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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5 여름은 떠났고
올여름의 낮은 유난스레 뜨거웠고 또 해가 진 후의 밤은 묘한 차가움에 오돌오돌 추웠었다. 그 변덕 부리던 계절이, 천천히 보이지 않게 떠나며 시간의 다리를 건넜다. 어젯밤, 누군가가 하늘의 보름달을 꼭 대문을 열고서 보라고 했다. 새삼 문밖으로 나와 본 달은 환하게 더 가까이에 떠 있었으며, 그 달빛 탓인지 대나무들은 그림자와 더하여 훌쩍 더 길어진 모습으로, 얕은 바람과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모르는 척해도 나무들은 아무 탈 없이 잘 자라고 있었고, 어느새 잠결에 따라 나와 유난히 비벼대며 사랑을 원하는 고양이도 벌써 다 자라 버렸고, 나도 그사이 조금씩 알게 모르게 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내가 주제가 아닐 진데도, 어리석게 그냥 모른 척 해버리면 변하지 않은 체 있어 줄줄 알았었나 보다. 변하지 않고 고여 있는 건 썩는 것이라는데 그래도 달라져 떠난다는 건 아프다. 거울 속 나이 들어가는 나의 모습도, 곁에 마냥 있을 것 같은 이들의 갑작스러운 이별도, 세월이 너무 빨리 지나가는 시간의 무서움도, 되돌리지 못하는 많은 해야 하는 일들도. 그런 무심함에 억지로 갇혀있는 나에게, 어릴 때 고향으로 성묘 가던 이야기와 보름달을 보라든 작은 글귀 하나가 후두둑 내리는 소나기처럼 시원하게 적셔왔다. 어쩌면 이제는 그 무심함의 게으름도 충분하고 미적거리는 겸손도 그만하고서, 마음 창고 건너편 속에 자물쇠 걸어뒀든 또 다른 욕심과 용기를 꺼내야만 할 거 같다. 그렇지, 또 다른 여름은 다시 올 것이며, 늘어져 있는 허리춤 추겨 올리면서, 산다는 것의 남아있는 몫의 판, 신명 나게 즐기며 해보련다.
2016-09-02 술 한잔
술이 주는 작은 여유에 온종일 꽉 쥐고 있던 하루가 노곤해지면서 힘이 풀린다. 아주 옛날 - 저녁 해 질 무렵, 애국가가 흘러나오면 모두가 하고 있던 일들을 멈추던 때가 있었다. 그 시간이면 뒷마당 돌 불상들이 나란히 서 있는 연못 앞에서 엄마가 맥주를 드시곤 했던 기억이 난다. 윗층의 병원에서 일하시다 마당에서 놀고 있던 나를 부르시고서는 "엄마, 맥주 하나 가져다 드려라"고 하며 웃으시던 아버지의 모습도 생각난다. 새삼 맥주를 권하며 아래를 내려다보던, 또 해 질 녘의 모과나무 아래 그늘 밑에서 위를 바라보며 눈을 맞추던 두 분의 보이지 않턴 애틋한 사랑에 가슴이 먹먹해 온다. 그땐 왜 그리도 몰랐었는지,,, 하루가 끝나가는 고단한 시간에 아버지는 엄마가 그리웠었고, 또 그 작은 맥주 한잔이 오늘도 수고하였다는 고마움의 표시였던 것 같다. 이 사랑을 이제서야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어느덧 나도 그 시절의 어른 나이가 되어 세월을 많이 묻혀간다. 가끔 해가 산을 넘어가며 모두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서두르는 시간이 되면, 그때의 어린 내가, 차가운 맥주 한잔을 들고서 엄마 흉내를 내곤 한다. 이제는 흘러나오는 애국가도 없고 그 연못도 불상도 모과나무도 없으며 물론 엄마, 아버지도 계시지 않는다. 세월이 지나가면 그 자국만큼 잃어버리는 많은 허전함 때문에, 우린 추억이라 부르면서 또 채워가고 있는가 보다. 모두가 각각 길 위에서 인생이라 하며 걸어가고 있지만, 이런 따뜻한 꺼지지 않는 기억들이 고마움으로 또 축복으로 내게 내려온다. 가끔은 지쳐서 손끝조차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도 있고, 또 온통 짜증에 넘쳐 아무에게라도 함부로 하는 날들이 있다. 그런 날이면, 그 무례함과 오만함과 또 감사할 줄 모르는 어리석음에 용서를 빌면서, 두손으로 힘주어 움켜진 체 살고있는 오늘이라는 이름 앞에서 잠시나마 흐트러지고 싶다. 커다란 반항보다 술 한잔의 비틀림으로 - 조금은 미안해하면서 - 풋내나던 예전의 실수들도 다시 기억하면서, 후회보다는 차라리 작은 여유를 찾으련다.
2016-08-01 친구
친구라는 말만 들어도 왠지 힘이 나고 편안하다. 무엇이 무엇 때문에 무엇으로, 우리는 이런 단어로서 불려지고 또 애뜻해 하며 유독 힘든 날엔 더 생각이 나는 것일까? 어릴 적 나란히 연결되어 있는 집의 우리 셋은, 같은 학교와 동네 그리고 똑같은 나이로, 항상 함께 언제나 있었다. 늘 잘 넘어져서 온통 무릎에 상처투성이의 나는, 가운데 친구의 병원 집에서 빨간 약으로 치료받고, 맨 끝의 친구 - 식당 집에서 맛있는 장조림 밥상을 받곤 했었다. 무슨 대화를 했었는지 어떻게 놀았는지의 기억들은 가물거리지만, 한없이 편안했고 욕심내며 싸운 적이 없었다는 생각은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헤어졌고, 세월의 시간 안에서 각자의 인생길을 따라 숨 가쁘게 살아오다, 문득 어느 날 우리 셋은 만났었다. 어릴 적 고향 바닷가의 커다란 소나무 앞에서 그냥 얼굴만 바라보며 아무 말없이 서 있다, 떠나야 하는 차 시간이 된 가운데 집 친구는 그렇게 가버렸고, 남겨진 우리 둘은 또 그렇게 헤어졌다. 너무도 다른 서로의 삶으로, 가운데 집의 친구는 아기도 없이 오로지 남을 위해 희생하며 종교적으로 살고 있고, 끝의 집 친구는 갑작스러운 남편의 죽음으로 혼자 모든 것을 정리해가며 열심히 살고 있으며, 나 또한 이 먼 곳에서 떠나왔던 곳을 그리워하며 이렇게 살고 있다. 과연 운명은 있는 것일까? 스스로가 짊어지고서 가야 하는 등 뒤의 십자가는 정말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그렇게 시간에 휩쓸려 살아지는 것일까? 가끔 우리 셋은 뜬금없는 글들을 보내면서 각각 스스로를 위로하며 또 만나고 싶어 한다. 아무런 할 말도 없고 또 함께 공유해야 하는 공통점도 없으면서, 언제나 마음속의 친구라는 단어의 처음에는 그들이 제일 먼저 순순히 앞자리를 잡는다. 점점 예전의 기억들이 더없이 떠오르는 만큼, 그런 아무것에도 원하던 거 없던 순수함이 그립다. 뭐라도 주고 싶은 아니 내 마음속의 기도라도 그들을 위해 더 올리고 싶은 간절함이다. 한밤의 조용한 시간에 돌아앉아 우두커니 벽을 바라보며 십자가를 그린다. 큰 세상의 반짝이는 화려한 별보다 작고 좁은 나의 하늘 위의 수수한 별처럼, 외로운 날이면 존재의 따뜻함만으로도 작은 위로가 되어주는 그들을 위한, 무릎 꿇은 욕심 없는 기도를 올린다. 오늘도 친구라는 편안한 이름의 누군가에게.
2016-07-03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며칠을 같은 그림을 들고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냥 앉아만 있다가는, 일어나 부엌으로 가 물 한 잔을 들고서 창밖을 바라본다. 생활이라는 공간과 예술이라는 두 가지의 커다란 작업을 한꺼번에 매일같이 나란히 바라보면서 기막힌 줄타기를 하는 중이다. 갑자기 그리고 싶다는 충동이 언제나 항상 오지를 않는다. 그렇지만 마음과 손은 하자고 그래도 해보자면서 나를 이끈다. 수천수만 가지의 온갖 색색의 나비들이 세상을 날아다니면서 강하면서도 어지럽게 유혹한다. 이렇게도 화려한데 나를 모른 척할 거냐고도 하고, 나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본 적이 있느냐고도 하면서, 저녁 밥상의 반찬 걱정하고 있는 나에게 날갯짓한다. 이 귀한 나비들을 어떻게 붙들어서 어떤 마음으로 곁에다 두고 간직하고 있는 것들인데 싶어, 더없이 미안한 마음으로 다시 그림 앞으로 앉는다. 순간의 붓 자국만으로도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실력이 있다면, 어쩌면 지금보다 더 간결하게 양쪽의 줄을 서로 팽팽하게 더 잘 균형을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여전히 예술이라는 가장자리를 아직도 헤매고 있는 천재가 아닌 난 수없이 절망한다. 어쩌면 다 모른 척하며 그냥 나비들만 붙들고서 그리면 엄청난 작품이 나올 것이며, 난 불후의 명작을 남길 수 있을까 하며 상상도 해본다. 그렇지만 해질 무렵의 부엌에서의 난, 언제나처럼 콩나물을 씻고 생선에 소금을 뿌리고 간을 맞추며, 이 테두리 안 동그라미 안에서의 일상을 꾸려간다. 무엇을 위해서 그림을 그리면서 왜 하는 것일까,,,, “아무런 것에도 매달리고 싶지 않아, 그냥 좋아서 사랑해서 하는 것이다. “ 하면서 구속 아닌 더 질긴 구속을 감사해 하면서, 아직도 끝내지 못한 나비의 그림 앞에서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반쯤 비어있는 캔버스 앞에서의 그림 그리는 과정을 느긋한 게으름으로 즐기고 있다.
2016-06-02 글에서 삶을 배우다
글을 읽으면 그 안에서 인생을 배우게 되며, 그 배운 걸 알고 깨달으면서, 그로 인해 얻고 느끼는 그만큼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 책을 처음 받고서는 그 제목이 주는 감동에 조금 흥분했었다. 늘 마음속으로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살아가는 이 삶은, 시작도 끝도 모두 단 한번의 연습도 없으며 또한 정답도 없이 가고 있다. 그렇지만 글에서 배우는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책 속의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깨달으며 삶의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어려운 인생을 우리는 훈련도 없이 또한 연습도 없이 하려니, 힘들고 실수도 하며 가끔은 엉망진창으로 되기도 하며 살아간다. 이 책 속의 첫 이야기에 "소나기의 작가 황순원 선생님"의 말씀이 시작된다. '사람이 어떻게 죽을 것이냐 하는 문제는 곧 어떻게 살 것이냐 하는 문제와 같다.' 어려운 기다란 어떤 설명보다,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이렇게 하나의 문장으로 던져줄 수 있다니, 새삼 책을 들고 구석진 자리를 찾던 어릴 적부터의 버릇에 감사할 뿐이다. 책도 사람도 물건도 - 세상 모든 것에는 저마다의 인연이 있다. 좋은 소중한 만남을 인연으로 만드는 데는 오랜 시간과 정성과 진실이 필요하듯이, 좋은 책 속의 글들을 찾아 마음으로 읽으며 느끼다 어느 한순간, 내 삶에 꼭 필요한 구절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어떤 어느 한 줄의 문장이 내 인생을 바꾸게 되며 또 세상을 바꾸게 되는 그런 기막힌 인연을 만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여전히 책을 든채 아직도 서성이고 있고 또 그런 운명적인 글을 만나지는 못하였지만, 그나마 지금의 이 자리만큼이라도 서 있을 수 있는 건, 글에서 삶을 배우게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2016-05-02 나답게 산다는 것
나처럼 - 나답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소중한 것인지, 또 다른 생일이 곧 오게 되었지만 그나마 이제서라도 알게 되어 참 다행스럽다. 매일매일 어느 한 가지라도 결정을 내려야 하지 않는 일이 없다. 문득 새벽잠에서 깨어 더 잠들까 아니면 일어나 뒷마당에라도 나갈까 하는 것부터, 뭘 먹을까, 무슨 옷을 입을까, 누굴 만나러 나갈까,,, 모든 것이다 스스로가 결정하고 또 해야 하는 일들의 연속인 것이다. 이런 자잘한 일들이 모여지고 쌓여서 어느덧 습관으로 만들어지고, 그런 습관들이 모여져서 나답다는 것이 만들어지는 것이리라. 세상의 소문과 이야기들에 신경 쓰지 않으려, 그냥 모르는 척 듣지도 않은 척하며 살려 한다. 터무니없이 원하지도 바라지도 않으며 그냥 하고픈 거 하면서, 내가 결정하고 만드는 새로운 길을 열심히 배우며 살기를 원한다. 그것을 만들어가고 이루어가는 건 오직 나 자신일 거라고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머리 쓰다듬어주며 겸손해하라고 일러준다.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다 문득 글이 쓰고 싶다는 욕망에 많은 노력을 이 일에 온통 쏟은 채 있지만, 혼자 몰래 행복해한다. 새로운 힘든 길이지만 문득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꿈꾸며 바라던 거였다던 걸 알고서는, 어쩌면 난 지금 내가 원하던 사람으로 되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작은 일에 흔들리지 않고 나를 믿으며, 내가 만들어가는 나처럼 산다는 구속을 기꺼이 받으며,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던 사람이 되도록 애쓰면서 이 환하고 눈부신 봄날에 그렇게 나답게 살고 싶다.
2016-04-04 사랑합니다
3월의 첫 봄비 오는 날, 엄마의 몸은 땅에 묻고, 마음은 내 왼쪽 가슴 한 켠에 묻고서는 , 긴 비행시간을 지나 내가 살고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유난히 아들을 좋아하던 엄마의 불평등에 어릴 적부터 늘 심술이었고, 꼭 언젠가는 왜 그랬느냐고 물어볼거라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늘 칭찬받고 싶은 목마름에 더 열심히 더 애쓰며 살아왔었다. 그렇지만 언제나 한 수 위인 엄마는 생의 마지막 순간을, 오롯이 나와 함께 내 손잡고 떠나시면서 정확히 알으켜 주셨다. "내가 가장 사랑하고 있는 거는 바로 너란다 내 딸아" 언제쯤이면 나는, 엄마처럼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헛껍데기 허물을 벗고서 화려하고 멋진 나비의 새롭고 자유로운 날갯짓으로, 훨훨 더 높이 더 멀리 더 힘껏 날아보련다. 사랑합니다.
2016-03-04 병원 복도에서의 단상
병상의 엄마가 통증에 시달리시다가 간신히 잠드신 것을 보고 병실을 나왔다. 끝이 없을 것 같이 길고도 긴 복도는 한밤중의 정막에 깔려 있었다. 슬픔에 눌린 체 버티어 오든 나의 아픔도, 이 고요 속에서 길고 긴 호흡과 함께 눈물이 되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비릿한 회색빛 한 병실 앞에서, 간호사에게 자판기 커피를 건네주는 환자가 내 눈에 들어왔다. 팔에는 긴 창만한 주사기를 꽃은 체, 한겨울인데도 발가락이 훤히 드러난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그러나 구겨진 환자복에 연세도 꽤나 들어 보이는 남자의 얼굴에 퍼진 미소는 그 많은 주름을 다 덮고 있었다. 아름다운 젊은 간호사에게 커피를 건네는 모습은 그렇게 꽃과 같이 복도에 피어올랐다. 그와 함께 그 커피에 사랑의 묘약이라도 담긴 듯 목마른 내 가슴도 커피를 마시고 싶어졌다. 그리고 아파하는 엄마를 껴안으며, 주름진 목 뒤에서 고백하는 핏줄의 절절한 사랑이, 커피에 담겨 내 가슴으로 흘러들어 오는 듯했다. 복도 위에서 펼쳐진 커피 한잔의 단상은, 이렇게, 아무리 고통받고 슬퍼도 - 시간과 무관하게 지나는 이 밤, 눅눅한 병동에서 잠시 한숨 돌린 순간이었다.
2016-03-04 다시 날아 오르는 독수리
"Hi ! How are you?" "Fine" 스스로 먼저 묻고 혼자 대답해 버린 그의 인사 법이다. 아, 이 얼마나 고맙고 눈물겨운 인사이던가! 사경을 헤매던 그가 무려 7시간 40분의 수술을 마치고 처음 건낸 말이다. 차마 어떠냐고 묻지도 못하는 마음을 미리 헤아려서 일까? 거듭 '괜찮다'고 하는 그의 말을 믿지 못하는 표정을 읽었던지 그는 재빨리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기까지 한다. 마취가 아직 덜 깬 듯 괴로워 하면서도 밝게 웃는 노력이 애처로워 가슴이 시리다. 그 긴 수술시간 동안 미지의 또 다른 세상이라도 보고 온 것일까? "바쁜데 와 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를 덧붙이며 악수까지 청하는 그의 장난스런 모습은 평안이 넘쳐 보인다. 도대체 어떤 힘이 그를 이토록 담대하게 하는지, 그를 바라보는 우리는 기쁨과 놀라움으로 어리둥절할 뿐이다. 몇 개 월전까지만 해도 그는 남들처럼 그저 성실하고 착한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어느 날 기회가 닿아 한국을 방문했다가 종합건강진단을 하게 된 것이 계기가 돼 하루아침에 벼랑 끝으로 떨어지는 인생이 될 줄이야… 그토록 건강하던 사람이 위암에다 간암말기까지 겹쳤고 대장에까지 암세포가 침투하고 있었다니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긴박한 상황 속에서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서 단호한 결단을 내려야 했던 가족들은 눈물을 흘릴 시간조차 없었다. 통계적으로 3% 정도 밖에 가능성이 없다는 생명의 끈을 부여잡고, 오늘 그는 위와 간을 도려내는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수술을 마친 그가 불안과 초조로 발을 구르던 가족들에게 미소까지 지으며 격려하는 모습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과연 무엇일까? 죽음의 문턱을 넘어 다시 돌아온 그의 얼굴에 넘쳐나는 저 평안함이란. 회복 실로 옮겨가는 그를 바라보며 나는 문득 하늘의 왕이라 일컫는 독수리를 생각했다. 40년이란 세월을 산 뒤에는 다시 높고 높은 바위산에 올라 혼자만의 피나는 고행을 이겨내야만 하는 독수리의 일생이 그의 모습 속에 투영되어 온다. 구부러진 부리와 쓸모 없는 닳아버린 발톱, 그리고 더 이상 하늘을 날지 못하게 하는 무거운 깃털. 독수리는 이제 선택해야만 했다. 남아 있는 시간을 그대로 포기하며 죽어가던지, 아니면 높고 높은 바위산에 올라 자신의 몸을 처절하게 부서트려서라도 새롭게 태어나 또 다른 40년을 맞이하든지. 그러나 독수리는 150여일 동안 스스로 피를 흘려가며 자신의 부리를 쪼아 깨트리고 발톱을 짓이기며 깃털을 잡아 뽑아야만 하는 아픔을 겪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외롭고 힘든 자신과의 처절함에서 마침내 독수리는 매끈한 새 부리와 튼튼한 발톱, 구름처럼 가벼운 깃털을 가진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힘차게 푸른 창공을 날아 오르게 되는 것이다. 휘어진 부리와 뽑혀진 발톱, 떨어져 나간 독수리의 날개처럼 느닷없이 반 토막으로 절단 난 형부의 장기들! 그러나 결국 고통을 이겨내고 거듭 태어나 저 높은 창공을 향해 돌진하는 독수리처럼 형부는 그렇게 다시 비상할 것을 나는 믿는다. 형부의 내면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빛나는 비전을 품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롭게 변화된 독수리가 하늘로 날아 오르기까지 먹이를 물어 다 준 친구 독수리가 있었던 것처럼 형부 곁에는 그를 지독히도 사랑하는 내 언니가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힘겨운 날개 짓 없이도 오직 바람을 따라서 넓고 높은 하늘을 유유히 누비는 독수리처럼 그도 또한 사랑의 기류를 타고 멋지고 힘차게 지구를 날아 오를 것이다.
2016-02-03 멋 부리는 것
멋을 낸다는 것은 똑같은 인생을 조금은 더 행복하게 사는 거라 생각한다. 가끔 우울해지며 생각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옷장 속에서 제일 예쁜 옷을 꺼내입고 아주 멋지게 하며 혼자 집을 나선다. 오직 나만을 위해 제일 이쁘게 가장 환한 얼굴로 웃으면서,,, 옷 하나 바꾸어 입고 입술에 색깔 하나 더 넣었지만, 사느라고 가끔은 힘들어 지친 일상의 나를 위하여주고 싶다. 그냥 누구의 작품이 걸렸는지 굳이 알 필요도 없이 미술관에 들러 원 없이 그림 구경도 하고, 텅 빈 느지막한 오후의 카페에서 커피와 샌드위치를 놓고 저 건너 멋진 금발의 젊은 청년 모습도 흘낏거리며 웃어도 보고, 온종일 다른 걱정 않고서 너웃이 해 넘어가는 시간 - 돌아오다 교통체증에 걸려 우연히 찾아낸 CD의 지나간 유행가도 소리소리 내어 따라 부르며, 어느덧 깜깜해진 밤중에 아무 말 없이 집으로 돌아와 조용히 옷 벗으며 혼자 비싯거리며 웃는다. 도로 행복해졌다는 것이다. 오롯이 나만을 위한 멋 부리는 이런 작은 일탈의 순간들이, 갇혀 있던 생각들을 바깥으로 내놓으며, 더 넓은 더 깊은 또 다른 길을 만들어 더 행복해지려는 노력인 것이다. 예쁜 겉의 멋과 더불어 깊은 예술의 멋이 함께하면, 같은 인생의 길 위에서라도 어쩌면 조금은 더 행복해지리라 믿으면서, 마음껏 한층 더 멋 부리며 진하게 살고 싶다.
2016-02-03 네비와 떠난 겨울여행
금요일 오후 하이웨이 4번을 타고 무조건 동쪽으로 향했다. 초행길이라 심히 불안했지만 충성스런 나의 안내자 네비게이션을 굳게 믿고 마음 편히 여행길에 올랐다. 4번 끝에서 북쪽의 89번 도로를 타다가 88번의 서쪽을 지나 49번 남쪽으로 대장정의 여행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오래 전부터 하늘과 맞닿았다는 호프벨리와 그 곳에 있는 숲속의 작은 카페 'Sorenson's Resort'의 향 짙은 커피가 목마르게 그리웠고 길가에 피어 있을 키큰 엉겅퀴와 세이지 국화도 못 견디게 보고 싶었다. 또 하늘을 닮은 호수에서 무지개 송어를 낚아 올리는 그림 같은 낚시꾼의 모습과 9,800피트 높이에서 볼 수 있을 하얀 눈을 상상하며 나는 길을 떠나고 있었다. 얼마 후 도심을 벗어나자 우거진 갈대 숲이 나타났고 일차선 도로로 좁아진 시골길로 들어섰다. 황금 등선 아래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블랙 엥거스와 양 무리가 눈에 보였다. 저 멀리 넓은 들녘 작은 집 어딘가에는 빨갛게 익은 감을 따고 있을 할머니의 모습이 보이는 듯 불현듯이 고향집이 그리워졌다. 한 떼의 우랑탕 오토바이 광들이 줄지어 요란하게 지나간 후 다시 평온이 이어졌다. 이쯤에 다소 마음에 여유가 생기자 나는 긴장을 풀고 음악을 바꿔가며 챙겨간 구운 오징어랑 과자를 집어 먹기 시작했다. 눈과 귀가 즐거워 마음이 행복해지니 운전하면서 먹는 먹거리는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혼자 떠나는 이 자유로움을 왜 망설였던고 살짝 후회하면서 엔젤스캠프를 향해 엑셀을 힘주어 밟았다. 앞 뒤 차량이 거의 없는 시골 길은 내 마음만큼이나 홀가분했다. 무심코 방금 달려 왔던 길을 백밀러를 통해 뒤돌아 봤다. S자로 구부러진 길을 기특하게도 잘 달려왔다는 생각에 형용할 수 없는 애잔함과 기쁨이 일었다. 지금껏 달려 온 길은 내가 앞으로 나아 가야 하는 어떤 길보다 훨씬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낀 것이다. '그래, 너는 지금까지 아주 잘 했어. 최선을 다해 살아왔잖아. 하하하..' 만족한 웃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느닷없는 사고가 발생했다. 왼쪽 운전석 유리 위에 부착한 네비게이션이 발 아래로 툭 떨어진 것이다. 당황하다 못해 황당해진 나는 꺼져버린 네비게이션을 만지작거리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길 찾는 것에 유난히 어리벙벙한 내가 기계를 만진다는 것은 몇 배로 더 어려운 일인 것이다. 이제 곧 날이 어두워질 것이고 인적도 없는 이 산속에서 나는 어찌해야 할지 두렵고 무서워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기분만 가지고 훌쩍 떠나온 여행을 후회했고 진작에 스마트폰으로 바꾸지 않은 게으름을 한탄했다. 당연히 갖추어져 있어야 할 지도 한 장 없는 무지함과 당장에 전화를 걸어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라고 물어 볼 사람조차 없는 것도 너무나 서글펐다. 그러나 생각하면 할수록 무능력한 나의 삶 뒤에는 알지 못하던 끝없는 도움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고 또한 인생의 덧 없음도 인정하게 되었다. '그래,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 나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거야' 사람의 마음은 백지 한 장 차이라고 했던가. 조금전의 의기충천했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길 잃어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떨고 있는 주눅 들린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 보았다. 갓 길에 자동차를 세우고 그렇게 한참 동안 처절한 통회를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경찰차 한 대가 소리 없이 다가왔다. 비에 젖은 사람처럼 쫄아 있는 내 몰골을 보고 그는 친절하게 문제점을 물어왔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네비가 떨어지면서 빠진 연결고리 안의 작은 부속품을 찾아 내었다. 황소처럼 커다란 몸집을 내 자동차에 구겨 넣고 마침내 부속을 찾았다며 어린애처럼 환호성을 지르던 경찰아저씨는 고마워 연신 머리를 조아리는 나를 뒤로 하고 유유히 사라져갔다. 그는 변장하고 찾아온 천사임이 분명했다. 앞 뒤사람의 그림자도 없는 산 중턱 갈림길에서 방황 하고 있는 나를 찾아낼리 전혀 없는 것이다. 사라져간 그의 뒷 모습을 오래도록 아쉬워하며 나는 다시 목적지를 향해 자동차 페달을 힘껏 밟았다. "부~~웅" 불타는 저녁 노을에 이마에서 흘러 내리던 그의 땀방울이 합쳐져 영롱한 아침이슬이 되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2016-01-06 님을 향한 나의 시선
2016년 새로운 해가 열렸습니다. 지난 한 해 지구촌에는 많은 재해와 테러로 인한 피해로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제발 또 다른 새로운 기대를 가지고 시작하는 올 해부터는 세계 곳곳에 신선한 바람이 불어 안전과 평화가 넘쳐나기를 소원하는 바입니다. 얼마 전 내가 뜻하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갑자기 기분 좋은 초대를 받은 것처럼 이 한해 우리가 미처 예상하고 있지 못하던 좋은 소식들이 쏟아져 들려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새해 벽두부터 눈 인사만 할 정도로 지내오던 이웃에 사는 한국아줌마가 시집을 간다며 초대장을 보내왔습니다. 환갑이 훨씬 넘어 결혼하시는 그 분의 용기가 너무 궁금하고 흥미로워서 나는 일찌감치 피로연에 참석했지요. 평소 가끔씩 동네에서 오다가다 마주치던 그분의 모습은 화장기라곤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주근깨투성이 얼굴인데다 늘 허름한 옷차림에 걸음도 팔자 걸음걸이였음을 기억하는 있는 나는 그 날 너무 놀라서 기절할 뻔 했습니다. 각시가 되어 신랑 옆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는 그야말로 나무꾼을 만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눈이 부셨습니다. 옛말에 집과 여자는 가꿔야 한다는 말이 꼭 맞았습니다. 게다가 두 눈에 콩깍지가 끼어 신부를 업어갈 신랑도 어찌나 든든하고 멋져 보이는지 바라보는 내 가슴도 덩달아 두근거렸습니다. 아, 그런데 검은 머리 파 뿌리 되어 혼인한 그들이 회춘하여 흰 머리가 검어지도록 행복하기를 염원하다가 그만 즐거워진 내 입맛을 자제 못하는 불상사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가까스로 조절하고 있던 스커트의 단추가 터져버려 숨겨둔 똥배가 툭 튀어나오고 말았지 뭡니까. 하지만 나는 많은 하객들 앞에서 결코 기죽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면 괜찮아, 이 불거진 배야말로 인생을 넉넉하게 살아왔다는 훈장이지 뭐' 라며 아줌마답게 나 스스로를 쿨 하게 격려했습니다. 어쨌든 실컷 먹고도 유독 나에게 더 인정을 베풀어준 신부님이 손목이 휘도록 싸 들려준 잔치음식을 들고 집에 돌아 오는 길엔 미소가 계속 번졌습니다. 그녀가 늦게나마 사랑하는 임을 만나 기뻐하는 것 이상으로 나에게도 좋아서 어찌할 수 없는 님 생각에 웃음이 절로 나온 겁니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나의 님은 자그마치 백 명이나 됩니다. 일전에 지면에 글로서 털어 놓았듯이 내가 3년째 살고 있는 달팽이 같은 나의 집 문패는 '힐링 홈' 입니다. 작년 말에 다녀간 백 번째의 손님은 아프리카에서 방문한 고령의 선교사 할머니셨습니다. 어찌어찌 하여 우리 집에 대한 소문을 들으신 그 분이 한 달을 머물러 계시는 동안은 천국에 가 계신 나의 친정어머님과 함께 살고 있는 듯 내내 훈훈한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 동안 나의 작은 쉼터에 머물다 가신 님들은 가까운 이웃은 물론 미국 동서남북과 타국 등 여러 지역에서 오셨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홈스테이나 하숙을 경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 인생 길 걸어오는 동안 집 없는 설움을 혹독하게 겪은 후에 깨달은 것은 세상살이란 잠시 캠핑 나온 것쯤으로 생각이 되어 나의 가진 모든 것은 결코 내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어느 날인가부터 우리집은 '힐링 홈'이 되어 배고픈 님, 삶에 지친 님, 오갈 데 없는 님, 서럽고 외로운 님, 소외되어 왕따로 울고 있는 님, 버림 받은 님들이 잠시 쉬었다가 힘을 얻어 다시 출발하는 쉼터가 되었습니다. 작은 소망이 있다면 올 한 해도 이 행복한 힐링 쉼터의 문을 두드리는 가난하고 힘없는 님들이 좀 더 편안한 식사를 하실 수 있도록 푹신한 의자로 바꾸고 싶고 작은 텃밭도 알뜰살뜰 더 늘려서 풍성한 먹거리 야채를 한 가득심을 계획입니다. 내가 선물로 받은 올 한해도 힘있게 뛰고 달릴 수 있는 이유는 곁에 있어도 그리운 사랑하는 님들을 돌아보는 기쁨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이 한해 힘 내세요! 우리 모두 파이팅 입니다.
2016-01-06 얼굴
얼굴이 지닌 뜻은 '얼?영혼' '굴-통로' 즉 그 사람의 마음의 길이라고 한다. 누구든 처음 만나면 제일 먼저 보게 되는 모습이 바로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라는 이야기다. 아침에 일어나 처음 마주보는 나의 모습을 보고서 인사한다. 오늘도 수고하며 잘해보자고. 세월에 못 이겨서 생겨난 어쩔 수 없는 주름과 자연의 법칙 탓에 자꾸 밑으로만 내려오려는 처짐이지만 그래도 살아온, 살아가는, 살아갈 모든 것이 바로 6초 안에 다 보여지는 얼굴에 화해하고 부탁하려는 것이다. 새로운 해가 오고 숫자는 또 하나 더 보태지겠지만, 멋지게 나이 들어가는 그런 얼굴이 되고 싶다. 시간의 정직함에 저항하지 않으며, 바람 불면서 가끔 설레는 찰나에 흔들리지 않으며, 터무니없는 욕심부려 나를 괴롭히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이기려 하지 않는 마음으로 이제는 겉의 얼굴이 아닌 속에서 만들어내는 진정한 얼굴의 모습으로 살고 싶다. 숨기지도 못하며 거짓일 수도 없는 환한 미소 지으면서 -비록 지금까지 조금은 예쁘지 않으며 울퉁불퉁한 인생이었더라도? 책임지는 얼굴로 또 다른 새해 멋지게 시작하련다.
2015-12-05 한 해가 또 지나 가는데....
마지막은 끝이 아니라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거라 믿는다. 좋은 일, 나쁜 일들 다 지나보면 이 모든 것들이 다 새로운 일을 위한 기꺼운 준비였음을, 세월을 한참 지나고 보니 알 게 되더라. 언제나 이렇게 비가 오고 겨울이라는 추위와 한 해가 저물어가는 때가 오면, 아주 예전에 힘들었든 나의 시간들이 떠오르고 새삼 감사함에 무릎 꿇는다. 어려움에 새로 직장을 가져야 했고, 살고 있던 집을 나와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었야 했던 그때 한순간, 난 마지막이라는 생각도 했다. 세상 밖의 치열함을 하나도 몰랐든 미숙한 어리광이었겠지만, 그때가 끝이라고 생각했었다면 지금의 이 자리가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대가로 얻은 깨달음에, 지금 그냥 묵묵히 내 몫의 자리를 지키면서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있다. 살아야 한다는 것을 위해 살다 어느새 또 한해가 끝나가고, 서둘러 책상 앞에 앉는다. 무엇이 귀하고 깊고 멋지며 소중한 것에 대한 마음은 지극히 다르겠지만, 그냥 어제가 오늘 같고 또 오늘이 내일 같은 마냥 평범한 삶이 더 힘들고 귀하다. 내 곁에 있는 모든 이들이 언제나처럼 함께 지켜주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오래도록 할 수 있는 튼튼함이 있어 주고, 보고 싶어 뭐라도 핑계 들고서 만나야 하는 이가 있음이 얼마나 감사하고 또 감사한지. 올해의 마지막도 언제나처럼 지나가고, 다시 돌아오는 새해에도 똑같이 모든 내 주위의 것들이 여전히 있으리라 믿으면서 새롭게 또 힘주어 시작하련다.
2015-12-03 감사합니다.
'100년을 살 것처럼 열심히 일하고 내일 죽을 것처럼 간절히 기도하라' 고 외친 벤자민 프랭크린의 말을 떠올리면서 올 한 해 나의 행적을 점검해 보기로 했습니다. 2015년 새해 첫날 결단한 것이 있다면 그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무엇에든지 감사만 하겠노라 마음 먹었습니다. 매년 새해를 맞을 때마다 만 가지 복을 빌어본들 실상 내 뜻대로 되는 일이란 별로 없었음을 경험하고 있는 나로서는 더 이상 '복' 따위에 속지 않으리라는 심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특한 결단에 조롱이라도 하듯 새해 초장부터 원통하고 절통한 일이 시작되더니 일년 내내 눈물 빼는 일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잘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는가 하면 친한 친구와의 오해로 뼈아픈 결별을 해야만 했고 가족 중에 암 수술을 지켜봐야 하는 아픔도 겪었습니다. 자동차의 잦은 고장으로 주행 중 애간장이 녹기도 하고 한밤중에 도둑에게 자동차를 털린 일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습니다. 또 잔병치레 없이 건강을 자부하고 있던 나에게 의사는 나이에 따른 질병이 생겼다며 경고까지 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죽기 살기로 열심히 뛰고 달렸지만 벌이들인 것에 비해 지출은 배가 되어서 통장은 늘 배고픈 채로 있었습니다. 햇빛 따사로운 가을 날 호젓이 배낭 짊어지고 낙엽 여행을 떠나려던 계획은 실행도 못해보았고 그나마 고달픈 인생에 기쁨이었던 시나리오 글쓰기 원고는 마침표를 찍지 못한 채 해를 넘기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도 가장 마음에 앙금으로 남아 있는 것은 사람과의 연결고리에 있어 불청객이 끼어 껄끄러워진 일입니다. 워낙 긍정적인 마음을 선물로 받고 태어나 엔돌핀은 물론 다이돌핀까지 넘치던 나의 감정은 어느덧 가뭄에 쩍 갈라져 버린 논바닥 같아 보였습니다. 이리저리 생각해봐도 올 한해 진심으로 감사 드리고 싶은 일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을 달랠 길 없던 중에 문득 깜빡 잊고 있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하마터면 실의에 빠져 그녀와의 약속을 놓칠 뻔 했습니다. 그녀를 떠올리자 늘 함박꽃 웃음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못 견디게 그리워졌습니다. 나는 한 걸음에 그곳으로 달려갔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의 이름은 '제이'이며 중증 1급 뇌성마비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평생을 침대에 누워 지낸 세월이 자그마치 58년입니다. 그녀의 신체 중에서 제대로 활동할 수 있는 기능은 눈과 귀, 입 뿐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기할 만큼 그녀의 기억력은 대단합니다. 몇 년 전 크리스마스 전날에 케어 홈을 방문했다가 우연히 한국사람인 제이를 만나게 되었을 때 나는 무척 당혹스러웠습니다. 손가락과 발가락은 물론 혀까지도 심히 꼬여 있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는데다 용변마저 옆구리를 뚫어 받아내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인가를 표현하려 애쓸 때에는 눈과 손에 심한 경련이 일어나므로 무섭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겉모양과는 달리 제이의 마음은 얼마나 착하고 선한지 늘 입꼬리가 귀 끝까지 올라가 있었습니다. 유난히 노래를 좋아하는 제이는 만날 때마다 무언가의 곡을 흥얼거리고 있어 음율과 거리가 먼 나까지도 절로 신명 나게 만들어줍니다. 우리는 어느덧 절친한 친구가 되어 서로의 속마음까지 털어 놓습니다. 다른 이들은 절대 알아들을 수 없는 비밀을 저는 다 알아 들을 수 있어 즐겁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내가 제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밥을 먹여주는 일과 책을 읽어 주는 일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밥을 먹이는 일은 절대로 노하우가 필요합니다. 먹는 음식 중 반 정도가 밖으로 흘러 내려오기에 입을 벌리는 동시에 음식을 입안으로 밀어 넣는 타이밍은 무척 중요합니다. 내가 한술 한술 조심스레 떠 넣어주는 음식을 제이가 맛있게 꿀꺽 삼켜 줄 때마다 나는 얼마나 뿌듯한지 세상을 다 얻은 기분입니다. 그녀의 소원은 아름다운 이 세상에서 더 오래 살고 싶다고 말합니다. 불편하게 태어났지만 받은 것이 너무 많다며 미안해 하는 제이는 훗날 그 나라에 가면 넘치게 받은 사랑들을 백배로 갚을 것이라고 내게 속삭입니다. 이제 그녀에게 읽어준 책은 올해 들어 12권 째가 됩니다. 얼마 후 마지막 책장을 덮는 날 우린 큰 파티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 날에 제이가 너무 기뻐서 온몸을 흔드는 모습을 생각만해도 나는 흥이 납니다. 나는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제이, 너무도 많이 부족하게 가지고 있는 그녀가 평생 감사하며 살아온 시간 모두는 하늘로 건져 올려진 값진 보물이었으나 정작 모든 것을 다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툴툴거리며 불평했던 나의 시간들은 여지없이 땅에 떨어져 낭비되었다는 것을. 나는 뒤늦게 서둘러 기도를 올립니다. 나의 소원과 다른 부족과 결핍, 불편과 절박함 고통과 눈물이라는 기적의 재료를 선물로 주셨음을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2015-11-05 가을의 노래
누군가가 들려준 김대규 시인의 '가을의 노래'라는 시의 몇 구절이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면 가을이다. 떠나지는 않아도 황혼마다 돌아오면 가을이다. 사람이 보고 싶어지면 가을이다. 편지를 부치러 나갔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주머니에 그대로 있으면 가을이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 때문에 집을 떠난 뒤 긴 시간을 돌아 지금 여기까지 와있다. 문듯 운전을 하다 해가 너웃너웃 지며 빨갛게 물들어져 가는 하늘을 바라보면, 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만 할 것 같아 서둔다. 집 떠나 살든 어린 마음속에 혼자서 외로워하든 그때가 떠올라, 솟구치는 이상한 두려움으로 얼른 나의 집으로 돌아온다. 세월의 씻김에 많이도 무뎌지고 희미해진 감정들이지만, 아직도 가을이라는 글자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외롭고 또 보고 싶다. 굳이 가을이라는 변명으로. 못다 한 외로움, 그리움을 - 올해도 똑같은 쓸쓸함으로 덮고 나면 언제나처럼 되돌아올 것이지만, 난 지금 그냥 떠나서 다시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 보련다. 이제는 아주 나이 많은 엄마 앞에서 다시 어린 딸로 다가가 기대어도 보고 싶고, 부끄럽지만 함께 손잡고, 함께 웃으며, 함께 맛있는 거 먹으면서 지내고 오고 싶다. 나 또한 저렇게 엄마처럼 나이 먹으면서 살게 될 거라는 멋진 자화상 보면서, 정말 기쁘고 행복한 가을의 노래를 실컷 불러 볼 것이다.
2015-11-01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의 비밀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시카고 공항에 내렸습니다. 낮설은 공항엔 북적거리는 인파로 정신이 없지만 웬지 친근감이 느껴집니다. 유나이트 항공사측의 좌석배치 컴퓨터 오류로 정해진 시간에 탑승하지 못한 승객들 사이에 끼어 있는 나는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흥미로움에 전혀 지루한 줄을 모릅니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대체 무슨 일을 하며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은 오랜 기다림에 죄송하다며 속히 탑승해 줄 것을 알리는 승무원의 안내방송마저 섭섭하게 들려집니다. 내 좌석은 비행기 날개 쪽 창가입니다. 잠시 후 비행기가 활주로 끝에서 공중으로 떠오르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몸부림을 치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에 200여명을 태운 무거운 물체가 가뿐히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구름보다 더 높이 올려진 나는 점점이 작아지고 있는 산과 바다, 고층 빌딩과 집들, 그리고 줄지어 달리는 자동차들의 물결을 내려다봅니다. 하늘에서 본 아래 세상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합니다. 수많은 문제 앞에서 선택과 후회를 반복하면서 치열한 싸움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 좀전의 시끌벅적 했던 사람들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사람 살아가는 일이 어쩌면 한 순간 꿈 일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눈을 감으니 평안해집니다. 문득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의 산수화가 잔잔히 마음에 펼쳐집니다. 나는 지금 딸아이와 함께 멀리 동부에 살고 있는 소녀에게 왕진을 다녀 오는 길입니다. 지난 주말, 방문해 달라는 메모와 함께 두 장의 비행기표를 보내온 사람은 친척과 다름 없는 이웃 사촌입니다. 모든 일을 접어두고 급하게 달려간 그곳엔 가족간에 미움과 원망과 오해로 뒤엉켜있었습니다. 다빈이 부모는 25년 전에 한국의 고아원에서 예쁜 갓난아이를 입양했습니다. 고맙게도 착한 모범생으로 잘 자라주던 다빈이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곁길로 나가더니 마약에 손을 댄뒤 막장인생이 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아이가 출생에 대한 비밀을 알기 시작한 뒤 자신은 저주받은 인생이라고 생각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부모는 부모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각기 다른 각도에서 자신들의 억울함에 반응하고 있는 모습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서로가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는 것만이 부모와 자식간에 사랑이 회복할 수 있는 길임을 강조했으나 그들의 귀에는 아무런 말도 들려지지 않는 듯 했습니다. 나는 어느 한 날 갑자기 땅 아래로 곤두박질 쳤던 우리 딸아이의 삶을 털어놓으며 인생은 해석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한 장의 CD 얘기를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좋은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딸 아이가 곧 이어 의과대학원 입학을 며칠 남겨 놓지 않을 즈음입니다. 몸살기가 있다던 아이가 감기에 걸렸습니다. 나는 습관대로 집에 남겨져 있는 감기약을 먼저 복용케 하였습니다. 그러나 차도가 없자 강도가 좀 더 센 약을 찾아 먹였는데 이후 딸아이는 웬일인지 아예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를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급기야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는 이미 감기바이러스가 폐로 옮겨갔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호흡곤란으로 인한 심장의 악화로 체력이 바닥나 있는 상태에서 아이는 여러 날이 흘러도 기력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면역력이 없는 가운데 또 다른 질병이 아이의 신체 중 장기에 붙어있음을 발견했습니다. 한차례 응급수술을 받았으나 완쾌되지 않아 주사와 독한 약을 병행하여 치료를 했지만 아이는 처절할 정도로 지쳐가기만 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제 탓인 것을 한탄하며 극심한 번민과 괴로움 속에서 딸 대신 내가 아플 수 있기를 바랬습니다. 엄마가 돼서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마켓의 문이 닳도록 드나드는 일이었습니다. 어떻게든 아이의 입맛을 되살려내서 전처럼 건강하게 뛰고 달릴 수 있기를 소망하는 마음 절박해서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늘상 그렇듯이 한국마켓 입구에는 각종 지역신문과 여려 교회의 CD가 널려 있기에 곁눈질로 흘려 보고 지나치려는데 유독 '관점' 이라는 제목을 가진 CD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집에 돌아온 나는 별 기대 없이 그 CD를 틀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얘기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쭉쭉 빵빵 잘 나가고 있던 딸아이의 인생이 하루아침에 엉망진창이 돼버린 지금, 결코 이해와 용납이 되지 않는 절망적인 우리의 처지를 심원법으로 끌어올려 해석하라는 말이 들려왔습니다. 안평대군의 꿈을 그려낸 '몽유도원도'는 보는 각도에 따라 고원법과 평원법, 심원법으로 그려졌음을 설명하며 관점의 해석에 따라 반응이 다르므로 행복한 인생은 올바른 해석에 달려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현실 앞에 놓인 걱정과 근심, 절망과 실패의 암울함은 평원법과 고원법으로만 보여질 뿐 내 삶의 그림을 심원 법으로 끌어 올리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좋은 생각에만 몰입했더니 그동안 잃어버린 감사한 일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면서 웃음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감사할수 없을 때 감사하는 것이 가장 큰 감사라는 것을 그 때 알았습니다. 어느 덧 4년여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남들보다 몇 발자국 늦었지만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딸아이의 모습은 씩씩합니다. 늦은 만큼 더 단단해졌으니 어떠한 어려움에도 웃음을 잃지 않으리라 믿어집니다. 그리고 죽을 만큼 아파 봤으니 몸은 물론 상처 난 마음까지도 잘 치료하는 훌륭한 힐링 의료인이 될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제 경험으로 보아 인생길에는 이따금씩 브레이크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만큼 살아오는 동안 시원하게 잘 뻗은 인생의 고속도로만 질주했다면 아마 나는 '몽유도원도' 속에 숨어 있는 복숭아꽃 만발한 무릉도원은 영영 발견하지 못했을 겁니다. 10분 후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한다는 기내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비행시간동안 꺼 두었던 셀폰을 꺼내 열었습니다. 한 개의 메시지가 찍혀 있었습니다. '우리 딸 다빈이가 짐을 싸 들고 완전히 집에 돌아왔습니다. 눈물 뚝, 행복시작입니다.'
2015-10-03 냉장고를 부탁해
정말 큰 일입니다. 마음 약한 제가 또 일을 저질렀습니다. 일년에 한번 맞이하는 귀한 노동절 날에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집안 정리를 하겠노라며 아직도 깨끗한 거실의 커튼을 뜯어 내리고 가구의 배치를 옮기기 위해 난리법석을 떨고 있을 때 남가주로 이사 간 절친한 친구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친구야, 난데, 뭐하고 있어? 한국서 친정 엄마랑 조카가 놀러 와서 샌프란시스코를 구경 시켜 드렸는데 지금 돌아가는 길에 자기 집에 들릴까 해서… 괜찮을까?", "지금? 집안이 엉망이라서….", "괜찮아, 우리 사이에 뭘 그런걸 신경 써. 지금 안 보면 언제 또 얼굴 보겠어. 보고 싶당", "그래, 그럼 놀러 와" 마음이 다소 불편했지만 때마침 집안 정리하는 일에 싫증을 느끼고 있던터라 손님의 방문을 허락 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좀 전의 내 판단이 그토록 크게 후회가 될 줄은 시계를 보고 나서야 더 절감했습니다. 때는 곧 저녁 식사시간이었고 손님이 곧 들이닥칠 시간은 불과 1시간 남짓 남았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급한 김에 거실 바닥에 가득 쌓여 있는 물건들을 구석에 있는 옷장 속에 마구잡이로 쑤셔 놓고 닫히지 않는 문을 어깨의 힘으로 겨우 밀어 부친 후에야 부엌으로 달려갔습니다. 냉장고 문을 열었습니다. 아! 그런데 어쩌면 좋을까요? 쉬어빠진 김치와 남겨놓은 잡채와 시들해진 몇 가지 야채, 그리고 콩조림과 짱아치를 비롯한 약간의 밑반찬 뿐이었습니다. 긴 한숨이 나왔습니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갖고 냉동실 문을 열었습니다. 꽝꽝 얼어있는 홍합과 새우, 연시감과 찹쌀떡, 아이스크림 등에서 하얀 김의 찬 기운이 내 얼굴로 품어져 나왔습니다. 역시나로 확인된 냉동실에 실망한 무너진 마음을 추스리면서 얼마 전까지 먹거리를 냉장고에 잔뜩 보관해 놓고는 곧잘 잊어버리던 나쁜 습관을 바꾼 것마저 후회가 되었습니다. 재료를 꺼내 놓고 고민하는 시간이 10분이나 흘렀습니다. 마음이 무척 바빠졌습니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손님의 연령대였습니다. 손님으로 올 조카의 나이를 고려한다면 이십 대 후반을 시작으로 친구 어머니는 대충 육십 대 후반으로 추측합니다. 한국에서 오셨다니 식상한 한식스타일을 벗어나야 하겠지만 여행 중 다소 느끼했을 미국식단도 고려해야 하고 또 집을 떠난 뒤 그리웠을 고향집 밥맛으로 구수하고 깔끔한 맛을 느끼게 할 한식과 양식의 접목식단으로 입맛을 확 사로 잡아야 하는 일이 큰 숙제입니다. 잠시 후 식탁에 올려질 음식들이 선명하게 그려졌습니다. 슬그머니 입가에 미소가 번졌습니다. 나는 몇 십 년의 재빠른 주부경력 손놀림으로 양파와 매운 고추, 버섯을 다져서 생선알과 마요네즈를 섞어 매콤하고도 담백한 홍합구이를 만들었습니다. 잡채는 남아있던 야채와 깻잎 등 오징어를 함께 다져서 오묘한 맛의 잡채전을 준비했고, 신 김치는 물에 빨아 송송 썰어서 올리브유에 볶은 뒤 고소하고도 칼칼한 식감 좋은 김치파스타를 만들었습니다. 또 새우는 등을 갈라 버터와 후추로 구운 뒤 손 마디만한 크기로 썬 납작한 오이와 섞어 유자청과 레몬을 짜서 약간의 마늘과 함께 새콤달콤한 소스를 만들어 입안을 개운하게 하고도 남을 새우오이 냉채를 준비했습니다. 또 노인의 치아를 위해서는 고기를 아주 얇게 채 썰어서 노란 부추와 팽이버섯을 넣어 구수한 맛을 더했습니다. 디저트로는 얼어있던 연시 감을 샤베트 대용으로 생각했으며 바나나를 구워 그 뜨거운 바나나 한 켠에 아이스크림을 얹어서 따뜻함과 차가움에 부드러운 맛을 함께 음미케 하여 입안의 향긋한 풍미가 오래 남도록 준비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 시간 30분 동안에 코스요리로 만들어낸 요리는 여덟까지, 무엇보다도 요리에 맞는 그릇 선택은 매우 중요함을 알고 있는 나는 최대한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게다가 한 쪽 구석에 묵혀두었던 단호박을 꺼내 위의 꼭지를 오려내어 씨를 파낸 후 그 안에 물을 넣고 뒷 뜰에 피어 있는 들꽃을 꽃아 식탁 가운데 장식했더니 정말 대단히 멋졌습니다. 게다가 삼단으로 된 호박 초로 불을 밝히니 그 우아한 분위기란 와우! 내가 생각해도 어찌 그리 기발했는지 기특하기만 했습니다. 어느덧 다섯 분의 손님들이 극히 만족하고 행복한 식사를 마친 뒤 떠날 채비를 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거실 한쪽 구석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습니다. 손님 맞이에 어쩔 수 없어서 억지로 구겨 처넣었던 물건들이 옷장 문이 열리면서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말았지 뭡니까. 그 어처구니 없는 광경에 친구가 한 마디 합니다. "아이고 넌 여전 하구나. 아무튼 넌 이래서 영원히 귀여워" 그들이 떠난 뒤 남기고 간 사람사는 냄새가 금새 다시 그리워 질 것 같아 나는 얼마동안 식탁을 치우지 않았습니다. 호박꽃 촛농이 흘러 넘칠 때까지.
2015-10-01 조각보 단상
문득 올려다 본 침대 위에 걸려있는 여러 색깔의 조각보를 보았다. 어쩌면 산다는 것도 이 작은 조각조각들이 모아져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여러 조각의 자투리 천들을 모아 하나하나의 다른 색과 질감이 따로 같이 이어져서 만들어내는 기가 막힌 예술 작품인 것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아무런 기술도 부리지 않으며 무엇을 하겠다는 어떤 모양의 작정도 없는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이라고 표현할 만큼 인위적이지 않고 그냥 편안하게 평범하다. 산다는 것 아니 서로가 너무도 다른 이들과 함께 삶의 길을 간다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다. 모두가 따로 떨어져 있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듯이, 결국은 혼자서는 아무 것도 안된다는 그런 이야기다. 싫어하고 좋아하는 사람의 구별이 너무도 뚜렷한 나는, 좋으면 하늘에 떠 있는 별이라도 따서 다 주고픈 마음이고, 싫어하는 사람은 눈길 하나도 주고 싶어 하지 않는 못된 성격이다. 그로 인해 가끔 여러 형태의 불편함도 겪지만, 수없는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는 사랑, 질시와 비난과 아픔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과는 기준이 다른 아름다운 사랑, 찬사의 향연 속에 또 지금 같은 행복도 있다. 그런 모든 하나하나의 조각들로서 엮어져 결국은 작품 . 인생으로 이름 지어지는 것이다. 오늘도 누군가를 만날 것이고 또 하나를 이어갈 것이다. 식구들을 위해 부엌에서 쌀을 씻고 저녁 반찬을 준비하며, 감당 못할 욕심도 없고 특별한 기교도 없이 인생이라는 조각을 꿰매어 갈 것이지만, 어쩌면 멀찌감치에서 하나의 예술로서 바라본다면 누군가는 잘 만들어진 조각보 인생이었다고 해주었으면 싶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2015-09-02 머리에 꽃을 단 여자
편집국에서 또 연락이 왔습니다. 이제라도 그만 고집을 접고 사진을 제출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편집상 얼굴사진이 없는 글은 폼이 나지 않아 매번 월간지의 뒷면 쪽에 글을 실을 수 밖에 없다는 귀여운 엄포까지 놓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죄송한 마음을 전하며 그 제안에 동의 하지 않았습니다. 월간지에 오르는 다른 작가나 칼럼니스트들의 깔끔하고 품위 있는 사진을 들여다 볼 때마다 부럽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나는 그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유독 사진발 잘 받는 내가 굳이 복면 작가의 길을 걷는 이유라면 이렇습니다. 오래 전 잠깐이나마 신문에 단편 소설을 연재한 적이 있었습니다. 글의 내용은 순수한 중년 연인의 로맨스였는데 글 속 주인공들의 스킨 십 장면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어떤 극성스러운 독자가 매우 거칠고도 끈질기게 요구한 장면은 다름아닌 키스 신이었는데 "너무 싱겁다, 좀 더 리얼하게 표현해라, 누구 속 타 죽는 꼴을 볼 것이냐"며 들들 볶았습니다. 더 나아가 다른 독자는 "판에 박은 삼류 소설 그만 써라, 네 연애 얘기냐" 등 예의 없는 전화질로 곤혹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대리 만족을 위해 본질을 벗어날 수는 없기에 주인공들의 지고 지순함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마무리하여 부랴부랴 연재를 끝내고 말았습니다. 그때 나는 솔직히 상처받았습니다. 글에 대한 의욕과 열정만 가득했을 뿐 독자들의 쓴 소리를 감당할 수 있는 배포도 실력도 없는 겁쟁이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참으로 자신 있어 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털어놓자면 나는 심각한 음치, 몸 치, 길치요 기계치 입니다. 십년 내내 똑 같은 길도 어느 날 도로공사가 시작되는가 싶으면 정신을 차릴 수 없는 혼돈으로 길을 잃어 버리는 일이 허다합니다. 또 큰 맘먹고 합창단에 입단하여 우아한 목소리를 자랑하려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내 파트인 소프라노를 놓치고 옆 사람의 알토를 따라 가기에 비지땀을 흘리기 일쑤입니다. 벼르고 벼르다가 용기 내어 에어로빅 댄스를 배우리라 부지런을 떨었지만 간단한 박자 하나 맞추지 못해 팀원들로부터 낙오되어 엉거주춤 뒤로 물러나야 하는 처량함은 달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무사고로 자동차 운전을 하고 다닌다는 것은 여간 신통 한 일이 아닙니다. 복잡한 스마트 폰 사용법을 배울 때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흥미도 없고 관심도 없고 재주도 없는 일을 새로 배운다는 것은 고통이지만 나름 부단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혼자서 노래방을 수십 번이나 들락거려 보고 집에서 DVD를 틀어놓고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 강남스타일 춤을 연습 또 연습 했지만 결국 발뒤꿈치가 까지고 무릎에 관절만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냥 생겨 먹은 대로 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글에 대한 열정적인 에너지는 전혀 다릅니다. 비록 이름을 바꾸고 가면을 뒤집어 쓸지언정 글 만큼은 써야 합니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머리에 꽃을 단 소녀를 아시는지요? 그 순진한 미친 소녀가 모든 것은 다 참아줘도 누군가가 머리의 꽃을 건드리는 순간엔 흡혈귀처럼 변하는 것을 요. 그렇습니다. 소신 있게 쓴 글에 대해 터무니없이 상처를 내면 나 역시 동막골의 미친 여자로 변신합니다. 요즘 틈틈이 드라마를 씁니다. 새로운 장르인 시나리오를 쓰는 일에 흠뻑 취해 혼자 히죽거립니다. 때가 되어 이 글을 발표할 때에도 나는 얼굴 없는 복면작가 일 것입니다. 한 문장 한 소절로 사람을 얻을 수만 있다면 언제까지든 기쁨으로 쓰는 이 펜을 놓지 않을 것입니다. 모두가 힘겨운 세상살이에 살맛이 나도록 행복을 전하는 요정이고 싶습니다.