만,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일들이 여전히 모두와 함께 하는지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부러져 꺽인 나무도 다시 방향을 바꾸어 삶을 시작하듯이, 아름다운 음악과 향기 나는 꽃들과 넘쳐나는 좋은 사랑하는 이들이 있음을 알고 희망을 이야기하며 용기를 얻는다. 마음껏 스스럼없이, 햇빛이 눈부신 바깥으로 나가 진한 커피 한잔 곁에 놓고 책을 읽다 문득 생각난 이들에게 안부를 물으며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이 진정 행복이었음을,,, 그리고 간절히 되돌아 가고 싶다. 다시 머지않아 예전처럼 살아갈 거라는 희망을 이야기하며 겸손되이 무릎 굻는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0-03-01 한강 다리 위에서
아직 채 겨울이 가시지 않은 2월의 날에, 기다리고 있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서둘러 노란색 택시를 타고선 한강을 건너고 있었다. 해 질 무렵이라 노을은 가까이 왔지만, 그나마 남아있는 햇살에 눈이 부셔 얼핏 내려다본 다리 밑에는 커다란 강이 흐르고 있었다. 진한 푸른빛이 묵직하며 소리 하나 없이 잔잔하게 흐르는 그 풍경을, 새삼 한 번도 어디에서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묻지도 궁금하지도 않았었다고 지금이야 깨달았다. 늘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 강은 그렇게 오래전부터 흐르고 있었고, 나도 예전에는 그 다리를 건너다니며 살고 있었다. 몇 년에 한번, 살던 곳이 그리워 크게 마음먹고 서두르며 서울을 찾아온다. 그 그리움은 상상 속의 부풀림으로 더 커졌지만, 사실은 잠깐 왔다 떠나는 손님처럼 예의뿐인 마음으로 지내다, 돌아오는 날짜가 되면 다시 커다란 가방을 챙겨 서둘러 작별을 하며 비행기를 탄다. 떠난 뒤에 남겨져 있는 이들의 아쉬움과 허전함은 생각하지 못하고, 늘 그 자리에 있을 거라고 크게 마음 쓰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만나러 가고 있는 나의 벗들도 가족들도 형제들도, 늘 한결같이 흐르는 큰강처럼 무심하듯 나를 받아주며 보내주었음을 이 다리 위에서 깨달았던 것이다. 결국, 지금의 나는 혼자 애쓰며 살았든 것이 아니라, 한결같이 반겨주고 다독거려주며 보듬어 주었든 다른 이들의 마음과 사랑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다시 살고있는 곳으로 되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오후의 나른함으로 여전히 시차에 몽롱하지만, 내 마음속에 흐르고 있는 푸른 빛의 한강을 . 나의 벗과 가족과 형제들의 변함없는 마음과 배려를 기억한다. 그렇게 이제는 굳이 혼자라 외로워하지 않으며 위로받고 살련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0-02-03 골동품
오래됨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그 세월만큼 간직해온 자랑스러움이다. 어릴 때, 늘 동네 고물장수와 엿장수 아저씨들은 하루해가 저무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우리집으로 모여들었다. 온종일 골목골목을 다니면서 "고물 삽니다"를 외치다, 구멍 숭숭한 하얀 엿으로 바꾼 온갖 잡동 사니와 낡은 가구들과 항아리들을 주루룩 우리 마당에 펄쳐놓고, 엄마의 간택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게 이상한 모임이 끝나고 어느새 어두워진 어둠 속에서, 한가득 마당에 쌓여있던 것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더럽고 낡고 괴상하고 오래된 물건들 가운데에서, 유난히도 아름답고 젊디젊고 생기에 찬 엄마의 야릇한 미소와 더없이 반짝이는 눈빛도 기억한다. 날씨가 추워도 더워도 엄마는 손수 물호스를 들고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씩씩하게 닦고 또 닦으며 제대로 된 가치를 찾고 있었다. 벼룩 옮는다는 아버지의 성화에도, 학교 앞 야바위꾼 아저씨가 내게 아는 척하는 것이 싫다고 아무리 보채고 울어도, 늘 해질 무렵이면 우리집 앞은 어김없이 몇 대의 고물장수 손수레들이 서 있었다. 고물을 예술품으로 진즉에 알아본 안목으로 수집하며 아껴온 엄마의 물건들은, 이제 골동품이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변신하여 긴 태평양 건너 내가 살고있는 집으로 옮겨와, 돌아가신 엄마 대신 주인을 바꾸어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오래된 무엇인가를 만나게 되면 언제나 존경심과 허무한 생각이 든다. 실제의 주인들은 이미 사라져 없어지고 생명 없는 물체만이 덩그러니 남아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또 나 역시 사라질 거라는 걸 상기시켜준다. 처음 생겨나 자신을 품어준 이들의 긴 세월을 다 보고 또 보내며 간직해온 묵묵한 침묵은, 낡았다는 감정보다 존경과 경이로움과 자랑스러움이다. 가치를 알아보는 이 없던 시절도 묵묵히 자신의 몫을 다하며 참고 기다리다, 이제는 더없는 소중함으로 세월을 견뎌낸 골동품 속에서 예술을 배우고 또 삶도 배운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20-01-08 오늘 그리고 내일
항상 더 나은 내일을 기다리며 산다. 지금 바로 곁에 있는 오늘보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위해 손과 마음 한가득 넘치게 감사할 모든 것들을, 일부러 멀리 모르는 곳에 아껴 놓는다. 어쩌면 걷고 있는 것들을 다 내어놓고 즐기며 자랑하고 기뻐하면, 지금 곁에 있는 모두가 가벼운 깃털처럼 훨훨 날아갈 것 같은 불안감과 미안함으로, 내일을 위해 미루어 놓는 것이다. 새삼 오늘이 없으면 내일도 없는 것인데 하는 자각으로 주위의 것들에게 오늘이라는 단어를 붙여본다. 오늘 아침, 오늘 신문, 오늘 기분, 오늘 커피, 오늘 날씨, 오늘 이야기 그리고 오늘의 나 ? 끝이 없다. 굳어버린 감각의 날을 세워 늘 그 자리에 있는 소소한 모두의 이름을 불러주고 의미를 채우며 새삼스러워하려는 것이다. 김천수 시인의 "꽃"에서 처럼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해마다 숫자를 바꾸며 매일을 살아가는 것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으로 그 어떤 것으로 오늘 이 자리에 서 있든, 무단히 노력하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 많은 힘든 순간들을 넘겨온 기특한 것이다. 가끔 그만하고 싶은 마음과 그래도 해내고 싶은 마음 둘이 갈등하다 간신히 이겨 낸 그 뿌듯함으로 또 살아간다. 구석진 마음 한 곳에 미루어 놓았든 오늘에게, 이제는 "잘했어. 그래 이 이상 어떻게 더 해?"라고 위로해주며 갓 뜨거운 새해를 안는다. 새삼스러운 작은 순간순간들이 모여져 제대로 된 하루가 될 것이고, 그 하루가 바로 오늘 그리고 내일로 순탄하고 매끄럽게 연결되어, 또한 그 기특함으로 머리 쓰다듬어 주며 살아갈 것이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19-12-05 Wine 이야기
무심한 마음으로 살다, 갑작스레 다가온 한 해의 끝을 느끼게 되면 대체 무엇을 하였을까 하는 두려움과 떠나간다는 안도함이 함께 찾아온다.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인간이기에, 늘 곁에 있어 주는 고마운 사람들이 있어 위로받으며 새로운 기운과 힘을 얻어 늘 평화롭기를 희망한다. 가끔 좋은 분들과 멋진 저녁 만남이 준비되고 화려한 식탁 위 자줏빛 투명하고 오묘한 색의 와인 몇 잔으로 인해, 잠시나마 세상일에 억지 부려 끼워놓은 힘을 거두며 삶이라는 커다란 명제 앞에 애기처럼 천진해진다. 그렇게 복잡한 이야기들은 다 잊고 촛불 아래 얼굴 가득 웃음 지으며 살아온 것들을 뒤돌아보는 짧은 순간, 그 자줏 빛은 지독히도 잘 어울리는 도도한 색감이다. 와인은 슬픈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다. 태초부터 태어난 그대로인, 포도라는 자신을 철저히 버려야만 성숙한 와인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을 버려야만 자신이 될수 있는 그 완벽한 버림의 아픔을 간직한 채, 긴 시간 숙성되고 천천히 익어가기에, 성경 속에서도 - 수 없는 세월 속에서도 멋진 찬사와 감동과 사랑으로 보답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음이다. 조금이라도 포도 자신의 맛을 드러내면 그것은 절대 와인일 수 없으며 또 혼자 빛나는 자신을 꿈꾸지 않고 - 다른 이들의 축제와 슬픔을 위한 첫째가 아닌 두 번째로서의 삶으로 살아야, 더 나은 새로운 개체로 거듭나며 또 사라진다. 매년 늘상 똑같은 후회와 결심으로 한해의 끝 언덕에 또 서성이고 헤매이지만, "어디쯤 가고 있을까, 얼마만큼 와있을까, 그래도 잘 가고 있을까"라는 질문은 이제 그만하기로 한다. 가끔은 유난히 반짝이는 세상의 별이 되고 싶을 때도 있고, 가지지 못하는 것을 턱없이 원하는 지나친 욕심도 있고, 자만하며 겸손치 못해 받았던 상처를 딱 그만큼 되돌려주고픈 때도 있지만, 완벽한 자신의 버림으로 인한 와인의 자줏빛 색감처럼 한 번쯤 그냥 다 버리고, 오늘 하루 내게 와있는 것들과 같은 편이 되어 살아가는 평화로운 날을 꿈꾼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19-11-06 행복한 여행
늘 많은 것을 품고 욕망하며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애쓰며 살다, 어느 순간 그 무엇인지도 모르는 헛헛함이 찾아들면, 아무런 계획도 열심인 준비도 없이 편한 몸과 마음으로 멀리 떠나고 싶어진다. 며칠 남지 않은 글의 마감일을 놓고도 초조한 마음보다, 마냥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슴과 마음이 시리게 설레인다. 언제나 무슨 일이든 꼭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었는데, 이상하다. 살아가다 속마음을 숨겨두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 두었던 묵은 껍질을 미처 깨뜨리지도 못한 채 여전히 무겁지만, 그래도 화려한 나비의 날개를 달고 훨훨 넓은 세상을 날아가는 상상으로 두근거린다.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행복한 여행을 위해서는 그 중심에 "나, 자신"이 있어야 한다는 글귀를 기억하고 있다. "여행의 행복은 장소가 아닌, 내가 만드는 것이고,,,, 기대는 접고 비교는 버려야 한다. 기대와 비교의 자리에 나의 기준을 세워야 한다." (도시를 걷는 문장들 . 강병융) 가슴에 많은 것들을 품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론 더없이 평범하고 비슷한 매일매일의 일상으로 살아가고 있다. 늘 산다는 것이 그런 것이 라며 변명하지만, 뜨겁던 청춘의 출렁임이 지난 후 잔잔해진 흙탕물의 침전처럼, 가라앉은 겸손함과 많은 것을 보고 느낀 넓은 기억으로 더 많은 진솔한 이야기를 써가고 싶다. 비록, 없는 변화라도 억지로 붙들고 만들어서 떠난 여행에서 돌아온 뒤, 무엇으로 어떠한 단어의 적절한 표현과 울림으로 다시 메아리처럼 되돌아올지 모르겠지만, 떠난다는 것 . 여행, 그것만으로도 지금 충분히 행복하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19-10-02 대추를 말리며
가을이 점점 색을 입혀가고 있다. 세상의 살아있는 모두는 결실을 서두르는 중이다. 마당 구석진 곳에 감나무와 사과나무 사이 겨우 자리잡은 채,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해 굽어진 모양새인 대추나무 몇 그루도 용케 잘 자라고 있다. 뜨거운 여름날이면 기다랗고 엷은 연초록빛 가지에 주렁주렁 하얀 작은 꽃들을 피우다, 서서히 때가 되면 그 작은 꽃들이 제법 튼실한 열매를 맺어간다. 감이 가지는 유혹의 주홍빛도 새콤한 사과의 진한 빨강빛도 아니지만, 부끄러운 듯 수줍은 노란빛을 띠며 존재감을 나타낸다. 이때가 되면 낡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제법 통통한 몸매를 찾아가다, 몰래 입안 가득 가을이 주는 아삭한 달달함을 맛보며, 수확한다. 아직 낮이 따가운 오후, 한가득 따놓은 대추를 손질하며 땀 흘린 얼굴을 식히려 일어서면 어느새 시원해진 가을 살갗이 선선하다. 살던 곳을 떠나 이 넓디넓은 땅으로 옮겨온 후, 문득 기억 속에 떠오른 대추나무를 찾아 심고, 가을이 오면 바구니 넘치게 따다 볕이 좋은 마당 동쪽 귀퉁이 넓은 곳에 말리며, 오래전에 떠나왔던 곳을 추억하며 설렌다. 미처 다 가져오지도 못한 채 얇은 등 뒤로 몇 번을 돌아보며 떠나 왔던 모든 것들을 그냥 잊은 척 - 모르는 척 지내지만, 늘상 마음속에는 작고 많은 일을 몰래 숨겨놓고 시침 떼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하나씩 떠오르는 기억을 꺼집어내 흉내 내다, 새삼 잊지 않고 있는것들에 또한 신기해한다. 이렇게 예전의 추억들을 찾아 가꾸며 거두고 말리는 모습을 보며 자란 나의 애들도, 먼 훗날 또 다른 어느 가을날 오후, 대추를 걷고 수확하다 설레게 불어오는 바람에 기억의 한편을 떠올리며, 한가득 펼쳐놓은 널따란 햇빛 아래 그들의 삶을 말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차를 끓이기 위해 얼마 남지 않은 작년에 말려둔 대추 한 움큼 손에 쥐고 느껴보다, 창틀 너머로 서서히 갈색빛으로 말려가는 대추를 바라보며, 또 다른 풍성한 내년의 가을을 그려본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I
2019-09-04
살며시 하나씩 소리 내 본다. 바람결, 마음결, 물결, 잠결, 무심결, 꿈결, 숨결, 손결,,, 평범한 글자 뒤에 따라붙으면 저절로 잔잔하고 부드러우면서 좋은 기분이 든다. 있는 그대로 편안해지는 느낌이며, 그 뜻은 무언가가 지나가는 사이 . 도중이란다. 다 지나가 버린 것이 아니라 머물러 있는 순간들에 부쳐지는 접미사이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요즘은 너무도 빨리 달라져 버려 그나마도 따라잡기 위해 매일의 숨이 짧고 가쁘다. 지나가는 잠깐의 도중도 없이 빠르게 변해가는 모든 것들에 당연히 뒤처지지 않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서두르지 않는 우아함은 잃고 싶지 않다. 문득, 바깥 기둥 위에 걸려있는 풍경을 간질이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면, 창문을 열고 편안하게 얼굴을 젖히면서 두 눈 지그시 감고 천천히 기다란 숨을 들여 마시며, 바람이 실어 온 먼 곳의 살아가는 냄새를 맡는다. 바람이 지나가는 사이를 느끼면서 무심한 시간을 잠시라도 곁에 붙들어 보려 하는 것이다. 이런 순간들이 작지만 소중하다, 그냥 느끼며 기억하면서 잠시 쉬었다 가는 머무름일지라도. 태어나 갓 시작한 모두의 삶들이, 세월 가며 달라져 가고 점점 전혀 다른 각각의 인생으로 산다. 무엇으로 사느냐는 질문이 어렵지만 사람스러운 사람으로 사는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면서 떠오른 생각이, 결이 고운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 결의 의미가 지나가는 사이 - 도중이라고 하니, 뜻이 깊다. 무엇이 되었다는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스치듯 지나가는 조그마한 것일지라도 정직하고 진솔한 마음으로 대하며, 또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애쓰고 가꾸어 온 숱한 시간들의 하나하나가, 바로 자신의 결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 새삼 배운다.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것이 아닌, 자신이 먼저 깨닫고 알아채며 부끄러움 없이 스스로를 인정하는 사람스러운 모습을 꿈꾼다. 결이 고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느끼고 싶다, 바람도 마음도,,,,, 그리고 다른 사람의 귀한 결도.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19-08-01 사랑
이 단어는 아름답다. 그리고 사랑은 오늘도 이루어지며 여전히 설레인다. 비록 손가락으로 만든 우스꽝스러운 모양일지라도, 서로를 미워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늘 사랑하고 또 사랑받고 있다면, 미움도 질투도 세상의 혼란도 아픔도 없을 것이다. 지독한 사랑의 소설 "폭풍의 언덕"을 손에 들고 있다. 이 가슴 졸이며 무섭고 시린 줄거리로 마치 불어오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함께 흔들리며 읽는 중이다. 도대체 사랑은 무엇일까? 세상의 모든 예술은 사랑을 바탕으로 심어놓은 뒤에야 하나씩 기둥을 세우고 담을 쌓으며 형성해 간다. 이 세상을 만드신 분에 대한 고귀한 사랑으로부터 인간의 본능적인 사랑까지 모든 기쁨과 환희와 고통의 절절한 이야기들이, 글과 그림과 음악으로 남겨져 오랜 세월을 넘어 모든 이들을 감동하게 만든다. 그러나 모든 사랑이 예술 작품 속에서처럼 진실하며 순결하지는 않다. 세상에는 "만약에" 하는 조건을 내걸며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미련 없이 떠나는 사랑도 있고, 또 "때문에"라는 이유가 붙어 그 형체가 사라지면 -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그런 사랑도 있다. 요즈음 나는 새삼 많이 아파한다.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엄마의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정말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아픔은 철없었고 모자랐고 불평투성이였던 나의 당연한 벌이라고 생각하며, 그로 인해 더 많이 사랑에 대한 생각이 깊어진다. 엄마도 처음 해보는 사랑이었는데, 이제서야 깨닫고 후회하며 슬퍼하는 그러나 다시는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조건이 붙지 않으며 어떠한 경우라도 무엇이 되어있던지 끝까지 지켜주는 영원한 부모의 사랑이었었는데, 그 사랑을 제대로 느끼며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세대를 넘어가며 세월을 따라 이어지는 삶의 이치가, 어느덧 나의 순서가 되어가는 중이다. 과연 무엇으로 어떠한 사랑을 했었다고 기억될까 하는 숙제 앞에서 숨을 들이쉬며, 책상 앞 자세부터 고쳐 앉는다. 오늘도 꿈꾼다 아름다운 사랑을. 그리고 사랑은 영원히 존재하며 그로 인해 세상은 다음 세대로 넘겨지고, 또 그 사랑 때문에 누군가는 설레이고 환희하며 더불어 아파할 것이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19-07-03
집을 좋아한다. 어쩌다 밖에 나와 있다 해가 지며 날이 어두워지면 얼른 돌아가고 싶어 서둔다. 집이라는 의미는 지붕과 벽이 있어 바깥의 위험과 날씨 변화에 보호해주며, 힘들고 지칠 때 안전하게 머물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이다. 살면서, 지붕 하나 없이 세차게 내리는 비를 차마 피하지 못한 채로 서로를 사랑할 여유를 가질 수 없을 것이며, 바람 하나 막아주는 벽 하나 없이 정신적인 안정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집에서만 지내다 나가야 하는 일이 생기면 얼굴에 이쁘게 화장을 하며 제일 좋은 옷을 입고 대문을 나선다. 진짜의 나는 잠깐 내려놓고, 분장하고 무대 의상을 입고 나갈 채비를 하는 것이다. 세상 밖의 일에 서툴고 부족하며 가벼운 두려움까지 가지고 있고, 감정적인 성격과 잘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미소로 숨긴 체 산다. 어쩌다, 있는 본 모습 그대로 드러내어 마음의 상처로 되돌려 받으면 후회하며 아파한다. 또 사람들과의 관계에 혼란스레 돌아온 그 날 밤은, 불도 켜지 않은 체 어둠 속에 앉아 부끄럼 없이 맥주 한잔 들이킨다. 이런 나를 온전히 내어놓고, 힘들고 지칠 때 아무 생각하지 않고 편안하게 쉴 수 있고 위로받는 곳이 집이다. 그러듯 하루가 지나가고, 한밤중 느닷없이 켜지는 마당의 물주는 소리에 깨어 깜깜한 어둠 속에 무서워하지만, 다시 다독거리며 기억하여 도로 잠드는 곳이기도 하다. 어느 동네, 어떤 크기, 얼마의 값으로 매겨지는 건물로서의 개념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편안해지는 곳으로 서로 사랑하고 돌보며 지나온 수많은 순간과, 잘못한 후회투성이의 아픈 이야기와 사랑하는 곁의 누군가가 떠나는 슬픔이 다 녹아있는 곳이 세상에 있기에 삶은 그리 퍽퍽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함께 나누며 살아가며 이루어가는 오래된 세월과 구석구석 배어있는 밥 냄새처럼 익숙하며 텁텁한 숱한 시간을 함께 나누며 보낸, 묵은 사랑과 추억이 담겨있는 집을 좋아한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19-06-02 신앙
어릴 적 읽은 동화책 속에, 할머니가 해가 너웃너웃 넘어가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산을 넘어갈 때마다, 무서운 호랑이가 앞을 가로막으며 떡 하나 주면 무사히 보내 준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삶도 높은 산을 넘어 가야 할 때가 있고 그 앞에는 알지 못하는 두려운 호랑이 한 마리가 버티고 서있어, 그곳을 지나가기 위해 나도 광주리 속 못난 떡 하나 쥐여주며 지나간다. 내가 가진 떡은 신앙이다. 살아가다 불현듯 감당하지 못하는 일을 지날 적마다, 숨 한번 크게 쉬며 부족한 신앙에 매달린다. 갑작스러운 극심한 배의 통증으로 미련하게 버티며 고생하다 결국 응급실을 찾았고, 급히 수술을 하고 깨어나니 병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좀 심하게 늦은 맹장 수술을 한 것이다. 독한 진통제에 홀려있었지만 그나마 식구들을 집으로 돌려보낸 후, 혼자 남은 병실의 밤은 오롯한 아픔이었다. 온 밤을 아파하며 어스러미 새벽이 밝아오는 걸 바라보다 떠오른 생각이, 또 다른 인생의 산을 무사히 넘어가고 있구나 안심하며, 두려웠다. 얼마나 더 많은, 삶의 산과 언덕과 골짜기를 넘어가야 하는지, 갑자기 돌아가신 엄마,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내 신앙 - 떡이 담긴 광주리는 이젠 낡아 부서지고, 그 속의 떡은 볼품없이 못나고 맛없는 것이다. 오랜 세월을 간직하고 지키고 있지만 여전히 부끄럽고 민망하다. 비록 그런 형편없는 것일지라도 - 힘들고 어렵고 무거워도 - 꼭 붙잡고 지탱하며 넘어질 듯 불안하지만, 용케 긴 길을 걸어가야 한다. 며칠 후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와 울음 터트리며 감사하면서, 어쩌면 이 못나고 보잘 것 없는 신앙일지라도, 끝까지 간직할 거라 뜨거운 약속 드린다. 살아지며 살아가는 오늘도, 크게 기대고 원하고 투정부려도 되는 알파요 오메가이신 분에 향한 믿음 - 신앙으로, 남겨져 있는 인생의 산과 언덕과 골짜기를 헤매며, 선선히 지나갈 것이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19-05-01 책을 읽으며
언제부터인지 자꾸 마음을 다스리는 책들을 가까이하며 나를 돌아본다. 어쩌면 삶의 계기가 필요하다는 걸 알고 또 변화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항상 잘하고 싶다는 조바심으로 종종거리며 살던 때를 돌아보며 후회가 아닌, 그래 그랬었지,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야 하며 인정해주게 되면서부터 조금씩 자신을 풀어주며 행복해지기 시작한다. 책 안에서 이야기하는 많은 문장에 펜으로 줄을 긋고 또 공감하며 천천히 열어본다. 얼마 전에 읽은 "고요 할수록 밝아지는 것들"이라는 책에서는, 무엇이든 욕심을 내려놓고 천천히 살살 가면 되지 빨리 가려고 하니까 문제가 생기며 힘든 거라는 구절에서는, 몇번을 머리 끄덕인다. 모든 것을 사랑할 수는 있어도 소요할 수 없으며, 넓은 우주의 시간으로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은 아주 잠깐 빌려 쓰는 것이니, 세상을 그저 사랑하고 감사해하며, 잠시지만 행복하게 누리다 가는 것이라는 결론에는, 책 한권을 읽고 남겨진 것으로 삶이 설렌다. 시간은 흘러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작고 많은 것들이 모여 습관으로 변하며 그것은 인격으로 만들어져 내 안에 쌓여가는 것이고, 결국은 궁극적인 하나의 인간을 형성해가는 것일 거다. 작지만 한달 한달 책을 읽으며 그 의미를 음미하고 지내다, 어느 하루 만나 서로의 인생과 경험과 마음을 나누는 날이 있다. 전혀 다른 삶으로 살다 한권의 책으로 만나, 깊고 긴 교감을 나눈다. 이렇게 지나 온 오랜 날들이 쌓여, 격과 품위로도 헛되지 않은 소중한 시간일 것이다. 시작은 비록 미약한 작은 것들로 이어져 그 끝은 장대해지리라는 성경 말씀처럼, 분명 삶 속에 가랑비에 옷 젖듯, 온전히 스며 있음도 알고 조금씩 달라져 가는 자신도 느낀다. 책을 읽으며 그 안의 것들이 스며들어, 겸손해지고 내려놓을 줄도 알게 되고 외로움도 느끼면서,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이런 시간을 보낸 어느쯤이면, 고요해지며 밝아지는 자신을 만나게 될 거라 믿는다. "인간의 일생이라는 것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기 위한 여정이다." (데미안)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19-04-02 나무
아침 식탁에 앉아 창문너머 변함없이 늘 그자리에 서있는 앞마당 커다란 나무들을 보며, 오늘 하루도 평안 하리라 믿어본다. 2년만에 다시 만난 그애의 그림은 언제나 나무이다. 한결같은 대상인, 나무 위에 또 나무를 그리고 있다. 오랜만의 서울이라, 지금도 여전히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궁금하고 또 보고싶은 마음을 잠깐 화장실을 핑계로 징징거렸더니, 선듯 문을 열어준 3층 넓은 화실의 그림 속에서 다시 그애를 보았다. 굳이 따로 만나려 하지도 않았고 실제 마음 길이도 한 발자욱 떨어져 살고 있지만, 늘 응원한다. 서로의 표현 방법-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도 판이하게 다른, 그렇지만 무엇보다 오랜 시간 한결 같이 그림을 그리며 오래된 길을 가고있는 벗이라, 귀히 생각하며 아낀다. 어쩌면 그애는 나의 감정 - 이 짝사랑을 전혀 모르고 있을 것이며 굳이 말하고 싶지도 않다. 아주 커다란 캔버스 위에 옅은색의 나무를 하나씩 정성들여 그리고, 그 위에 색을 입히고 마르기를 기다리며, 다시 또 몇번을 나무 위 색상을 덧바르고 기다린다. 그렇게 자신의 감정들을 덮고 또 새로운 칠을 하며 작품을 만들고, 삶도 그렇게 살아간다. 가로수 길의 나무들이 한결같이 다 잘자라지는 않는다. 바람에 견디지 못해 가지를 부러터린 체 겨우 지탱하고 있는 것도 있고 두팔 벌린 모습으로 한없이 뻗어나간 것 들도 있다. 그렇다고 굳이 서로를 샘내거나 질투하지 않으며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그래서 우린 나무를 닮고 싶어하나보다. 늘 변함없이,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그 모습 때문일 것이다. 숨기지 못하는 숨길 것도 없는 지금의 인생길이지만, 그 길은 누구도 아닌 자신이 만들었고 만들어 가며 또 만들어 갈 것이 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나도 한그루의 나무처럼 묵묵히 햇빛과 물과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굳굳히 자라며, 평안 할 거라 믿어본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그림
2019-03-04 플라멩고 춤
아름다운 무희가, 화려한 색상의 겹겹 레이스가 길게 늘어진 치마 한쪽을 손끝으로 살짝 잡은 체, 손과 손바닥에서 부딪히며 소리를 내는 둔탁한 악기로 박자를 맞추면서, 몸의 무게를 실은 발바닥으로 무대 위를 쳐가며, 투우사 복장의 멋진 남자와 함께 더없이 붉은색상과 강렬한 리듬에 맞추어, 온몸으로 추는 정열의 춤이 플라멩고라 상상했다. 스페인의 한겨울 저녁 칼바람을 맞으며 언덕 위를 굽이굽이 올라, 가파른 길이 문득 넓어진 곳에 멈춘 곳이 바로 플라멩고 공연장이란다. 오래되고 작은 허름한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벽을 휘감은 검정 벨벳 커튼은 오래된 먼지로 덧칠하여 회색빛이었으며, 무대 위의 장식들은 마치 옛날 시골 동네 조조할인 극장의 영화 간판처럼 유치하다. 뜻밖의 모습으로 - 상상과는 너무 다른 때문인지 - 왠지 슬픔이 올라온다. 깡마르고 40살은 넘은 듯하며, 삶의 피곤을 차마 씻지도 못한 탓에 화장이 하나도 얼굴에 붙지 않은 초라한 집시 여인이, 낡은 의자 모서리에 걸터앉아 있다. 푸석거리는 머릿결에 반짝이는 값싼 머리핀으로 억지 붙들어 놓은 머리 모양과 조잡한 검정 레이스의 윗옷과 치마를 입은 무희는, 차가운 조명을 받은 채 기다린다. 뜻밖의, 단정한 회색빛 양복을 입은 앳된 집시 남자가 뱃속에서 나오는 듯 아릿한 노래를 시작하자, 의자 위의 그녀가 서서히 일어나 무대 위를 강하게 발바닥으로 쳐가며 온몸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느새 그녀의 왼쪽 귀 뒤편에 꽂힌 파란색 조화가 피어나고 그녀는 강렬하며 아름다운 무희로 변신하며 그 조잡해 보였던 검정 레이스들은 함께 값어치를 달리하며, 아프게 한다. 여자의 표정은 온 세상의 고뇌와 아픔을 혼자 짊어져, 마치 모든 것을 오늘 이 자리에서 기어이 버려 버리겠다고 작정한 거처럼 처절하다. 무대 밑 맨 앞자리에 앉은 난, 뜻 모를 슬픔에 흐느끼기 시작하고 춤에 취한 그녀는 먼 공간으로 훨훨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 어떤 순간, 나와 그녀의 눈이 마주치며 - 만났다. 숨이 멈추고, 춤 안의 모든 아픔과 슬픔이 그대로 전해지며, 나도 내 안의 것들을 끄집어 내고서는 함께 다른 공간을 넘어선다. 춤에 빠져, 세상 너머의 곳에 있는 그녀의 눈에서도 마침내 눈물이 보이고 난 그 의식 속에 같이 느끼며 함께 있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문득 고개를 심하게 돌리며 뒤돌아서는 그녀의 동작으로, 귀 뒤편의 파란색 조화는 끝내 무대 바깥으로 떨어져 나가고, 춤은 끝났고 그 순간들도 다 끝났다. 미처 눈물을 거두지 못한 난, 부끄러움 없이 그녀에게 작별했다. 그때의 아픔이, 그 순간이 아직도 선명하다. 정말 모르겠다, 왜 그 먼 나라의 느닷없는 초라한 집시의 춤 안에 하나가 된 채 떠돌았는지. 그리고 알고 싶다. 언제쯤 다시 찾아 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번이라도 더 플라멩고 춤과 그녀를 만나야 한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19-02-05 여행의 잔재, 스페인에서
비우려고 떠났던 여행길이, 가방 아니 머리와 마음속 가득 채워진 체 더 많이 무거워져 돌아온다. 어떠하든 반드시 내가 살고 있는 곳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 여행이다. 그렇지, 되돌아오지 않으면 분명 그건 전혀 다른 단어로 표현되어야 할 것이니까. 돌아와야 한다는 걸 건드리지 않은 체, 살아오며 품었던 아련한 여러 상상을 나만의 방식으로 만나 보고자했다. 화려한 명성에 어울리는 장대한 궁전들과 끝없이 많은 성당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이루고자 다른 이들의 목숨까지 바쳐야 했던 역사 속의 인물들과 수 없는 삶과 죽음의 사건 - 그 모두를 책상 앞에서 남들의 대화 속에서 또한 실제보다 멋진 사진 속에서 공부하고 들었고 보았던 것이기에, 이제는 만나볼 때가 되었다 싶어 한겨울 추위에도 잠시 서둘렀다. 모든 것들을 타인에 의해 고정된 탄성의 감동이 아니라, 생생하게 나의 눈을 통해 들어와 잠깐 머릿속에 머물다 바로 순식간에 가슴으로 내려와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아픔과 슬픔과 환희로 소리치며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렇지만 첫 번째 드러난 만남은, 오히려 가늠했던 거보다 더 과장되게 웅장하였고 상상 속보다 훨씬 더 화려했으며 도무지 인간의 한계를 넘어버린 섬찟한 두려움 때문에 - 스스로의 무능함과 게으름과 자책으로 - 감정의 바닥까지 건드려져 긴 여행 내내 아팠었고 유독 심한 추위에 떨었었다. 언제부터인지, 아주 오래된 과거를 만나러 떠난다. 현재 아니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제는 사라져 없어진 채 이름으로만 남겨진, 옛날의 누군가와 또 그 누군가가 살며 아끼며 간직했던 물건들과 그 안에서 무엇을 하며 어떤 삶을 살았든가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죽은 자의 이야기들이 살고있는 자들에게 끝없이 연결되어 그 역사로 말미암아 깨우치며 배우며 살아가는 것이다. 어느 소설 속 슬픈 여주인공이 그러더라 - 어쩌면 이 세상의 잊을 수 없는 것들은 언제나 뒤로 남겨져 있으며 그래서 과거는 버릴 수가 없는 것이라고. 사라졌다는 무의 아픔과 그 차가운 서산함으로 남겨진 것들에게서, 나는 여행 내내 무슨 의미를 어떻게 만났으며 또 지금은 무엇으로 나 자신의 생각과 살 속으로 남겨졌으며 - 오늘에서야 늦은 아침 커피 한잔을 든 체 - 과연 또 얼마만큼 달라져 가고 있을지를 묻고 있다.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의 욕망을 욕망한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2019-01-08 나비효과
아주 작고 갸날픈 나비의 날개짓이 파장을 일으키며 퍼져나가면, 먼 곳의 어느 곳에서는 폭풍우 같은 커다란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다고 한다. 무심결의 작은 일들이 서로에게 원인과 결과가 되어 나중에는 아주 큰 일이 될 수 있으며, 사소한 사건 하나가 알 수 없는 미래에 상상도 못 할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가 하고있는 작은 일이 어쩌면 시공간을 가로질러 멋지고 훌륭하며 아주 대단한 일이 될 수도 있다니 상상만 해도 신이 난다. 6월의 마지막 일요일 오후, 날씨는 한여름을 맞을 준비로 뜨거웠고, 도로 위의 차들은 축제마냥 온통 밖으로 나온 듯 거리를 가득 메웠으며, 차 속의 우리는 한껏 들떠있었다. 1년에 한 번, 책 읽는 것과 글 쓰는 것을 사랑하며 삶 속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2박 3일 집을 떠나 스승을 모시고 온밤을 새우며 토론하는 날들이 있다. 열정 속 이야기들을 쏟아내며 소박하나마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의 재정비를 끝내고, 마지막 날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그 며칠을 함께 보낸 우리는 표현할 수 없는 감사와 사랑을 느낀 체, 넘치는 감정으로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마음들이었다. 비록 길 가득 막혀있는 다리 위 요금소의 지독한 혼잡함 속에 있었지만, 선선히 차선을 양보한 뒷 차에게 감사하기로 하였다. 우리의 커피값 대신, 통행료를 대신 내어주기로 순식간에 결정하고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내민 요금소 앞에서의 미소는, 6월의 더위보다 더 뜨겁고 아름다웠다. 짧은 순간을 끝으로 넓어지는 도로 밖으로 나온 우리를 향해, 뒤따라 달려온 차 속의 남자는 온몸으로 온손으로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소리치며 손짓하며 얼굴 가득 행복과 감사로 웃고 있었다. 비록 순간으로 스쳐 지나갔지만 차 속의 우린 더 많은 행복과 감사를 받았으며 그때 알았었다 . 어쩌면 이 작은 베푸는 스침이, 나에게서 다른 이에게로 그리고 또 더 많은이에게로 더 멀리 퍼져 훨훨 날아가게 될 거라고. 결코 작은 일이라는 것은 없다. 기쁨도 사랑도 행복도 다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고 상처도 원망도 미움도 아주 하잖은 것에 매달리며 기억하는 것이다. 어떤 하나의 원인이 다른 결과를 초래하는 간단한 원리이지만, 나비의 날갯짓 같이 사각거리듯 작은 선한 일들은 언제 어딘가에서 더 큰 감사로, 보이지 않는 시공간을 넘어 누군가에게 아주 소중한 일이 될 거라 믿으련다. 그 믿음으로 오늘 하루의 작은 일에도 마음을 담고 행동하며 살다 보면, 문득 내가 한 작은 선한 일들이 언젠가는 멋지고 신기하며 상상할 수 없는 일들로 만들어져, 나비처럼 훨훨 날아 나에게로 되돌아올지도 모르니까.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19-01-08
소셜 워커로 일하고 있는 미국인 친구 신시아로부터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 몬트레이의 마리나 바닷가에서 일주일간 지낼 수 있는 호텔을 예약하여 전액을 대불해 준 것이다. 꿈 같은 시간들을 보내고 일터로 돌아온 지금에도 하얀 파도를 가르는 바다와 코끝에 스민 신선한 해초 내음은 큰 능력이 되어 눈 앞에 쌓인 일거리들이 힘들기는 커녕 즐겁게만 느껴진다. 부서진 물보라를 따라서 총총 걸음을 하던 작은 새들의 행진이 저녁 노을에 어우러진 절묘한 조화는 말그대로 환희였다. 이 멋진 겨울 휴가를 함께 누린 친구는 모두 다섯 명이었다. 직업도 각기 달라 발휘한 재능으로 우린 정말 깨알 같은 재미를 누렸다. 평소 어디를 가든지 잘 먹어야 한다는 구호를 외치고 있는 우리는 유명한 식당의 요리사로 일하고 있는 친구의 손맛에 황홀함을 감출 수가 없었고, 행여 절제 못하여 배탈이 날 세라 혹은 넘어져 다리라도 부러질까봐 세심하게 살펴주는 의사 친구를 믿어 맘놓고 뛰어 놀았다. 나이를 잊은 아줌마들의 해맑은 모습들의 순간에 집중한 사진작가 친구의 작품은 큰 즐거움이었으며, 평소 굳건하게 지킨 품위를 내던지고 자유로움 그 자체를 만끽하느라고 여기저기 벗어놓은 옷가지들과 과자 봉지를 기꺼이 즐거움으로 정리해준 착한 친구로 인해 청결상태는 매우 양호했다. 그렇다면 정작 나는 무엇을 했는가 묻는다면 나름 중요한 설거지를 담당했다고 말한다. 끼니때마다 싱크대에 쌓여 있는 그릇들을 기쁨으로 닦고 또 닦는 재미도 제법 쏠쏠했다. 마음에 묵혀있던 찌꺼기까지 흐르는 물에 깨끗이 흘려 보낸다고 생각하니 절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게 되었다. 코드가 딱 맞아 떨어진 우리는 매일밤 찬란한 별을 바라보며 온탕과 수영으로 불어난 몸매를 잡아주었고 낮에는 모래 사장을 걷고 달리며 체력 단련에 전심을 다했다. 처음에는 숨이 차서 쓰러질 것 같았지만 일주일이 되가니 모래 위를 달리는 것이 구름 위를 걷는것 처럼이나 가뿐하게 느껴졌다. 여행은 바로 이 맛인 것 같다. 어느덧 두고온 가족도, 해결해야 할 고민 거리도 다 잊었다. 앞으로 살아갈 2019년 새해의 불투명한 염려까지도 오히려 자신만만해졌다. 이런 휴식이야말로 삶의 면역 보강을 위한 백신 치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을 떠나기 전날 우리는 아쉬움을 안고 모래 언덕길에 올랐다. 소금기를 먹고 자란다는 선인장이 즐비하다. 이슬과 바람만을 먹고 생존한 풀들은 어쩜 그리도 싱싱하고 강한지 신기하기만 했다. 오로지 사람의 발자국만으로 만들어진 선인장 길을 걷던 중 무심코 힘들게 밟아온 길을 뒤돌아 보게 되었다. 아주 좁은 길이었기에 중심을 잡고 걷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을 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오솔길 같은 S자 길에서 뜬구름 없이 내가 걸어온 인생의 발자국이 클로즈업 되어 다가왔다. 결코 정로를 걷지 못하고 살았던 흔적이다. 아름다운 여행지에서 왜 하필 어울리지도 않게 완전하지 않은 세금보고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는지 나 자신이 이해가 되진 않지만 나는 큰 숙제를 안고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는다고 했다. 쫓지 않고 서지 않고 앉지 않아야 되는 이 양심의 문제 앞에서 이미 오랫동안 주저않아 버려 앉은뱅이가 된듯한 내 모습. '아는 것보다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어느 책자의 문구가 내 마음 안에서 소용돌이 친다. 에스더 최 (수필가) KTVN TV Reporter 역임 SF Koreadaily News Reporter 역임
2018-12-06 가장자리에서
편안한 느낌이다. 그의 본뜻은 가운데의 중심이 아닌 둘레나 끝에 해당하는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이란다. 알게 모르게, 나 자신을 모든 것의 중심 - 한가운데에 두기 위해,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 가진 것보다 훨씬 더 과장하여 포장하려 하기 위해, 덧없이 애쓰며 살고 있다. 그러면서 진정으로 소중한 작은 일상들을 하찮아하며 뭔지 모르는 강박감에 싸인 체, 유독 현실에만 치열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12월 이라는 숫자 앞에서, 한번은 나에게 묻고 싶은 삶의 이유와 목적을 떠올리다, 언듯 이끌린 책의 끝 제목이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그린다는 자체에 집중하여, 오랜 시간을 한자리에 앉은 채로 몰두할 때가 있다. 그 순간에는 다른 어떤 생각도 들지 않으며, 다만 무언가 잘하고 있고 어딘가에 철저히 집중하고 있다는 황홀한 느낌에 빠져들며, 다른 어떤 것들도 눈과 마음에 넣지 않은 체이다. 그런 날의 그림은 당연히 망쳐진다. 주위의 다른 색과 형체의 조화 같은 것은 잊어버리고, 나의 그림이라는 사실에 온전히 중심에 두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그림은 색감도 형체도 그림 속에 넣으려는 감정도 다 제각각의 아우성에 의해, 함께 어우러지지 못한다. 어느 하나를 위해 나머지는 내려놓아야 하는 포기라는 기본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붓을 내려놓고 의자에서 일어나 몇 발자국 더 떨어져 멀찌감치에서, 어떻게 색감과 형체와 내 안의 감정들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져 가고 있으며, 진심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어딘가에다 어떻게 더 집중해야만 하는지 수시로 봐가며 그려야만, 그림이 작품으로 완성되어, 언제나 조금은 덜 만족스럽지만, 마지막 사인을 하고 끝맺음을 하게 된다. "숲에서 나오니 숲이 보이네" 어느덧, 억지로라도 붙들고 매달렸던 것들을 뒤돌아보면, 새삼 그 어떤 것도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어떤 강한 높은 곳의 그분 덕분이었음을 깨닫는다. "누군가에게 뭔가를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느끼기에 더이상 거드름 피우지 않아도 되는 시기에 이르면 우리는 해방감을 느낀다."라는 문장에 밑줄을 그으면서, 가장자리가 끝이 아니라 새로운 또 다른 무언가가 있으리라는 기대로,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거라며 시작한다. 삶 속의 좋은 것, 나쁜 것, 아름다운것, 추한 것 이 또한 나의 것임을 깨달으면서 "다 잘될 거야. 그리고 다 잘될 것이다. 모든 사물의 존재 방식 또한 다 잘될 것이다" 믿으면서 어렵고 힘들었고 가끔은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더없이 소중하고 신비스러운 삶의 조각인 - 1년을 끝낸 후, 해야하는 마지막 단어는 감사합니다 바로 그 한마디였다. 김해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월간 한국수필 2009년 제178회 신인상 수상
2018-12-06 지금은 공사 중
기자가 조각가에게 질문을 했다. "일생 동안 스테인리스 스틸이라는 재료를 탐구하여 조각에 놀랍도록 새로운 가능성을 제기한 당신의 작품들은 어떤 깊은 사유의 면모를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특징이 있다고 평을 합니다. 그러면 누구의 눈에나 판별 가능한 구상의 모습을 다른 자리로 탈피시키는 변화의 과정에 그 어떤 노하우가 있습니까?" 작가는 대답한다 "작업은 쥐어짜면 안돼요. 몸의 파장대로 천천히 움직여야 합니다. '내 것'은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다만 바깥을 통해 나를 보는 거지요. 내 안에 있는 것을 내가 물리적으로 나오게 할 순 없습니다. 스테인리스 스틸을 이해하고 느껴져서 드디어 사람 같이 생각이 되어 그 재료가 당신의 마음 속 깊이 들어올 때에야 비로소 작품으로 변해있음을 봅니다. 무엇보다도 금속성의 물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어떻게 보면 차갑고, 또 어떻게 보면 따뜻하고 가벼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대단히 무겁기도 한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 어렵지요. 성질이 더러운 놈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툭 치면 어디로 튈지 모르니 찬찬히 달래가며 구슬려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할거야' 하고 마음 먹으면 말을 안 듣거든요" 이 작가의 답변대로 그는 사람들에게 그리 주목 받지 않는 스테인리스 스틸의 재료의 물성을 이해하여 우리의 일상 생활에 변하지 않는 재료들로 수 많은 곤한 과정을 거쳐 탄생시킨 모든 작품에는 결정적 순간이 녹아 있다고 고백한다. 즉 대상의 외면과 내면, 시간의 흐름과 주변환경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시간성, 장소성을 총체적으로 고려하면서 조각의 범위를 확장시킬 수 있는 질문을 이어간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애석하게도 작가의 심오함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많은 작품들 중에 그나마 제주 조각공원의 '무제'나 포스코 센터, 통영의 남망산 공원에 있는 'flower' 그리고 순천의 분수공원과 국립 현대미술관에 전시돼 있는 조각품 정도는 거듭 설명을 들은 터라 느낌이 있긴 했다. 그의 전시회가 열릴 때마다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안내를 담당했던 도우미로서의 내 역할이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만 하다. 오늘 나는 한국으로부터 한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영원한 울림, 영은에 담다' 라는 타이틀로 도흥록 조각가의 주요 유작을 광주의 영은 미술관에 기증했다는 소식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후원으로 대중과 함께 오빠의 작품 진면목을 오래도록 공유하고 싶다는 전시회 취지도 함께 밝혔다. 활발한 화가로 활동하고 있는 올케 언니가 남편에 드리는 사랑과 격려의 마음 씀씀이 선물이다. 갑자기 떠난 오빠를 그리워하며 애써서 준비한 언니의 배려에 눈물이 왈칵 솟구친다. 오빠의 유작을 만나기 위해 비행기 표를 끊어놓고 있자니 2년 전 그 때, 오빠의 마지막 말이 자꾸 맴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있다던 오빠는 어느 날 내게 전화를 했다. "잘 지내냐" "응. 오빠, 얼마 있음 오빠 얼굴 볼 수 있겠네.." "그런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지금은 내부 공사 중이거든" "준비가 다 끝났다며? 근데 무슨 수리를 또 해야 돼?" "내 몸의 오장육부를 공사하고 있어, 간암 말기래. 가망이 없다지만…." 예술가는 죽어가는 비통한 사실을 이렇게 알렸다. 그리고 덧붙인 말은 "얘야, 너 어렸을 때 참으로 착했는데 미국 가더니 너무 독해졌더라. 내일 일은 모르는데 그저 마음 비우고 살아라. 오빠는 인생이란 내 작품처럼 늘 공사 중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지 뭐냐…. 그리고 울지 말아라" 놀이터로 알고 드나들었던 오빠의 넓은 작업실이 눈에 들어온다. 각종 금속 기구로 가득 찬 공간 안에서 오빠는 쇠를 갈고 자르고 용접으로 붙이느라 정작 내가 들어서도 알아채지를 못했다. 뭔가의 조각에 몰입돼 혼과 영이 하나가 된 모습에는 조용히 곁눈질 하고 있는 나마저 재료를 통해 재현한 대상에 대해 저절로 숙고하게 만들었던 기억이다. 그 때의 '사과, 퍼즐, 바이올린'을 조각하던 오빠의 현란한 손 놀림이 나비가 되어 훨훨 하늘을 난다. 비행기표를 앞에 놓으니 2년 전 오라버님의 마지막 말이 자꾸 맴돈다 "얘야, 내가 지금은 오장육부 수리 중이지만 어찌 보면 인생자체는 늘 공사 중이야. 소망이라면 인간에겐 영혼이란 게 있어서 인생은 미완성이 아니라는 얘기지. 동생아, 울지 마라" 에스더 최 (수필가) KTVN TV Reporter 역임 SF Koreadaily News Reporter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